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 유형문화재 - 지정문화재




남한산성행궁 (南漢山城行宮) - 국가지정


남한산성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사적 제57호)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중요한 유적인 남한산성행궁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자 한다



수어장대 (守禦將臺) - 도지정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조선(朝鮮) 인조(仁祖) 2년(1624)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4장대(四將臺)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청량산 정산(해발 482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楊州), 양평(楊平), 용인(龍仁), 고양(高陽) 및 서울, 인천(仁川)까지도 조망(眺望)할 수 있다.


당초에는 단층누각(單層樓閣)으로 축조하고 서장대(西將臺)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를 맡았던 수어청(守禦廳)(전(前), 좌(左), 우(右), 중(中), 후(後)의 5관(官)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右營將)이 진(陳)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인조(仁祖)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淸太宗)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英祖) 27년(1751)에는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왕명(王命)으로 서장대(西將臺)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扁額)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겪은 시련과 인조(仁祖)의 아들인 효종(孝宗)이 볼모로 심양(瀋陽)(현 봉천(奉天))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淸國)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후 영조(英祖), 정조(正祖)가 효종(孝宗)의 능소(陵所)인 여주(驪州) 영릉(寧陵)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恥辱史)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현 건물은 헌종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개건하였는데 중층(重層)의 누각건물(樓閣建物)로써 그 형태와 구성이 우리나라 전통목조건축물 중 특이한 예에 속한다. 지붕과 내부를 모두 이층으로 꾸몄으며 하층의 내진고주(內疹高柱)가 상층에서는 변주(邊柱)가 되는 평면구성방식을 택하였다.


기단(基壇)은 장대석 외벌대이며 기단바닥과 건물내부의 외진(外陣)에는 전돌을 깔았다. 내진부분은 외진보다 한단 높게 하여 장마루를 구성하였으며, 이층바닥도 역시 장마루로 되어 있다. 초석(礎石)은, 1층 변주들은 팔모뿔의 머리를 자른 형태의 장초석이고 내진고주들은 원형평면의 석재 상부를 호(弧)를 그리며 가공하여 상부에 기둥이 앉힐 자리를 평탄하게 다듬었다. 기둥은 모두 원주이며 민흘림으로 되어 있다. 주칸(柱間)은 정면어칸이 10척(尺), 협칸은 8척(尺), 툇간은 6척(尺)으로 잡았고 측면은 가운데 두칸은 9척(尺)으로, 툇칸은 6척(尺)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공포는 익공계인데 일층은 초익공으로 이층은 이익공으로 되어 있다. 쇠서는 모두 수서이다.


이층에는 화반과 운공으로 사용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 고주(高柱)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동자주 세운 후 종량을 걸었다. 종량위에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걸었다. 측면 중앙고주에서는 대들보 위로 휘어 오른 층량을 걸었고, 일층변주에서는 내진고주 몸에 퇴량을 걸었다. 처마는 상,하층 모두 사면을 겹처마로 꾸몄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합각벽은 전벽돌 쌓기로 되어 있다. 용마루와 합각마루 그리고 하층 추녀마루에는 용두(龍頭)를 설치하였고 상,하층의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지붕 마루는 모두 양성바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천장(天障)은 하층내진 부분은 상층마루 하부가 천장이 되고 외진은 연등천장이다.


상층에서는 외기에 대량사이에만 우물반자를 구성하고 나머지 부분은 연등천장이다. 창호(窓戶)는 상층에만 구성되어 있는데 칸마다 두짝 판문을 달았다. 상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하층 내진 북동쪽 칸에 목재로 설치되어 있다. 단청(丹靑)은 모로단청이다.



숭렬전 (崇烈殿) - 도지정


조선 인조 16년(1638)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고 있다. 뒷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죽은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성내 로터리에서 산책로를 따라 수어장대(守禦將臺)로 올라가는 도중에 위치한다. 사당(본전)과 부속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본전 아래쪽 동측에 사당(부전)이 1동 더 부설되어 있다. 그 맞은편에 전사청이 있고 중앙의 협문을 지나 아래쪽에 강당 건물이 있으며 맨 앞에 솟을삼문이 대문역할을 한다. 남저북고(南低北高)의 지형으로서 외국은 전면쪽 솟을삼문 양옆쪽을 제외하곤 대부분 낮은 막돌담장이 층단지어 둘러쳐져 있다. 본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신위를 안치한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이다. 전,후면 모두 겹처마인데 공포는 초익공만 있는 익공계 양식이며 전후면 익공의 형태가 서로 약간 다르다. 굴도리가 사용된 1고주 5량가 가구구조로서 종보의 상부 중앙에는 파련대공을 세워 치장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전퇴 및 기단바닥에 방전(方塼)을 깔았는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양측면에만 막돌화방벽을 설치하였고 후면에는 화방벽이 현재는 없다. 원래는 있어야 하는 것이 통례임에 비추어 볼 때 후에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본전(本殿) 바로 아래쪽 2동의 부속시설 중 동측의 건물은 산성 축성당시 총책임자였던 수어사 이서의 신위를 모신 신당으로서 부전(副殿)에 해당된다. 본전과 같이 개방된 전퇴(前褪)를 둔 사당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홑처마이고 풍판이 없이 박공만 달은 맞배지붕으로서 장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형태이고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본전과 같은 형식으로 상면이 둥글게 가공된 주춧돌 위에 기동만 민흘림 원기둥이 사용되었고 내부 바닥에만 포방전이 깔려 있다. 익공이 없는 공포구조이다. 꾸밈이 없이 단아하고 소박한 느낌이 든다. 굴도리가 사용되었으며 1고주 5량가 가구구조이다. 문짝은 전면 중앙칸만 4분합문이고 양협칸은 2분합문이 설치되었으며 모두 궁판이 된다.


양측면과 후면에는 막돌 화방벽이 둘러쳐져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연등천장이고 석간주가칠과 뇌록가칠로 마감되어 있다. 부전은 맞은편(서쪽)에 대칭으로 세워진 건물은 전사청(典祀廳)으로서 향제를 지낼 때 의례 및 제사준비를 위한 시설물로서 구조 및 양식이 간략화되어 특별한 치장요소가 없는 집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형태로서 내부바닥 현재 온돌방이 없이 강회다짐으로 처리되어 있고 전퇴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이 건물은 1고주 4량가의 가구구조로서 잡도리가 사용되었다. 포부재가 없는 모포집이고 개방된 전퇴를 두었으며 홑처마 맞배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전면쪽 지붕 종단길이가 후면쪽보다 긴 비대칭 맞배지붕이다. 풍판은 달지 않았고 박공만 설치하였는데 목기연은 생략되어 없다. 정면 3칸, 모두 2분합문이나 궁판이 없는 세 살문 형식이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세장한 각기둥을 세웠으며 양측면과 후면에는 역시 막돌화방벽을 설치하였다.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형식으로 양퇴간에 온돌방을 배치하고 중앙 3칸에는 마루를 깔은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부 삼문과의 거리는 그리 넓지 않으나 건물간의 고저차는 많은 편이다.



청량당 (淸凉堂) - 도지정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이회(李晦)는 조선(朝鮮) 인조(仁祖) 2년(1624)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아 하였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무참히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서장대(西將臺) 옆에 사당(祠堂)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


본당(本堂)의 전면에는 이회(李晦)의 초상화(肖像畵)가 있고 좌,우편에는 벽암대사(碧岩大師)와 이회(李晦) 처첩(妻妾)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25사변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후 새로 만든 것이다. 청량당은 정면3칸, 측면 2칸이다. 주칸(柱間)은 정면 양협칸과 측면 두칸은 같이 잡았고, 정면어칸만은 반자정도 넓게 잡았다.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이고 기단바닥은 흙바닥이다. 정면초석은 화강석 방형초석이지만 상면을 평활하게 다듬었을 뿐이고 측면은 배면의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이다.


기둥은 각주이고 내부는 전칸(全間)이 우물마루이다. 민도리집이지만 건물내부에 주두와 소로를 사용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인데 정,배면 평주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사분변작한 위치에 동자주 없이 주두만을 놓고 종량을 걸었다. 종량 위에는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었다. 도리는 모두 굴도리이다. 측면 중앙기둥 위에서는 대들보 위로 층량을 걸었다. 처마는 사면 모두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합각벽은 전벽돌쌓기로 되어 있다. 창호(窓戶)는 정면어칸에만 출입문을 설치하고 양협칸에는 창문을 설치하였다.


출입문은 궁판달린 네짝 띠살문이며, 창은 이중창인데 외부는 띠살창이고 내부는 아자창이다. 내부 배면과 측면의 각 칸에는 벽감을 설치하고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벽감외부에는 두짝 띠살문을 달았으며 띠살문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였다. 우측면의 정면쪽 협칸만은 벽감없이 벽면에 초상화를 걸었다.



현절사 (顯節祠) - 도지정


이 사당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3학사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는 곳이다. 나라에서는 청(淸)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갖은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3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肅宗) 14년(1688)에 이곳에 현절사를 지었다. 그 후 숙종 25년 (1699)에 이르러 3학사와 같이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김상헌(金尙憲), 정온(鄭蘊)을 함께 모시고 있다. 현절사는 1688년에 유수 이세백에거 명하여 세워졌으며 1693년 봄에 사액되었다.


사당 본전과 동재, 서재, 협문 2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절사 일곽은 낮은 막돌담장이 층단지어 둘러쳐져 있다. 건물들은 산등성이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동고서저의 지형으로 본전과 부속건물들은 층단을 이루고 있다. 사당지역과 동, 서재 지역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폭이 적은 협문이 2개소 있는데 하나는 사당과 부속건물 지역을 구분하는 담장의 중앙에 위치하며 일각문 형식으로 본전으로 출입시 사용토록 되어 있고 밖의 것은 전면쪽 담장의 중앙에 설치되어 이곳으로 경내에 들어서게 된다. 전면쪽은 지형의 경사 때문에 높은 석축들과 계단들이 일정간격을 두고 단을 지어 설치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형태로서 홑처마 맞배지붕 형식인데 풍판을 달았다. 전면쪽은 개방된 전퇴를 두었고 출목은 없이 연화가 초각된 앙서형의 이익공과 주심첨차, 화반을 갖춘 조선후기의 익공계 양식의 공포구조인데 후면쪽은 초익공만 둔 모습이며 퇴량 보머리의 형태도 닭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후면쪽도 대량의 보머리에 붙여 이 닭머리 모양의 초각이 돌출되어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과 주축돌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열만 원기둥이고 나머지 기둥은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후면 기단과 접하여 배수로가 둥글게 설치되어 사당지역의 우수를 처리하고 있다.


가구구조는 납도리가 사용된 1고주 5량가 구조이며 내부바닥과 전퇴부분에는 포방전을 깔았으며 양측면과 후면쪽벽에는 막돌화방벽이 설치되어 있다. 출입문은 전면쪽 3칸에만 모두 궁판있는 4분합문을 달았으며 제행시에는 문짝을 접어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어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본전 아래 지역에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와 평면형태, 양식이 서로 엇비슷한데 부분적인 가구구조가 서로 다르다. 동,서재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으로 중앙칸에 대청을 두고 양협칸에 대칭으로 마주보고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모두 온돌방 앞에 툇마루를 설치한 모습이다.


동, 서재 모두 자연석 기단과 주춧돌 위에 각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가 사용되었다. 전면쪽에만 툇간을 둔 1고주 4량가 구조로서 홑처마 맞배지붕 형식을 하고 있는데 풍판은 달지 않았다. 그리고 동재와 서재는 종도리가 위치한 위치가 건물별로 서로 틀리므로 지붕의 종단 길이는 전, 후면이 서로 다르다. 서재의 후면 중앙칸만을 제외하곤 동, 서재 모두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막돌 화방벽을 두르고 있다. 동재와 서재의 온돌방 정면에는 모두 2짝의 세살문이 달려 있고 대청쪽으로도 1짝의 세살문이 달려 있는데 전면쪽에는 모두 머름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서재의 후면 중앙칸에는 화방벽을 설치하지 않고 외부로 출입할 수 있는 2짝 세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서로 다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동, 서재 모두 석간주와 뇌록가치로 마감되어 있고 온돌방의 천장은 반자틀이 설치되어 있다. 사당을 비롯하여 모두 기와 끝의 마감이 와구토바르기로 되어 있어 소박한 분위기를 갖는다.



침괘정 (枕戈亭) - 도지정


확실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고 조선(朝鮮) 영조(英祖) 27년(1751) 광주유수(光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하고 침괘정(枕戈亭)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 부근은 옛부터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였다는 설이 전하고 있고, 또 이 건물 우편에는 군기고(軍器庫)가 있어 명(明)나라 사신 부총병(副摠兵) 정룡(程龍)이 총융무고(摠戎武庫)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이 부근에는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비교적 규모가 크며 높이가 높다.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형식이다. 남측의 2칸열에 우물마루를 간 마루방을 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건물 3면에 걸쳐 난간 없는 툇마루를 두르고 그 안쪽에 온돌방이 구획지어 길다랗게 축조된 평면형태이다. 양측면과 전면 퇴각열의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온돌방을 비롯한 그 나머지 부분의 천장은 격자형의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있다.


네모지게 대충 다듬은 자연석 주춧돌 위에 각기둥이 세워졌으며 굴도리를 사용한 전형적인 2고주 7량가의 가구구조를 갖추고 있다. 공포는 주심도리 부분에 출목도리 없이 주심부분에만 이익공을 짜올린 것으로서 주간 사이에 화반과 주심부분에는 첨차를 사용한 조선후기의 익공계 양식이다. 온돌방과 마루방의 외부쪽 각 면에는 궁판이 이는 2짝의 세살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고 온돌방 내부의 칸막이 부분에는 유사시 접어서 들어 올릴 수 있는 4짝의 세 살 분합문이 모두 설치되어 있다.


온돌방은 모두 전면쪽 툇마루 밑을 파고 내려간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어 고멕이 벽쪽에서 불을 때게 되어 있고 후면쪽 화계시설 첫 단 부분에 전벽돌로 축조된 높은 굴뚝이 있다. 비교적 길게 내밀어진 처마는 처마의 안허리곡이 앙곡에 비해 급하게 휘어져 있으며 지붕의 기와 끝은 와당으로 처리되어 있고 양측면 합각벽은 풍판으로 처리하고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깨끗이 채색되어 있다.



무관 (演武館) - 도지정


조선(朝鮮) 인조(仁祖) 2년(1624)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성할 때 건립한 것으로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武術)을 연마하던 곳이며 이곳에서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한양(漢陽)으로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초에는 연무당(演武堂)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肅宗)때에 수어사(守禦使) 김재호(金在好)로 하여금 개수(改修)하게 하고 연병관(練兵館)이라 쓴 편액(扁額)을 내리었다.


정조(正祖) 때에는 이를 수어영(守禦營)이라 개칭하였으나 그 뒤에도 통칭 연병관(練兵館) 또는 연무관(練武館)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규모가 크고 높이가 높은 육중한 건물로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정면쪽은 2단의 기단을 축조한 이중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중기단의 중앙에 화강석 계단을 1개소 놓았다. 건물의 기단은 인근에서 채석한 것으로 보이는 비교적 장척의 화강석으로 큼직큼직하게 다듬어 설치되어 있다.


주초석은 정면과 양측면 주초석을 높이가 높은 장주초석으로 하였는데 팔각으로 모를 접은 형식으로 모양을 내었으며 후면쪽 열만 자연석 주초석이 사용되었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이 있는 굵직한 원기둥이 사용되었다. 건물내부의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전면쪽은 창호를 내지 않고 완전히 트여있어 개방된 모습이고 후면쪽 툇간열도 바깥쪽을 벽체로 막지 않고 마루도 깔지 않아 회랑형식으로 트여져 있다.


가구고조는 모두 굴도리가 사용된 2고주 7량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공포는 주심도리 부분에 초익공을 둔 조선후기 익공계 양식이다. 연무관 건물의 평면형태와 가구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들이 발견된다. 정면이 5칸인데 반하여 후면은 6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면 어칸에 기둥을 1본씩 더 세운 것이다. 따라서 이 기둥열의 건물내부 마루칸 쪽은 대량이 없이 고주주두에 단재의 보머리만 양쪽으로 돌출시켜 놓은 형상이다. 처마는 겹처마로서 비교적 길게 내밀어져 있으며 처마앙곡과 안허리곡이 비교적 세다.


용마루의 양단과 합각마루의 끝부분에는 각각 1개씩의 용두를 놓았으나 추녀마루 끝에는 망와만이 놓여 있다. 그리고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에는 양성바르기를 하였고 건물 네 귀의 사래 끝부분에는 토수(土首)를 끼워 치장하였다. 건물 측면의 합각벽은 박공과 풍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굵은 연목의 몸이 그대로 노출되는 연등천장이고 외기반자쪽만 판재를 대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중앙칸 대량에는 전/후면에 용문을 측면쪽 대량의 한쪽 면에는 봉문이 그려져 있다.



지수당 (池水堂) - 문화재 자료


조선(朝鮮) 현종(顯宗) 13년(1672)에 부윤(府尹) 이세화(李世華)가 세운 건물로서 이 건물의 앞뒤로는 세 개의 연못이 있었으며 당시 고관(高官)들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지금은 연못 하나가 매몰되고 두 개의 연못만이 옛 모습을 남기고 있다. 연못 가운데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빈터만 남아 있다. 지수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형태이며 바닥면적은 43.11㎡(13.04평)으로 홑처와 팔작지붕이다. 가구구조는 굴도리가 사용된 1고주 5량가로서 측면쪽은 층량이 대량 위에 걸쳐져 외기중도리를 받고 있다. 종보 위에는 중앙에 파련대공을 얹어 치장하였으나 주심도리부분의 공포는 아무런 공포재가 없이 보머리만 돌출된 모습니다. 내부 천장은 연목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며 외기반자쪽만 좁은 폭의 우물반자가 설치되어 있다. 측면 지붕의 합각벽은 전벽돌로 막아져 있으며 지붕기와 긑은 와구토바르기로 마감되어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채색되어 있다.



경사 (長慶寺) - 문화재 자료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 약 500m 거리의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내는 널찍한 공간이 있어 승병들의 훈련장으로 이용되었던 장소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5호로 지정된 장경사는 대웅전과 종무소, 산신각, 종각, 요사체 2동, 탑 등으로 구성되어 사찰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9개의 사찰 모두가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적게 참화를 당한 장경사 하나만이 당사의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절 뒤에 철쭉이 많고 노송 숲에서는 송이가 난다. 진남루 남쪽에는 망대가 있으며 올라가 보면 그윽한 경치가 여러 절 중에 으뜸이다.



월사지 (望月寺址) - 도 기념물


장경사 뒤에 있는데 9개의 사출 중 가장 오래 된 고찰로 망월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화엄경 한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지’에서 기록하고 있는 옛 모습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마 이 곳도 일제의 무기, 화약 수거령에 예외적인 사찰이 되지 못하고 그 때의 환란을 피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개원사지 (開元寺址) - 도 기념물


성내의 남쪽에 위치하는 사찰로 관리사무소에서 개원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약 6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현재의 불당은 1971년에 옛날 개원사터에 지은 것이나 1985년부터 이를 허물고 다시 개축하였으며 1986년 말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후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개원사 일주문 안의 우측에 있는 사찰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개원사는 인조 2년에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들을 총지휘했던 본영 사찰로 창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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