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실학박물관

연극으로 실학하는 여자, 나도 여기 왔네요

2018-03-21 ~ 2018-03-21 / 배우 박정자

봄날 초입인데도 하늘은 잔뜩 흐렸다. 간간이 눈발까지 날리는 쌀쌀한 날씨 탓에 연극배우 박정자는 며칠 전부터 벼르던 지하철 도보행을 포기했다. 운동 삼아 전철을 즐기지만, 논현동에서 실학박물관까지는 전철을 한번 갈아타고 운길산 역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90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

저녁 공연 <빌리엘리어트>(디큐브아트센터, 5월7일까지)를 하러 갈 에너지도 비축해야 했다. 오랜만에 아들이 함께 동행해 준 드라이브라서 그런가. 자동차 여행길에 내다보이는 남양주 물길과 산세가 유난히 아름답다.

박물관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 박정자는 문득 건너편 길에 있는 정약용 생가 쪽을 돌아다보았다. 자세를 고쳐 세우고 꾸벅 인사를 한다. “들어갑니다, 저..., 인사하고 가야지.” 모든 일을 마음에서부터 건져 올리는 연극배우 박정자, 그녀는 실학박물관의 스페셜토크토크가 초대한 첫 번째 방문객이다.



“아휴, 챙피해, 여기가 첨이란 게 나는 너무 챙피하네.”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 종종 걸음을 친다. 6분 정도 영상전 <상심낙사> 설명을 꼼꼼하게 듣고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했다. 1전시실 왼쪽에는 17, 18세기의 조선시대 사회 경제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유물과 설명이 있다. 맞은편에는 재야학자로 실학정신의 뿌리가 된 류형원의 유물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근데 요즘 사람들도 진짜… 공부를 하나? 글자로 하는 공부 같은 건 어쩐지 안할 것 같은데 말이지. 실학도 괜히 어려워. ‘學’자가 들어가서 그런가.”

그래서 실학박물관에는 20여 명의 다양한 해설사가 매일 3명씩 항시 대기한다. 글보다 말이, 설명보다는 이야기가 매력적인 법이다. 해설사들의 평균 연령은 60대이고, 대부분 교사나 교수 출신이다. 이들의 중요한 공통점은 평생 배운 지식을 실용적으로 활용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 지점에 실학박물관이 있었고, 유물을 스토리텔링한 그들의 특징은 각각의 색깔이 있다. 말의 매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박물관이 하는 청각에 대한 배려, 난 그거 친절이라고 생각해요. 유물이라니까 그런가보다 하지, 사실 그냥 물건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에 담긴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니까 깨진 조각 하나로도 시공간을 넘나들고 상상을 하잖아요. 그러니 이야기란 게 얼마나 중요해. 이런 생각은 어때요? 유물 앞에 딱 서면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시설. 해설사 따라 다니면서 듣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혼자 천천히 생각하면서 보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까. 여기는 급한 시간 쪼개서 올 사람들 별로 없잖아요. 예술인복지재단에는 배우 100명이 소설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박물관 유물 앞에 서면 배우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 연계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중국으로 간 연행사와 일본 통신사 전시 앞에서 다시 걸음이 멈췄다. 조선시대 법으로는 해외교류가 사형 감이었단다. 그래서 연행사나 통신사처럼 허락된 해외 접촉 사례는 특수한 경우였다. 연행길 중 특히 ‘열하’는 연극인 박정자에게도 괜히 익숙한 지명이다. 손진책 연출가의 ‘열하일기’가 꽤 알려진 연극 제목인 탓도 있다. 

“(연행길의 표시판을 가리키며) 근데, 열하 밑에 있는 글씨가… 북경? 북경같은데, ‘북’자가 지워졌나봐... 어, 저쪽 끝에 있는 글자도 조금 지워진 것 같다. 나는 이런 기관의 전시물에 요런 글자처럼 작은 것들이 마모되거나 아무렇게나 방치된 걸 보면 마음이 좀 그래. 너무 싼 재료라서 그런가. 천년씩은 아니어도 몇 백 년은 갈 수 있어야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지.”

실학박물관의 3전시실 마지막 전시는 ‘신곤여만국전도’다. 1708년 조선왕실에서 제작된 ‘곤여만국전도’를 2011년 실학박물관에서 8개월간 복원해낸 것이다. 곤여만국전도는 이태리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가 중국 황제에게 선교 목적으로 그렸던 17세기 회화식 세계지도였다.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가져왔던 곤여만국전도는 당시 오랑캐 선물이라고 푸대접을 받아 왕실 창고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더랬다. 숙종 때 창고에 있던 모사본이 2개 그려졌는데, 서울 규장각과 남양주 봉선사에서 보관하다가 한국전쟁 때 봉선사 것은 소실되었단다. 곤여만국전도는 자그마치 300년이라는 시간을 품고 있는 셈이다. 경도위도 처음 보고 놀란 중국 황제에게 마테오리치가 전해준 메시지는 “좌우로 세상을 돌아보면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넓은 게 있다”는 것이었단다. 서울 동쪽 끝으로 눈을 길게 돌려보면, 실학박물관이라는 진귀한 곳을 당신도 만날 수 있다.


“박물관 다니다보면 입구에서 들어오는 사람들 머릿수만 세고 있는 것 같아(하하). 실학박물관처럼 특수한 지역 박물관은 자주 찾는 게 아니니까 오는 관객들 걸음이 너무 귀하잖아요. 뭘 줄 건지, 어떤 기억을 줄 건지 한 번 더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나도 오늘 40분 걸려서 왔다니까요. 이젠 알았으니 물론 오며가며 더 올 테지만 말예요.”

실학이라는 학문이 실제로 존재했느냐 않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실학이라는 정신이 현재의 생활을 진정성 있게 바라보려는 진지한 시선이었고,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는 방향으로의 고민이었다면 오늘날 연극계의 진정한 여성실학자는 박정자다. 연극인으로 60년 가까이 살아왔던 그녀의 인생은 평생 연극으로 얻은 것들을 어떻게 나누고 베풀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발자국은 이제 실학박물관에도 남았다.






세부정보

  • 실학박물관/ 뉴스레터81호

    스페셜 토크토크/ 연극배우 박정자

    / 김수미(실학박물관 기획운영팀)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6

    문의/ 031-579-6000

    실학박물관 홈페이지/ http://silhak.ggcf.kr

    이용시간/ 10:00~18:00

    휴일/ 매주 월요일

글쓴이
실학박물관
자기소개
실학박물관은 실학 및 실학과 관련된 유·무형의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교류·전시하며 지역 주민에게 교육과 정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다목적 차원의 문화복합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건립한 국내 유일의 실학관련 박물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