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 - 성곽, 성곽시설물




한산성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우리나라 산성축성술(山城築城術)의 전형(典型)을 보여 주고 있다. 남한산성의 지리적인 여건을 보고 『여지도서(黎地圖書)』는 남한산성을 ‘천작지성(天作之城)’이라 하였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拷ㆍ峰)이라고 하였다. 『택리지(擇里志)』에서도 “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이 처음 왔을 때 병기(兵器)라고는 날도 대지 못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조(仁祖)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다만 양식이 적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8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은 내부가 넓고 평탄하며, 80여 군데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여 비축된 군량미(軍糧米)만 충분하다면 수만 명의 병력도 수용이 가능할 정도이다. 구조적으로도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성곽(城郭)이 갖추어야 할 구비시설(具備施設)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본성(本城)외에 봉암성(峰巖城), 한봉성(汗峯城) 등 2개의 외성(外城)을 갖추고 있으며, 남쪽에는 두 개의 돈대(墩臺)가 있다. 원성에는 5개의 옹성(甕城)이 있으며, 20여 개의 포루(砲壘)를 설치하여 화포(火砲)공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한 성벽(城壁)에는 4대문(四大門) 외에 16개의 암문(暗門)이 있으며, 성벽 위에는 1,940여 개의 타로 구성된 여장(女墻)이 구비되고, 각 타에는 원총안(遠銃眼)과 근총안(近銃眼)이 설치되어 있다. 성벽 안쪽에는 125개에 달하는 군포가 구축되어 있었다.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 둔 매염처와 숯을 묻어 둔 매탄처(煤炭處)가 있었고, 성 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충분한 식량(食糧)과 군수물자(軍需物資)가 보관되어 있었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성돌을 활용하여 구축되었고, 외성은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構築)됨으로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축성기법(築城技法)을 특징적(特徵的)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성축성기법의 교과서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遺蹟)이다. 최근에는 각종 역사 드라마가 산성을 배경으로 촬영되고 있으며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觀光)의 명소(名所)이기도 하다.


『남한지(南漢志)』에서는 남한산성의 규모를 본성(本城) 성벽의 안 둘레는 6,290보(步)로 17리(里) 반(半)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군데의 군포, 4군데의 장대(將臺)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둘레를 환산하면, 한 자(尺)의 길이가 20.81cm인 주척(周尺)으로 안 둘레는 7,854m이고, 바깥둘레는 9,108m 정도이다. 성벽의 둘레를 측량(測量)하는 방법(方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성벽 외곽 기단부(基壇部)를 기준으로 하는 것과 여장 안쪽 기저부(基底部)를 중심으로 하는 것, 여장의 옥개중심선(屋蓋中心線)을 기준(基準)으로 하는 것인데 그 중 가장 보편적(普遍的)이고 무난한 기준이 여장의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다.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한 결과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원성의 규모(規模)는 둘레가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面積)은 212만 6,637㎡이다. 부속시설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는 12,356km에 달한다.



원성과 외성


남한산성에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 등 외성을 제외한 중심성을 원성(元城)이라고 한다. 원성의 범위는 대체로 신라의 주장성과 인조 대에 수축한 남한산성이 상호 겹치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축조과정(築造過程)을 보면 남문과 북장대(北將臺)를 기준으로, 동남성(東南城)과 서북성(西北城)으로 구분하여, 동남성은 축성의 총책임자(總責任者)인 이서(李曙)의 휘하 장수인 이회가 맡았으며, 서북성은 도총섭(都摠攝) 벽암대사(碧巖大師)의 책임 하에 승병(僧兵)들이 맡아서 쌓았다.


본성은 청량산을 정점으로 하여 남북으로 뻗은 줄기의 여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나간 자연지형(自然地形)을 이용하여 주로 능선(稜線)을 따라가며 축조하였다. 해발 497m인 청량산의 외곽을 감싸 안으며 해발 484m 지점의 등고선을 따라가며 돌아나가다가 북쪽으로 거의 일직선상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가 해발 450m 지점에서 서문을 이룬다. 이곳에서 다시 56m 정도 올라가 능선을 따라 돌아가며 24.6m 정도 돌출하여 각루의 형태를 이루고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지는데 남북의 주능선(主稜線)에서 갈라지는 지점에 연주봉옹성(連珠峰甕城)이 축조되어 있다. 체성 벽에는 연주봉옹성으로 나가는 암문이 조성되어 있다.


북장대지(北將臺址)를 지나 경사가 완만한 사면을 따라 약간 만곡하는 해발 367m 지점에 북문이 있다. 북문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상사창동(上司倉洞)에 이르게 되는데 이 길은 수운(水運)을 통하여 운반해 온 세미(稅米)를 등짐으로 산성까지 나르던 주된 통로(通路)였다. 북문 동편은 동쪽으로 뻗어나가며 북문의 옹성과 같은 기능(機能)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문에서 지형에 따라 약간의 굴곡(屈曲)을 이루지만, 큰 고저차가 없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동서방향으로 800m 정도 연결된다.


제3암문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해발 502m 지점에 동장대가 있다. 동장대는 능선 정상부의 평탄한 지세를 이용하여 남쪽에 2m 정도의 축대(築臺)를 쌓아 구축하였는데 현재는 누각(樓閣)의 흔적(痕迹)으로 보이는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 원성은 동장대를 정점으로 하여 능선을 따라 다시 남하(南下)하기 시작한다. 동장대에서 남쪽으로 약 238m 거리에 이르면 능선은 완경사 평탄면을 이루는데 이곳에는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음직하다. 성벽에는 평탄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밖으로 배출시킬 수 있도록 수구(水口)를 설치하였다.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을 지난 성벽은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약간 만입(灣入)하며 경사면을 따라 내려와 능선의 말단부(末端部)에 이르면 능선을 따라 굴곡을 이루며 돌아가고, 장경사가 있는 곳을 향하여 크게 안쪽으로 굴곡이 진다. 장경사(長慶寺)가 있는 곳은 두 능선 사이에 구축된 곡저부로 계곡에서 흘러내린 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를 배출시키기 위해 성벽에 비교적 큰 수구를 설치하였다.


내만한 성벽은 다시 남쪽 능선의 말단부를 따라 돌아가는데 이 지점에 제1암문이 조성되어 있고, 암문에 인접하여 두 개의 수구가 구축되어 있다. 이 암문에서 장경사신지옹성에 이르는 구간이 1999년에 시행(施行)한 성벽보수구간에 해당한다. 제1암문을 지난 성벽은 계곡부를 따라 안쪽으로 곡선을 그리다가 능선지점에서 다시 곡선을 이루는데 이 지점의 돌출부위에 2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이 포루는 다른 곳과 달리 포신이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뚜껑돌이 덮인 포루의 길이가 짧은데 그것은 아마도 두 개의 포루를 덮은 누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포루의 좌우측에는 여장에 설치된 총안 외에 경사면에 근접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체성 벽의 상단에 구축한 총안이 있다.


한편 청량산에서 능선을 따라 남향하는 성벽은 해발 456.9m인 천주봉(天柱峰)에 이르면 90°로 꺾여서 동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동남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631m 정도 내려와 해발 360m 지점에 남문이 구축되어 있다. 이 구간은 산성 내에서 가장 짧은 거리에서 가장 큰 해발고도차를 갖는 구간이어서 남문에서 천주봉까지 올라가는 길이 매우 가파르다. 특히 성벽의 외사면의 경사가 급해 성벽이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으며, 암문이나 치, 옹성 등 다른 시설은 없다. 남문을 지난 성벽이 능선을 따라 남향하여 약 263m 정도 올라가면 해발 426m의 능선 정상부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산성은 90°의 각을 이루며 동향하여 능선의 끝부분까지 약 1km 구간에 걸쳐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되며, 동-서로 뻗은 성벽은 능선 말단부에서 북쪽으로 내려가 동문으로 연결된다.


동문에 접한 부분에 제11암문이 설치되어 있고, 산성 내로 모여든 대부분의 물을 성 밖으로 배출시키는 수구문이 설치되어 있다. 동문이 있는 곳은 해발 297m 내외로 성 내에서 가장 낮은 지형이다. 이곳에는 수구문이 설치되어 있어 성 내의 모든 오폐수가 성 밖으로 배출되는 기능을 하였으나 지금은 수구문 대신 동문 쪽으로 유로를 변경시키고 동문교를 만들어 차량출입이 가능토록 하였다. 이곳은 성 내에서 체성이 단절된 유일한 곳이며, 단절된 성벽의 길이는 17.5m 정도이다.




옹성(甕城)은 성문(城門)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二重) 성벽을 말한다.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 했으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三面)에서 입체적(立體的)으로 공격(攻擊)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施設物)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용도(甬道)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지(地誌) 자료에 이것들을 옹성이라고 불렀음을 볼 때, 옹성은 성문뿐만 아니라 체성 벽의 보호(保護)를 위하여 돌출시켜 쌓은 시설을 포괄적(包括的)으로 지칭(指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었다.


남쪽에 가장 많은 옹성이 설치된 것은 북쪽이나 동쪽·서쪽에 비해 남쪽의 경사가 가장 완만하므로 검복리 방면에서 계곡의 완경사면을 따라 올라와 해발 534.7m인 검단산 정상을 확보하거나 계곡에서 화포를 쏠 경우 산성의 방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성과 연결되는 시축지점이 약간 넓게 벌어졌다가 가운데는 잘록하고 끝부분은 다시 넓어져 뭉툭하며 포루 앞부분에 장대가 구축되어 있는 제1남옹성의 둘레는 426m이며, 옹성 내부의 면적은 2,381㎡로서, 제2남옹성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기록에 의하면 이 옹성은 둘레가 344보에 여첩이 109타라 하였다.


제2남옹성과 달리 제1남옹성은 말단부의 내부에 동서 11m, 남-북 17.5m, 높이 3m 정도의 고대(高臺)가 구축되어 있으며, 고대로 인하여 구획된 공간에 3면으로 8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포루는 동쪽에 3개, 서쪽에 2개, 그리고 남쪽에 3개가 설치되어 있다. 제2남옹성은 남한산성에 구축된 5개의 옹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옹성이다. 동서로 길게 뻗은 능선이 해발 447m 지점에서 남쪽으로 완경사를 이루며 뻗어나가고 있는데 2옹성은 이 완경사면을 따라 축성하였다. 제2남옹성의 둘레는 318m이고, 옹성 내부의 면적은 3,583㎡이다. 제2남옹성의 끝부분에는 길이 24m, 너비 21m 정도로 석축을 쌓아 차단벽(遮斷壁)을 설치하고 가운데에는 홍예문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구획(區劃)을 설정한 것은 구획 내부에 설치된 9개의 포루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9개의 포루는 남쪽에 3개, 동쪽에 3개, 서쪽에 3개가 설치되었는데 포루의 모양은 제1남옹성과 비슷하나 좌측 벽에 무기와 화약을 넣어두는 이방(耳房)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땅에 떨어진 무사석 중에는 옹성을 쌓을 때 동원된 니장(泥匠), 야장(冶匠), 석수(石手), 목수(木手)의 이름과 이 공사를 맡았던 사람과 관직명이 새겨진 것이 있다. 무사석에 새겨진 기록에서 ‘무인칠월(戊寅七月)’과 관리책임자인 홍전1606~1665의 이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옹성은 병자호란 이후인 인조 16년1638 원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제3남옹성은 제2남옹성에서 동쪽으로 350m 지점에 있다. 옹성은 해발 440m의 소봉(蘇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옹성의 전체 둘레는 125m이고, 면적은 839㎡여서 남한산성의 5옹성 중 가장 규모가 작다. 이 옹성은 본성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 밖으로 나와야 확인된다. 옹성의 남쪽 끝부분에는 5개의 포루를 설치하였는데 제2남옹성의 경우 포루가 있는 곳을 구획하여 홍예문을 설치하였으나 이 옹성은 석축으로 7단의 계단을 쌓았다. 5개의 포루는 남쪽에 3개, 그리고 동서에 각각 하나씩 설치하였다. 다른 포루와 축조기법은 거의 같으나 포루 끝의 포혈(砲穴)이 방형이 아니라 凸자 모양인 것이 다르다.


포루 내벽의 석축은 2~3단으로 쌓았는데 정교하게 다듬지 않았으며 포루의 천장석은 4개의 장대석을 대강 다듬어서 얹었고 돌과 돌 사이의 빈 공간을 모래와 회와 작은 돌을 섞어서 메웠다.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이란 장경사에서 수어를 담당(擔當)하는 옹성이란 뜻이다. 동쪽 성벽은 해발 501m인 망월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내려온다. 지형상 성의 안쪽은 경사가 완만한 데 비해 성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하고 굴곡이 심해 방어적인 측면에서 크게 어려움이 없는 지역이다. 그러나 동성은 병자호란 이후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청군은 동성 밖의 벌봉에서 성 내부를 들여다보며 작전을 수립하였고, 한봉에는 대포를 설치하였는데 이 화포공격으로 동벽의 여장 대부분이 훼손될 정도로 그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병자호란이 끝나자 동벽에는 한봉성 정상부를 겨냥하는 포루가 설치되고 장경사신지옹성이 신축되었다. 연주봉옹성은 원성에서 해발 466.4m인 연주봉 정상부까지 쌓아 연결한 좁고 긴 성벽으로 전체 길이는 31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865㎡이다. 정신문화연구원 소장의 『남한산성도(南漢山城圖)』에는 연주봉옹성 끝에 포루(砲壘)라고 표기되어 있어 옹성의 끝부분에 포루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근거로 복원정비공사시 포루를 복원하였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는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 수계(水系)가 한눈에 조망되며, 북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말단봉(末端峰)에 있는 이성산성(二聖山城)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관측된다. 산성 쪽으로는 본성 북벽의 넓은 지역과 산성파출소 일대가 잘 바라보인다.



장경사 신지옹성의 둘레는 159m이며, 40개의 여장이 있었다. 옹성 말단에 2개의 포루가 구축되어 포구는 한봉 정상부와 그 인접 봉오리를 향하고 있다. 포루의 좌측벽에는 耳房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보관하는 시설이 있다. 옹성은 병자호란 당시 한봉을 점령 당한데 대한 대비책으로 쌓은 것이다. 2000년 토지박물관에서 발굴조사 한 후 현재는 복원되어 있다.



제2남옹성은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옹성이다. 남쪽에 있는 세 개의 옹성 중 가운데에 위치하며, 가장 많은 포좌를 설치하여 적의 공격시 양쪽으로 공격이 가능하게 하였다. 둘레 318m, 길이 134m, 면적 3,583m²의 규모이다.


제2·3남옹성은 구조형식상 자연 경사면을 이용한 편축성이며, 성벽 내부는 자연석으로 뒤채움한 후 상면을 점질토로 마감한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체성부의 성벽은 전반적으로 구지표면 위에 지대석을 놓고 자연석 또는 일부 가공석을 허튼 쌓기(難層積)방식으로 축조한 반면 포루지역은 풍화암반층까지 파고 내려간 후 지대석을 놓고 보다 대형의 자연석(일부 가공)에 쐐기 돌을 사용하여 허튼 쌓기 하였다. 체성부의 내부는 양단 성벽부를 높인 U자형 구조를 보이고 있으나 포루 내부는 성토법으로 흙을 다진 一 자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여장은 2차례 이상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개축시에는 1∼3단 정도의 기존 여장 지대석을 그대로 놓고 새로 축조되는 여장부는 퇴축하여 축조하였다. 여장부가 높아짐에 따라 성벽 내외부 역시 보축하여 생활면을 높이었다. 현재의 여장부는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조사과정에서 수키와, 암키와 및 귀옥개전과 방전 등이 회와 함께 출토되어 여장 구조의 추정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금번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수구가 3남옹성에서 4개소, 2남옹성에서 1개소이다. 포루내부의 등성계단은 3남옹성에서 2개소, 2남옹성에서 4개소가 조사되었다. 또한 2옹성 포루의 홍예문 하부구조를 확인 하였다. 기타 유구로는 포루상면의 회곽로와 성내부를 오르 내리는 계단시설이 조사 되었다.



이 금석문은 당시 부윤겸수어사 홍전(선조39 1606~현종6 1665)과 별장, 영장, 감역관 등이 목수, 석수, 야장, 이장 등을 동원하여 축성한 내용을 적고 있다. 홍전의 생몰연대로 보아 무인년은 인조16년(1638)으로 생각된다. 원래는 옹성의 끝부분 포루로 나가는 홍예문에 있던 받침돌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무너져내려져 땅바닥에 일부가 묻혀있다. 크기는 가로 115cm, 세로 60cm이며 글자수는 모두 105자로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홍전(洪전, 宣祖39:1606~顯宗6:1665) : 본관 南陽, 字 伯潤, 號 竹巖, 洪友直의 아들. 그는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 오달제, 홍익한 등과 斥和를 주장한 인물로, 廣州 府尹에 발탁되어 그후 강계부사, 의주부윤, 경상도방어사, 우승지, 황해도관찰사, 청주목사, 제주목사, 길주목사, 한성좌윤, 충주목사 그리고 한성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광주목를 광주부로 승격시킨 후 두 번째로 부윤으로 제수되어 병조판서 이시백의 건의에 따라 인조 16년 남한산성의 재수룩의 총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연주봉옹성은 둘레가 315m에 면적은 865㎡이고, 73개의 여장이 있었다. 남한산성도에 옹성 말단에 포루라는 표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옹성에는 포루가 있었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옹성 역시 2000년 토지박물관에서 발굴조사 후 현재는 복원되어 있다.



외성


남한산성의 성곽은 인조대에 쌓은 중심성인 본성과 숙종대에 쌓은 외성으로 구분된다. 남한산성에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 등 외성을 제외한 중심성을 원성(元城)또는 본성이라고 한다. 원성의 범위는 대체로 신라의 주장성과 인조 대에 수축한 남한산성이 상호 겹치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청량산을 정점으로 하여 남북으로 뻗은 줄기의 여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나간 자연지형(自然地形)을 이용하여 축조 주로 능선(稜線)을 따라가며 축조하였다.


숙종 12년(1686년) 3월 광주유수 윤지선이 본성의 보강차원에서 외성인 봉암성 축조를 주장함으로써 수어청 소속 군병을 징발하여 50여일 동안 성역과 1,000석 정도의 재원을 확보하여 신축하게 되었다. 그 결과 둘레 962보, 여첩 294타, 암문 4개, 군포 15개를 신축하였다. 이러한 봉암성 신축 사실을 뒷 받침해 주는 금석문인 蜂巖新城丙寅磨崖碑文이 봉암성 자연석 뒷면에 정사각형의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또한 숙종 19년(1693년)에는 수어사 오시복이 한봉 외성을 신축하였다. 봉암성과 달리 한봉성은 폐곡선을 이루지 않고 용도 형태로 한봉 정상부까지 한줄로 성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한봉성의 둘레는 851보이고 여첩이 227개, 암문이 1개였다. 이후 한봉성은 숙종 31년(1705년) 淸人이 성의 일부를 헐어 버렸으며, 영조 15년(1739년) 수어사 조현명이 개축하여 둘레 895보, 여첩이 272타가 되었다. 또 같은해 수어사 민진후의 건의에 따라 봉암성에 2개의 포루를 설치하였으며 장경사 원성부분에도 포혈을 신축하여 장경사 옹성의 대포와 함께 협공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방어력을 증강 시켰다. 숙종 45년(1719년) 수어사 민진후가 이전에 있었던 성터를 다시 개축하고 둘레 743보, 성첩 238타 규모의 성곽을 설치하고 포루 1개를 구축하였는데 이를 신남성 또는 남격대라 한다.


신남성은 원성에서 남쪽 2.6km지점에 있는 검단산(534m) 정상부에 설치된 성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주둔하면서 포격을 하였던 곳이다. 이후 영조 29년(1753년) 돈대 2개소가 수축 됨으로 원성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외성의 완성이 이루어져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수도권 방어체계가 일단락 되게 되었다.




성문(城門)은 성을 드나드는 주출입구(主出入口)이다. 성문의 숫자나 위치는 성곽의 입지여건(立地與件)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동서남북 사면에 하나씩 4대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이었다. 성문을 많이 둘 경우 출입에 편리한 측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성문의 수비와 방어에 어려움이 있으며, 아무리 큰 성이라도 주요 간선도로로 가는 데는 각 방향에 따른 하나의 출입구만으로도 큰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남한산성처럼 지형여건상 성문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경우에는 암문을 설치하여 출입기능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의 성문은 모두 4개이다. 동문은 산성의 남동쪽에 있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매우 높았던 성문 중의 하나이다. 이 성문의 위치와 형태가 선조(宣祖) 때에 이미 보수하였다고 하는 그 동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조(仁祖) 2년1624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正祖) 3년1779 성곽보수시에 성문도 보수하였다. 이 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이 문을 좌익문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4대문 중 문루에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은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하나뿐이다. 성문의 여장은 타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연결한 평여장(平女墻)이며 총안(銃眼)도 설치되지 않았다. 성 좌측의 경사가 급해 계단으로 처리된 부분의 여장은 가운데에 한 개의 총안이 있는 층단형 여장이며, 우측은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는 성벽과 평행하여 옥개정상부도 사선(斜線)을 이루도록 하였다. 문루는 단층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다른 문에 비해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어 성문은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제11암문으로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 서남쪽 부분은 1973년 남한산성-광지원 간 8m 도로 확장공사로 성벽이 잘려 있고, 동문 남서쪽 60m 지점에는 성 내의 주배수구였던 수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편으로 물길을 우회시켜 배수로(排水路)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서문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初築)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79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서문은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이라 칭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문이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花崗石)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柱礎石)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7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하남시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을 져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들여갔다고 한다.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 문이 있었다는 선조대의 기록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칭하였다. 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으로 설치하였고,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문루는 단층(單層)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八作)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에 치미(?尾)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를 장식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椽燈天障)이며 기둥은 주심포(柱心包)양식의 민흘림기둥이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의 기능은 물자를 운반하고 지원병을 받고 역습을 하는 통로이다. 남한산성에서 현재 남아있는 암문은 모두 16개로 남한산성은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매우 많은 성에 속한다. 암문은 본성에 11개가 있고,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장대(將臺)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將帥)의 지휘소(指揮所)를 말한다. 장대는 성내(城內)의 지형 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으며, 성이 넓어 한 곳의 장대에서 지휘할 수 없는 경우 각 방면에 장대를 마련하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 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성의 장대는 규모가 크지 않은 단층형식이 대부분이나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의 경우처럼 중층 누각 형태의 장대도 있다.


동장대는 남한산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501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망월봉(望月峰)을 이루며 갈라져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다른 줄기는 동북쪽으로 이어져 법화봉을 이루고 있다. 동장대 부근은 여주목사좌부별장가, 그리고 외동장대는 죽산부사후영장가 각각 군사 1,991인, 2,608인을 지휘하여 방어책임을 맡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원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이며, 해발 501m 망월봉 정상에 위치한다. 동장대에는 인조(仁祖) 2년1624 산성수축시 동장대가 설치되고 누각이 함께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750년대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이후의 지도에 보면 장대의 누각(樓閣)이 나타나지 않고 터만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세기 초에 누각이 무너지고 난 이후 다시 누각을 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현재 터만 남아 있으며 동서 21m, 남북 17m에 높이 350cm의 축대를 쌓아 구축한 장대의 면적은 357㎡이다. 이곳에는 전돌(塼乭)과 와편(瓦片)이 산재되어 있으며 지상에는 4개의 초석이 남북방향으로 노출되어 있다.


북장대(北將臺)는 북문에서 서북쪽으로 245m 거리의 해발 405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연주봉쪽에서 내려온 능선이 봉우리를 이룬 곳으로서 정상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고, 석축단이나 담장시설로 보이는 축대가 일부 노출되어 있으나 전체적인 규모나 구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이다. 이곳은 남한산성의 수어청 중 중영장(中營將)인 양주목사(楊洲牧使)의 신지로서 병사 2,608명이 배치되었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 시에 단층의 누각이 함께 지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남대학교소장 『남한지도(南漢志圖)』를 보면 17세기 후반까지도 남아 있던 이 장대는 그 후 18세기 초에 붕괴되어 18세기 중엽의 『해동지도(海東地圖)』이후부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700년대 초에 붕괴된 이후 다시 수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장대지에는 현재 초석만이 남아 있는데 누각의 규모는 동서 880cm, 남북 880cm의 정방형 건물이었으며, 정면은 남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초석은 각 방향으로 6개씩 20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고 동쪽 면에만 남쪽에서 두 번째 초석과 세 번째 초석 사이에 한 개의 초석이 더 놓여 있다. 초석간의 거리는 정면 칸과 측면 칸이 대칭을 이루며, 정방형이 되도록 하였다. 남장대 건물은 규장각(奎章閣 )소장(所藏)의 『광주부도』와 정신문화연구원 소장의 『남한산성도(南漢山城圖)』를 보면 수어장대와 같이 2층 누각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동장대는 망월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나간 능선이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은 해발 514m의 봉암을 이루고 남쪽으로 갈라진 줄기는 해발 410m의 한봉까지 연결된다. 외동장대가 있는 곳은 이처럼 세 개의 능선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정상부는 평탄하고, 해발고도는 492m로, 이곳에서는 동장대와 벌봉일대가 조망되는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넓은 평탄지역에 고대가 구축되어 있고, 곳곳에 축대를 쌓았던 돌들이 흩어져 있다. 이 외동장대는 숙종(肅宗) 12년1686 수어사 윤지선이 수어청 군병을 동원하여 봉암 외성을 축성할 때 함께 구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서 조련 때마다 후영장인 죽산부사(竹山府使)가 군사 2,000명을 데리고 진(陣)을 쳤다. 고지도를 보면 서장대와 남장대의 우에는 누각이 설치된 것으로 나오지만 외동장대의 경우에는 누각에 관한 기록이나 표시가 있는 도면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외동장대는 누각이 없이 대(臺)만 구축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된다.




치는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 할 수 있도록 한 성곽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여장이란 성벽 위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드문 전돌로 축조한 여장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포루는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을 포루라고 하는데 원래 남한산성에는 포루가 없다가 병자호란이 끝난 2년 뒤인 인조 16년(1638)본성을 증개축 하면서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포루는 후대에 개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3남옹성의 포루는 평면상 열쇠 모양을 띠며 동서 양편에 2개의 포좌가 노출되었으나 중앙에 1개의 포좌가 더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포루는 초축 포루를 해체하고 방형으로 개축하였다. 제2남옹성의 초축 포루는 수평 기단면 위에 당초 11개의 포혈을 조성하였으나 이후 개축과정에서 이 포혈을 폐쇄하고 그 위에 성벽을 덧쌓고 포혈은 9개로 줄였다.서단부 조사과정에서 1기의 포좌를 추가 확인하였는바, 이는 서단 출입부와 원성의 8암문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별도의 포루를 조성하지 않고 출입구에 포좌를 조성한 점은 국내에서 그 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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