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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행궁 전경


행궁(行宮)이란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었다.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남한산성행궁의 건립연도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인조실록』등에 나타나는데,『중정남한지』에는 1624년 9월 착공하여 1625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인조실록』에는 1625년 6월 23일에 행궁을 짓도록 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행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한남루(漢南樓)’는 정조 22년(1798) 광주 유수 홍억이 행궁의 대문이 번듯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건립한 2층의 누문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영사 이폴리트 프랑뎅이 촬영한 사진에서 현판․주련․장주초석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복원된 한남루의 장주초석중 정면 4개는 주변에 있던 본래의 부재를 수습하여 재사용한 것이다. 현판과 주련은 서예가 정도준 선생의 글씨를 받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 이규남 선생이 제작한 것이다.

남한산성행궁 외행전

외행전은 내행전과 함께 인조 3년(1625)에 지어진 하궐의 중심건물로, 궁궐의 편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의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면적은 약간 작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외행전에서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행하였다는 기록과 청군이 한봉에서 대포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추어 인조가 내행전으로 거처를 옮겨간 기록이 있다. 평상시에는 광주 유수의 치소로 사용되었으며,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있는 사진을 보면 기둥에 3개의 주련이 남아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산성행궁 발굴조사시 출토된 통일신라 건물지

행궁을 복원 중이던 2003~2004년 6차 발굴조사에서 하궐 외행전 앞마당에서 통일신라시대 유구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2005~2008년 7, 8차 발굴조사에서 무게가 20㎏에 달하는 초대형 통일신라시대 기와와 길이 약 53.8m, 폭 17.5m, 벽체 두께 2m에 달하는 대형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남한산성행궁 발굴조사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조선시대 기와 비교


일장각

순조 29년(1829) 광주 유수 이지연이 세운 관아시설의 건물이다. ‘일장각’은 청량산의 또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전각의 이름으로 한 것이며, 현재 내부에 광주 유수의 집무처로 꾸며 재현소품을 전시중이다.

좌승당

순조 17년(1817) 광주 유수 심상규가 집무용 건물이다. ‘좌승(坐勝)’이란 ‘앉아서도 이긴다’는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좌승당 건립 당시, 건물 지을 터를 마련하기 위해 내행전과 북행각 사이에 있던 담을 헐어 북행각을 옮기고, 뒷담을 넓혀 좌승당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좌승당의 서쪽 벽에는 월문(月門)을 뚫어 한층을 올라가면 누(樓)가 되고, ‘유차산루(有此山樓)’라는 편액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위정

순조 17년(1817) 광주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만든 정자이다. 현재 ‘이위정기’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문(記文)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썼다. 이때 심상규의 나이가 51세, 김정희의 나이 31세였다.

상 : 이위정편액 / 하 : 이위정편액 탁본 / 우 : 이위정기


좌전(우실)

좌전은 행궁 북쪽 담장 밖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사시 종묘의 위패를 옮겨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행궁 건립 당시에는 없었으나 숙종 37년(1711) 부윤 김치룡이 우실과 같이 지었다. 좌전과 우실의 건립은 남한산성행궁이 일반적인 행궁이 아닌,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곳(보장처)이었음을 뜻한다. 좌전이라는 명칭은 건립 당시 별궁, 별전 등이 논의 되었지만 결국 봉안처가 행궁의 좌측에 위치하므로 좌(左)를 붙이되 예의 의미를 지는 묘(廟)를 감추고, 전(殿)을 붙여 사용하게 되었다. 우실은 사직을 모시는 곳으로 숙종 37년(1711)에 좌전과 함께 건립되었다. 사직단을 ‘우실’이라 한 것은 중국 주대(周代) 이후 도성배치법인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른 것으로 궁궐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을 배치하는 예이다.


재덕당

재덕당은 상궐 내행전 뒤편 언덕에 있는 건물로 숙종 14년(1688)에 광주 유수 이세백이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위치상 사당건물로 추정되며, 건물 남쪽에는 ‘반석(磐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재덕당 앞 반석


내행전

내행전은 임금의 침전으로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 건물이다. 중앙 3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양 옆은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되어 있는데 대청을 제외한 3면으로 퇴가 구성되어 있다. 이는 창경궁의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과 동일한 평면으로 궁궐 침전의 법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현재 왕의 침전과 세자의 침전으로 재현소품이 설치되어 있다.


내행전 내부


내행전 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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