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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광명,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다 (1)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분단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까지 격동의 시기를 보낸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 속에서 서울과 인접했던 경기도 또한 많은 근대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기천년 근대문화 유산답사'에서는 경기도에 있는 근대문화를 소개하고 경기도의 역사와 정체성, 문화유산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광명시는 1981년 시로 승격한 젊은 도시로, 서울, 부천, 시흥, 안양과 인접하고 있다. 광명하면 1960년대 후반 이후 개발이 이루어진 광명사거리 인근과 철산동 등을 떠올리지만, 사실 광명시가 가진 시간과 공간의 폭은 이보다 넓다. 그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그 시간의 중심지였던 장소들을 살펴보자.



광명의 시작점 : 설월리 마을


소하2동 설월리. 원래의 지명은 시흥군 서면 설월리였던 이 곳은 광명의 시작점이 된 곳이다. 구름산 아래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이 시흥군 서면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설월리에 서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 서면공립보통학교 등의 주요 시설이 설치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968년 광명사거리 주거지가 개발되기 시작하며 광명의 중심은 점차 서울과 맞닿은 북쪽으로 옮겨갔고, 설월리 일대는 1971년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개발이 제한되었다. 그리하여 설월리 일대의 풍경은 1960년대의 그 것에 머무르게 되었다.


<설월리 마을 풍경. 텃밭과 옛집>


1914년경 지도를 보면 구름산(雲山) 동측 아래 소하리(所下里)라는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현재의 소하동 설월리라 할 수 있는데, 그 동편으로는 안양천의 지류가 흐르고 소하리를 중심으로 동서방향의 길과 남북방향의 길이 십자형으로 교차하고 있다. 아쉽게도 하천은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두 길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남북방향의 옛길은 현재의 광명역에서 광명시청을 잇는 오리로이고, 동서방향의 옛길은 설월리와 소하동성당을 잇는 길이다. 설월리에는 1900년을 전후하여 지어진 전통한옥들, 일제강점기 지어진 근대기 한옥들, 1960~70년대 지어진 양옥들 등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개발제한구역이었기에 대부분 단층 혹은 2층의 집들이 대부분이며, 옛 길인 설월로의 양 옆으로 자연스럽게 분포하고 있다. 오래된 동네 슈퍼와 세탁소, 담장 앞 화분들과 집 주변 텃밭들은 이 곳에 멈춰버린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통한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설월리 마을 풍경>


한편 자연 형세에 맞춰 형성된 마을인 설월리의 동북측에는 거의 비슷한 크기의 주택들이 연속적으로 줄을 맞춰 분포하는 계획된 주택단지(설월리 313번지 일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곳은 바로 1970년 생긴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의 직원 기숙사로 건축된 ‘기아의 집(기아주택)’이다. 기아의 집은 대부분 150m2 남짓의 대지 위에 놓인 20평 안팎의 1층 규모의 사택으로, 약 100호의 사택이 오리로345번길을 중심으로 9개의 블록에 걸쳐 질서정연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사택들은 대부분 1978-79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평지붕의 단층 양옥 건물이다. 기아의 집이 이 곳에 생기면서 설월리 마을에 비로소 물탱크가 설치되었다고 하니, 설월리마을과 공생의 관계에 있는 곳이다.



땅속 깊이 새겨진 시간들: 시흥광산, 그리고 광명동굴


구름산 남서쪽으로는 가학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가학산에는 광명동굴이 위치한다. 현재 광명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광명동굴은 원래 20세기 초 금광으로 개발된 시흥광산이었다. 조선 초기에도 시흥(당시 지명으로는 衿州)은 은(銀)산지로 유명했다고 하나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시흥 광산(始興鉱山)은 1918년 이이다 노부타로(飯田延太郎)의 인수 이후 이이다시흥광산(飯田始興鉱山)으로 불렸으며, 금, 은, 동이 주요 광물이었다. 이 광산은 1920년 당시 15,837원의 광산액, 15,926명의 연인원 규모를 지닌 광산이었다.



<광명동굴내부. 레벨2까지 개방된 시흥광산에는 아직 개방되지 않은 갱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시흥광산이 그 채굴을 멈춘 건, 1972년의 일이었다. 1961년 노조간부의 집단 해고, 1962년 노동운동 및 직장폐쇄 등 노동문제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면서도, 그 후 10년을 더 운영하였는데 1972년 홍수로 인해 결국 광산을 폐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에는 소래포구 새우젓 저장소 등으로 일부 사용되다가 2011년에 이르러서야 보수,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광명동굴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굴이라 이름이 붙어 있어, 석회동굴 같은 자연동굴을 떠올리기 쉬우나 사실상 이 곳은 근대기 광산노동자들의 피땀이 어린 노동의 현장이었다. 지금의 광명동굴은 당시 사용되던 갱도의 일부(전체 7레벨 중 2레벨만 사용중)이니, 원래 광산의 갱도는 훨씬 더 깊은 땅 속까지(약 275m 깊이) 뻗어 있었다.


<광명동굴 갱도 수직2레벨에 위치한 지하 호수>


동굴의 입구 우측에는 채굴한 광물을 분류하기 위한 선광장이 있으며, 현재 복원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다. 현재의 광명동굴은 관광지화되어 각종 전시 및 체험 프로그램의 장이 되어 있긴 하지만, 동굴 곳곳에는 광산으로 사용될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곳곳으로 뚫려 있는 갱도의 흔적들, 땅 위와 물건을 오르내리던 작은 구멍과 기구의 흔적, 물이 고여 만든 암반수 연못 등을 보노라면, 지금보다 훨씬 어둡고 좁은 통로를 매일 드나들었을, 어두운 조명 하나에 의지하여 오랜 시간 그 안에서 어두움과 폐쇄의 공포와 싸웠을 광부들을 떠올리게 된다. 일제강점기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척박했을 노동여건 속에서 그들이 품고 있는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의 공포는 어떠했을까 사실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광산이었을 당시의 전시물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광명동굴이 좀 더 이 곳에서 광부로 일했을 이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이 곳의 쌓인 시간들을 너무 가벼이 날리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채굴한 광석을 선별하던 선광장(選 鑛場)>



- 광명,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다 (2)에 계속 -


세부정보

  • 경기천년 근대문화유산 답사

  • 글, 사진/ 이연경,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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