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비인간의 시대, 인간의 초상

양평_안창홍 작가의 작업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채 미술을 ‘독학’할 만큼 자기 확신이 대단하다. 1981년 첫 개인전을 필두로 지금까지 30여 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주로 구상 회화에 집중하지만 형식이나 매체 면에서도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사비나미술관, 금호미술관 등 다양한 국공립 및 사립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안창홍 작가의 작업실은 양평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부산 생활을 접고 1989년 서울에 옮겨 가서 8개월 정도 머물다 곧바로 이곳에 터 잡게 되었다고 하니, 그가 양평 사람이 된 지도 벌써 20년이 훨씬 넘은 셈이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다녔어. 그러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오지였어. 허허.”라는 그의 이야기만 들어 보아도, 인간 속세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인간사를 관조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숲을 보려면 숲을 떠나야 한다고 했던가. 인간사를 보려고 그는 인간 세상을 잠시 내려놓고 이곳 양평 골짜기로 들어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사를 겪어 보지도 않고 인간사에 대한 감성을 운운한다고 치부한다면 곤란하다. 양평에 정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가 기억하는 한 그가 붓을 잡던 그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화가 안창홍은 학교 대신 공사판, 수산 시장 등을 전전하며 실제로 치열한 삶을 살았고, 그 현장을, 그 생생한 인간사의 내음을 가슴에 품고 양평으로 들어온 셈이니 말이다.


 

안창홍 작가의 작업실 외부 전경.



〈뜰(at the garden) 21〉, 136×346㎝, Oil on Canvas, 2014


말갛게 정돈된 잔디가 매력적인 앞뜰에는 쾌적한 풀 내음이 가득하고 뜰 한편엔 작가가 직접 가꾸는 작은 꽃밭이 있다. 몇 가지 꽃들이 가지런히 심어진 그곳에는 당연히 그가 꾸준히 화폭에 옮기곤 하는 맨드라미도 눈에 띈다. 꽃밭에 맨드라미는 비현실적이리만치 고결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기실 그의 화폭 속에서 보았던 거칠고 억센 질감의 맨드라미와는 사뭇 다른 자태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이상인가? 지금 눈앞의 아름다운 맨드라미가 현실일까? 아니면 그의 화폭 속에서 세상 풍파를 견뎌 내며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억척스러운 맨드라미가 현실일까? 땅위에 발 딛고 선 내 눈앞에 나타난 두 맨드라미가 드러낸 간극은 지극히 ‘숭고’했다.



                               〈가족사진〉, 115×76㎝, Oil on Paper, 1982


수사학적으로 ‘숭고’라 함은 고매하고 고결한 것을 표현하지만, 미학적 차원에서 숭고 개념은 다소 다른 결을 지닌다. 근대부터 오늘날 포스트 모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주로 감각적 표상의 차원을 넘어선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해 왔다. 가파른 절벽, 포효하는 대양, 광대한 황무지와 같이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 현상들에 대해 칸트는 “본디 숭고함은 그 어떤 감각적 형식 속에도 포함되어 있을 수 없다.”1) 고 단언한다. 이때 숭고는 그 압도적인 감관 대상들이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 상태에 있음을 자각했을 때 주체에게 엄습하는 불쾌 혹은 공포 혹은 고통의 감정이 쾌의 감정으로 전환되어 가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불쾌에서 비롯된 쾌라는 이 역설적인 감정의 흐름을 숭고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리오타르는 이 모든 숭고의 계기가 ‘박탈’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유했으나 기존에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형식으로도 그 사유를 담아 제시할 수 없을 때, 주체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는데, 리오타르는 이를 박탈의 상태라 일컫는다. “꽃이란 무릇 부드럽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우리의 통념으로는 도저히 담아내기 힘든 안창홍의 화폭 속의 맨드라미들은 리오타르가 말한 ‘박탈’의 상태로 우리를 몰아간다. 아름다운 꽃이라는 이념의 반대편에서 마치 동물의 붉은 살점이 뜯겨 나가듯 참혹하게 피 흘리며 쓰러지면서도 치열하게 생존하려 발버둥치는 맨드라미가 어쩐지 처연하다. 총체성의 완결함이라는 핑크빛 미래를 약속했던 인간의 통념이 무용지물이 된 순간, 비결정적 상태에 덩그러니 놓인 우리가 겪는 충격과 공포, 즉 숭고의 계기로서의 ‘박탈의 상태’가 지속되면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는 보다 더 ‘인간다워질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다. 자본주의의 총체성이 약속했던 규정적 사유의 절대성, 그리고 결정된 미래의 단단함이 무장 해제된 덕분에 그 속에서 기계적으로 존속해 온 비인간은 이제 해체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듯 안창홍의 맨드라미는 아름다운 꽃이라는 이상과 대비되는 지점에서 박탈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세상사에 만연한 비인간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우리를 숭고의 상태로 이끌어 줄 박탈의 계기는 맨드라미뿐만 아니라 안창홍 작가의 작품 전반에서 잔혹함과 불편함이라는 감정으로서 지속되어 왔다. 작업실을 찾은 한 꼬마 손님이 작업실에 놓인 작품들을 훑어보다, 무심코 한 마디를 내뱉는다. “어휴, 동심(童心) 파괴자!”라고. 그 아이가 말한 동심을 파괴한 주범은 작가 안창홍이었을까? 사실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비인간적 사태들이야말로 오래전부터 우리의 동심을 말살시키는 주범이 아닐까. 아프가니스탄 공습으로 인한 무차별적인 어린이 학살, 툭하면 들려오는 여객기 실종 사건, 이라크전과 시리아 내전 등 각종 국제 분쟁, 그리고 가장 가깝게는 세월호 침몰 사건.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처럼 뜬눈으로 침몰하는 세월호를 바라보아야 했던 우리는 어느새 눈먼 자들이 되어 버렸다.”는 작가의 한 마디는 우리 모두가, 심지어 작가 자신도 동심을 박탈당한 피해자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먼저 그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몰두했던 〈가족사진〉 시리즈는 빛바랜 흑백 가족사진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모든 인물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사실 모두 두 눈을 잃은 채 종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유령처럼 화면 속에 등장한다. 이렇듯 잔혹하게 신체 일부를 훼손당한 모습은 극단적인 인간관계와 그 공허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비극적인 처지를 은유한다. 가족사진은 더 이상 가족의 단란한 분위기나 이상적인 평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 한 폭의 화면은 속세의 풍랑이 일상을 헤집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쓰라린 상처와 고단한 시대를 견뎌온 불행한 개개인의 슬픈 초상이다.



〈위험한 놀이〉, 79.5×109.5㎝, Pastel and Color Pencil on Paper, 1984


 

좌) 〈가면〉, 155×110×50㎝, 합성수지 위에 아크릴릭, 2016 (이미지 조현화랑 제공)

우) 〈눈먼 자들〉, 213×117×110㎝, 합성수지 위에 아크릴릭, 2016 (이미지 조현화랑 제공)


특히 여기에서 등장했던 ‘가면’이라는 모티프는 아들이 전쟁놀이에 썼던 가면에서 착안한 것으로서, 80년대 중반 전쟁을 소재로 작업한 〈위험한 놀이〉에도 연속적으로 등장한 바 있다. 그리고 최근 안창홍 작가의 개인전을 통해 선보인 오브제 연작 〈눈먼 자들〉과 〈가면〉에서 이는 보다 확장된 형태로 전면적으로 등장했다. 얼굴의 형상임을 어렴풋이 짐작케 하는 윤곽은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모든 소통과 생존의 기능을 거세당한 마네킹과 대형 가면이 등장한 것이다. 때로는 감추기도, 때로는 그 감춤이 결국 모든 걸 드러내 버리기도 하는 가면의 아이러니한 성격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닮아 있다. 치열한 도시에서의 삶에서 마치 혈관처럼 아로 새겨지는 그 인위적인 빛의 선들은 때로는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바코드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이 얼굴을 비출 때의 감각적 순간들처럼 가면 위에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곳에는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만 남았다.



〈아리랑 1〉, 249.1×361.6㎝, Oil, Drawing Ink, Mixed Media on Canvas, 2012



                    〈아리랑 2〉, 122×84.3㎝, Oil, Drawing Ink, Acrylic on Canvas, 2012


2012년에 그가 집중적으로 작업했던 〈아리랑〉 연작에서는 그의 초기작인 〈가족사진> 연작에서의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형식적 실험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그는 <가족사진>이나 <위험한 놀이>에서 선보인 공포감이나 불편함을 선사하는 대신 ‘침묵’을 선사했다. 그는 골동상이나 인터넷 경매를 통해 수집한 50여 년 이상 된 사진들을 재해석했다. 졸업식이나 결혼식, 입학식 등과 같은 가족사진이나 소풍 가서 찍은 단체 사진 등이 눈에 띈다. 이 사진들은 찢어지거나 구겨지기도 하고, 빛바래고 그을리거나 혈흔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기도 한데, 작가는 사진의 이 처량한 외피까지 화폭에 옮겼다. 이는 단순히 사회적 약자로 살아야 했던 ‘보통 사람’의 지난 세월에 대한 연민과 위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이 시대의 야만과 폭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불행한 미래를 향하고 있는 오늘날 이 땅에 발 딛고 선 우리의 자화상이다.



참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충분히 침묵하도록 만들라. 2)



그런데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3)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 무표정에 수반된 이들의 침묵은 그 어떤 증언보다 강력하게 비인간의 시대를 증언한다. 역사책을 가득 채운 건 권력자들의 역사였다. 그 바깥에서 희생된 ‘보통 사람들’의 진짜 역사는 외면당했다. 그 말할 수 없는 역사를 가장 뚜렷하게 증언하는 침묵의 힘을 안창홍 작가는 간파하고 있었던 듯하다. 실제로 그는 “인물들이 눈을 감고 있으면 관객들이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4) 의도적인 소통을 위한 도구가 전혀 꾸려지지 않은 순간에도 ‘저 너머에 자신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가슴 아픈 진실’에 대해 우리는 모두 공감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묻어난다. 그리하여 실재를 증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충격과 공포의 순간에, 침묵은 그 현시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시할 수 있는 유일한 증언이 된다. 지금 여기를 운운하는 한 마디 말은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침묵은 지금 여기에 만연한 부조리한 실재를 유일하게 증언해 주기에 지극히 숭고하다.



                                                                        〈베드 카우치 9〉, 162×112㎝, Acrylic on Canvas, 2009


그의 다채로운 작업 스펙트럼을 훑어보면, 매체나 형식에 대한 그의 도전 정신이 범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다. 때로는 새로운 매체나 형식을 넘나드는 그의 에너지가 가히 놀라울 정도다. 2009년 전후로 작가가 선보인 〈베드 카우치〉연작을 포함한 누드 인물화 작업은 앞서 소개한 작업들과는 전혀 상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체 혹은 반라로 카우치에 앉거나 작가 앞에 선 인물들은 더 이상 두 눈을 감지 않았다. 두 눈을 분명히 뜨고서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퇴폐적인 에로티시즘과 폭력성을 암시하는 개인의 외양을 통해 현실을 묘사하는 단순한 소통의 기호로 인식되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지극히 사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인물들은 그들의 개인사 너머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진실을 암시한다. 작가 스스로도 고백하듯, 국내외 정치사에 대한 긴밀한 관심이 화폭에 스며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정치사라는 거대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정치사의 뒤안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개인들의 비극적인 삶과 허무함에 대한 작가의 뜨거운 감성을 고백한 것이다. “무릇 예술가라면 내면에 아주 작은 불씨마냥 여전히 생동하는 작은 인간적 흔적들마저도 발견하고 기록해야 한다.”는 작가의 단단한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글_김나리(독립기획, 미술비평)




1) 임마누엘 칸트, 김상현 옮김, 『판단력 비판』, 책세상, 2005, 83쪽.

2) Richard Foreman, Plays and Manifestos,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6, p. 77.

3) 물론 눈을 감은 인물이라는 모티프는 이미 작가의 그 이전 작업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2004년 부산비엔날레에서 선보인 <49인의 명상>은 사진관에서 수집한 증명사진 49장에 붓질을 덧대어 완성되었다. 여기서도 이미 인물들은 눈을 감은 모습으로 등장하여, 개별성을 잃은 그저 그런 익명의 존재자가 되어 침묵하고 있었다.

4)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74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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