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실학박물관

다산과 맺은 수종사의 인연을 찾아

2018-05-04 ~ 2018-05-04 / 수종사 동산스님



수종사로 가는 길은 아주 가파르다. 경사도 급하고 폭도 좁아서 베테랑 등산객도 고생스러워한다. 하지만 막상 오른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강과 산은 다시없는 절경을 이룬다. 수종사는 그 풍광 때문에라도 여행가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명소다. 그밖에도 수종사와 맺은 오래된 인연들이 특별하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1561-1613)과 다산 정약용(1762-1836)도 수종사를 자주 찾았고 그 흔적들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수종사를 각별히 생각한 사람 중에는 도올도 있다.



도올 선생이 실학공부를 하는데 자꾸만 수종사 이름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꼭 한번 와야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셨다가, 한번 올라오셔서는 초의 스님 이야기를 실컷 하고 가셨지. 다산 선생과 인연이 그렇게 각별했다고.해배되고 다산 선생이 여기로 돌아올 때 강진에 있던 스님이 따라오셨다지 아마. 그때 스님은 여기서 지내셨답니다. 도올 선생은 수종사에 방 하나 드린다고 자주 오시래니까, 책보면 어디 나오기가 싫더라고, 그때도 벼르고 별렀다고 하시더라고. 그분도 수종사 오셔서는 그렇게 좋아하셨지.



수종사는 실제로 다산과 인연이 깊다. 다산이 1786년에 지은 연작시 13수의 <초천사시사>에는 ‘수종사의 눈 감상 水鍾山賞雪詞云’이라는 시가 있다. 해배 후 강진에서 돌아온 후에는 다산의 배웅을 받으며 아들들과 초의 스님이 수종사를 유람하며 시를 썼고 그 글과 그림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수종사는 그렇게 실학자들과의 인연이 남다른 곳이다. 














                           수종시유첩

1830년 가을 다산의 두 아들이었던 정학연과 학유, 다산의 당진 유배시절에 인연을 맺은 초의는 수종사를 유람하면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현재 그들의 시는 <수종시유첩>으로 남아있다. 다산과 홍현주, 박보영, 이만용은 서문을 썼고, 홍현주는 그림을 그려 운길산의 모습과 유람 정황을 사실적으로 알 수 있게 했다. 이는 다산이 만년에 여러 학인들과 교류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낭풍과 현포는 아스라한데縹緲閬風縣圃

옥나무에 은병풍을 둘러 세웠네周遭玉樹銀屛

하늘 가 묏부리는 차라리 검고天近峯巒似黑

여울 만난 강물만 잠시 푸르다水逢湍瀬暫靑

- 2010년 특별전 전시도록 <다산과 가장본 여유당집>, 정민, 특별전논문, p219



25세의 다산이 지은 시다. 낭풍과 현포는 신선 세계를 말하는데, 수종사의 눈 내린 경치를 신선 세계에 빚댄 표현 외에도 온통 하얗기만 했을 눈 덮인 산에서 검고 푸른색과 옥빛의 은색까지 찾아낸 다산의 분별력은 대단하다. 다산이 평생동안 빚어낸 산물들이 2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도 퇴색되거나 바래지지 않고 점점 더 크고 귀한 가치를 발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간이 품고 있는 사람의 좋은 기운은 낯선 공간을 친근하게 만들어준다. 인터뷰 섭외를 하러 수종사를 찾았던 날, 스님은 아껴두던 귀한 연잎차를 꺼냈다. 불쑥 찾아 온 이를 좋은 차로 넉넉히 반기는 마음이 그대로 부처였다. 스님의 덖은 연잎차가 남겨준 깊은 향은 아직도 혀끝을 맴돈다.



나도 정약용 선생과 같은 성씨니까 따져보면 정약용 선생이 내 조상이에요.(웃음) 다산 선생이 종교적으로는 초의 스님과 인연이 있죠, 공간적으로는 수종사 인연이 있고, 몸속에 흐르는 피까지 합치면 내가 다산 선생이랑은 각별한 인연이에요.(웃음)






동산스님은 실학박물관을 뮤지엄 숍에서부터 시작했다. 영화관도 1년에 한번 가볼까 말까 하는데다가 핸드폰 보조배터리 같은 건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정도로 세상물정에 밝지 않은 스님이 뮤지엄숍의 아기자기한 물건에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호. 어째 요런 게 다 있네.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대? 호. 요놈은 진짜같네?



목각의 잭 러셀 테리어를 한참 들고 요리조리, 동글동글한 도자기 사과랑 7살 아이모양의 도자기 공예도 재밌고 신기하다. 아예 ‘나 사는 데랑 똑같은’ 기와집은 심심해 보여서 가볍게 패스. 스님은 1전시실부터 시작해서 3전시실로 끝날 때까지 전시 하나하나를 모두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일일이 확인하면서 물었다. 신곤여만국전도를 한참 들여다보다가는 배 깃발마다 붙어있는 절 ‘卍’자를 발견했다.







어, 여기는 온통 절 ‘만卍’자네? 마테오리치가 ‘卍’자를 어떻게 알았지? 거 참, 신기하네. 이게 봉원사에 있는 사진을 복원한 지도잖습니까. 그때가 마침 내가 봉원사 부주지였어요. 그래서 당시에 김시업 전 관장님이 설명하시는 곤여만국전도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지.



마테오리치가 중국 황제에게 세계지도를 그려 보여준 것은 선도가 목적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만’자가 아니라 십자가였단다. 그런데 십자가가 중국에서는 사형과 죽음이라는 불길한 표식이라는 통념이 있어서 만자로 바꿔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만’자는 너무 작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질 않는다. 스님은 그 조그만 글자를 찾아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여기, 참 잘해놨네요. 몇 번 왔어도 자세히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그래서 더 색다르게 본 것도 많네. 그런데 이렇게 재밌는 실학이 실용적으로 실생활에 적용되는 이야기로 전해지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이 존경받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호치민이 롤 모델로 삼은 사람이 다산 선생이었다면서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한 적 없지만, 그거는 실학박물관이 확인을 해주면 좋겠네. 여튼, 그렇게 잘 알려진 사람들 통해서 다산이나 실학 이야기가 다시 생산되면 실학박물관도 우리한테 좀 더 가깝게 다가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호지명과 다산의 이야기는 실학박물관에서 2010년에 확인된 바 있다. “지금까지 다산의 저서 중에는 ‘합법적 저서와 비합법적 저서가 있다’든가 ‘<경세유표>를 호지명이 읽었다’든가 하는 등의 신화가 있어왔는데, 이는 가장본家莊本의 검토에 의하여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말끔히 해소되었다고 보아도 좋다.”(2010년 특별전 전시도록 <다산과 가장본 여유당집>, p123) 호지명이 좋아했다는 다산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소소한 바람과 기대가 만들어낸 신화였던 셈이다.

스님의 소망처럼 실학박물관은 박제된 학문과 과거 한때 멈춰버린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지금 현실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박물관으로서의 길을 모색 중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누구나 찾아올 수 있고 누구나 찾아오고 싶어 하는 공간, 누구나 자신의 크고 작은 생각들로 치열하게 만날 수 있으며, 현실적 대안을 찾아내고 더 길고 멀리 볼 수 있는 통찰의 공간, 그것이 바로 실학박물관이 지향하는 궁극의 지점이다.





세부정보

  • 실학박물관/ 뉴스레터82호

    스페셜 토크토크/ 수종사 동산스님

    / 김수미(실학박물관 기획운영팀)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6

    문의/ 031-579-6000

    실학박물관 홈페이지/ http://silhak.ggcf.kr

    이용시간/ 10:00~18:00

    휴일/ 매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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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자기소개
실학박물관은 실학 및 실학과 관련된 유·무형의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교류·전시하며 지역 주민에게 교육과 정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다목적 차원의 문화복합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건립한 국내 유일의 실학관련 박물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