*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타자의 얼굴

양평_김나리 작가의 작업실





김나리 작가는 한국교원대학교 재학 시절 미술교육을 전공하며 주로 서양화 작업을 익혔다. 어느 날 불현듯 도예에 매료되어 서울산업대학원의 도예과로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도예 조형 작업에 정착하게 되었다. 도예라는 장르의 특성상 워낙에 오랜 시간과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3~4년마다 꾸준히 개인전을 가지며 십 수 년째 묵묵히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김나리 작가. 필자와 동명이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녀와의 첫 만남은 이전부터 설렜다. 설렘을 안고 들어선 그녀의 작업실 내부는 군더더기 없이 새하얀 벽면으로 되어 있었고, 한편에 놓인 테이블 위를 덮은 이국적인 패턴의 패브릭이 유난히 돋보였다. 그 화려한 테이블 위에, 그리고 사방에 일렬로 늘어선 선반 위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작가가 이곳 양평 양동면 고송리에 정착한 것은 2008년이었다. 본디 이곳은 김나리 작가의 스승인 조각가 이종빈 선생이 2002년에 지어 작업실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나리 작가가 이곳에 자청해서 입주하게 되었다 다양한 매체를 다루었던 이종빈 선생이 테라코타 작업을 하면서 작업실에 구비해 두었던 가마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그녀에겐 꽤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창 시절 은사님과 동학들이 종종 모여서 예술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나누던 이곳은 이미 작가에게 심적인 편안함을 주는 곳이었다.




사실 작가는 각박한 서울 생활에 지치기도 했거니와 가마를 놓을 공간도 필요했기에 그보다 훨씬 전인 2002년에 이미 양평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때 첫 양평 작업실은 지평면의 빈 농가를 개조해 꾸린 곳이었다. 하지만 지평면에서 겪었던 자연 파괴의 경험들은 지금까지도 작가의 뇌리 속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마당에 들어야 할 햇볕을 가린다는 이유로 집 앞 향나무가 모조리 베어져 버린 일, 출퇴근길 유독 작가를 따랐던 앞집 개가 주인 손에 살생되었던 일 등 이 모든 끔찍한 일들을 뒤로하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작업에 몰두할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지금 이곳 고송리 작업실에서 작가는 인간과 동물, 식물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인간이 임의적으로 부여한 위계를 삭제하는 일에 몰두한다. 타인이라는 타자뿐만 아니라 자연이라는 타자에 대한 그의 진심 어린 경외심을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지극히 노동 집약적인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흙으로 형상을 빚고 6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여 자연 건조시키고, 그것을 또다시 파내거나 다듬어 다시 건조하고 가마에 구워내는 데에는 대략 1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어디 이뿐인가. 타오르는 가마 속에 정성스레 빚은 형상들을 넣었더라도 이 형상이 온전하게 나올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긴 인내를 요하면서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예의 까다로운 특성을 작가는 겸허히 받아들인다. 거친 흙의 질감이 살아 있는 조합토 반죽의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한 탓에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은 도예 조형이라는 장르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노동의 시간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작가와 흙 조형의 운명적인 만남은 생활 자기를 배웠던 대학원 시절의 수업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생활 자기를 만들면서 흙의 속성에 익숙해졌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 보니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에 목이 말랐다. 때로는 작가 자신의 개인적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때로는 일상의 허공을 떠도는 신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들에 함축된 집단적인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형상들이 그녀의 작업에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 대부분의 작업은 흉상이나 두상의 형식을 유지하는 인물상으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얼굴을 둘러싼 목과 같은 신체 부분들에 대한 묘사는 지극히 단순하게 처리되어,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얼굴 표정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표정의 깊이를 심화해 줄 수 있는 특정 신체 부위들(가령 손이나 머리카락, 귀 등)이 간혹 기묘한 형태와 질감을 뽐내며 강조되거나, 혹은 꽃이나 나무, 해골, 동물 등과 같은 상징적 도상들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머리카락 대신 풍성한 꽃장식이 얹히기도 하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꽃송이가 피어오르기도 하며, 얼굴 전체가 화염에 그을어 얼굴의 형체가 절반만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요소들과 어울려 작가가 일관되게 향하는 것은 바로 ‘얼굴’이다.




무의식에서 떠다니던 얼굴을 현시한 그녀의 작업에는 타자와 공존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얼굴은 사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물은 전체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지니지만, 얼굴의 의미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은 사물과 전혀 다른 차원에 놓인다. 쉽게 말해, 바퀴와 문, 엔진, 라이트, 유리창 등이 모여 자동차라는 하나의 사물을 이룰 수 있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다. 단순히 눈, 이마, 턱, 코, 입이라는 요소들을 분석해서는 결코 그 심원한 의미를 구성해 낼 수 없다. ‘~에 대한 의미’라 함은 일반적으로 다른 무엇과의 관련성을 전제하지만, 얼굴은 오직 그 자신에 대한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그 어떤 생각이나 분석도 허락하지 않는다. 너는 너다. 타자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그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한 우리는 타자의 무한한 타자성과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얼굴의 정직함이 있다. 숨김없이 얼굴을 드러낸다. 얼굴의 살갗은 발가벗었고 헐벗은 채로 있다. 깔끔하긴 하지만 여하튼 발가벗었다. 그리고 헐벗었다. 얼굴에는 가난이 깔려 있다. 흔히 어떤 자세를 취하고 무슨 내용을 담아 그 가난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만 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 마치 폭력을 저지르도록 우리를 끌어들이는 듯하다. 동시에 얼굴은 우리의 살인을 금지한다……. 1)




우리의 의식이나 사유로 포섭될 수 없는, 즉 파악될 수 없는 타자의 얼굴을 가시화하는 데 있어서 작가는 꽤 영민한 전략을 구사한다. 타인의 구체적인 얼굴을 묘사하는 대신 작가 자신의 얼굴을 투영한 것이다. 그녀가 빚어낸 얼굴들은 어떤 구체적이고 특정한 인물의 개성 있는 용모를 재현한 것이 아니다. 아니 재현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 세상의 폭력 앞에서 나약하게 스러져 간 수많은 타인들의 얼굴 위에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덧씌웠다. 일종의 자소상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고 더듬어 개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 얼굴들은 차라리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의 추악한 현실 속에서, 폭력과 억압을 견디다 스러져 간 수많은 타자들에 대한 연민이자 애도다. 그 얼굴의 표피는 바짝 말라 버린 논바닥마냥, 혹은 생명을 읽어가는 고목의 터진 나뭇결마냥 깊숙이 갈라지고 부서지고 떨어져 간다. 눈이 시릴 만큼의 차가움과 어둠, 무거움이 엄습해 온다.



그러니까 나는 쟁반같이 동그란 눈을 하고

낮에는 선 채로 잠이 들고 밤을 기다리는 존재인 것이다.

마치 빛의 알맹이들이 퍼져 나가듯 입과 입 사이에서 말이 번지기 전에

어둠처럼 미리 사라지고,

사람들의 눈길을 살펴 혹여 꽁무니가 보일까

두려워 떨고 숨어 있는 겁에 질린 유령과도 같이……


– 작가 노트 중에서


                                                                                 〈나의 사슴〉, 35.5×48×39㎝, Ceramics, 2013



타자에 대한 작가의 헌사는 단순히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범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집 사슴〉과 〈사슴과 나〉와 같은 작업은 사슴과 관련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경험이란 바로 로드킬이었다. 인간의 이기적인 문명의 그늘에서 참혹하게 죽어 가는 사슴에게 눈을 감겨 주거나 또다시 간절하게 생명을 부여해 상상적 형상들을 빚어내기도 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역사 속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수시로 침범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도록 인간이 폭력의 대상으로 삼아 온 타자는 바로 자연이었다. 절대적으로 인간의 이성 영역을 초월한 것이기에 결코 인간의 감각으로도 사유로도 종합해 낼 수 없는 무한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 마땅한 자연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맞닿은 경계 지점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다. 기실 자연의 불가항력 앞에 인간은 자신들이 느낀 무력감을 외면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보존 본능이 발휘된 것이었을 터. 그러나 결국 그 자기 보존 본능이 이 모든 폭력적 사태의 원흉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작가가 빚어낸 작업들은 이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타자의 무한성을 마주한 우리에게 엄습해 온 무력감과 공포가 결코 극복하거나 외면해야 할 대상이 아님을 역설한다. 타자의 절대성과 우리의 주체성의 공존은 오로지 타자를 절대성의 영역에 그대로 남겨 둘 때 비로소 가능하다. 타자와 나가 구분되기 이전의, 즉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현존에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작가가 빚어낸 얼굴들은 그러한 의지를 되새기는 작업의 일환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린 서로 없는 거예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럼, 너는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해?

물거품.

마지막 순간의 물거품.


– 작가 노트 중 ‘Final Fantasy’에서



그녀가 최근 돌연 불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작가가 갑자기 종교에 귀의했나 싶기도 하겠지만, 사실 사연은 이러하다. 꿈에서 보았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형상들을 주요 모티프로 삼을 만큼, 작가는 꿈을 자주 그리고 선명하게 꾸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끔찍한 악몽을 많이 꾸었더랬다. 이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작가에게 부처를 만들라고 권했다. 무서운 꿈을 꾸지 않기 위해 무서운 꿈을 이겨 낼 더 무서운 부처를 만들라는 그 이야기에 처음에는 그저 피식 웃고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서 부처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녀는 꿈속에서 그 부처의 발아래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2)  그 기억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맴돌았고 몇 년을 망설이다 결국 지난해부터 불두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로 그녀의 꿈자리가 다소나마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불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다른 얼굴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작가의 얼굴이 스며 있다. 작가는 문득 깨달았던 게다. 부처가 곧 나요, 내가 곧 부처임을.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차원에 침잠한, 존재의 바닥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처음의 공포와 두려움은 점차 옅어지게 되었다. 타자의 무한한 영역을 마주한 순간 공포와 두려움을 걷어내고 순수한 열린 마음과 말 걸기를 확장해 나가는 그녀의 작업 행보에 그렇게 또 다른 감성적 동력이 더해졌다. 앞으로 작가의 가마에서 솟아나오게 될 수많은 얼굴들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_김나리(독립기획, 미술비평)




1) 에마뉘엘 레비나스, 양명수 역, 『윤리와 무한』, 다산글방, 2000, 110쪽.

2) 출처: 김나리 작가의 작업 노트 http://kimnari.net/22111375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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