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경기를 빛낸 인물, 우계 성혼

경기천년을 빛낸 인물을 만나다


천천천 경기천년 기자단은 2018년은 경기천년의 해를 맞아 천년을 이어온 경기도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미래의 꿈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경기도 내 거주자와 학생, 직장인들로 꾸려진 기자단입니다.



천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서 경기도는 수많은 위인들을 배출시켰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율곡 이이 선생의 이름은 많이 들었봤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율곡 이이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오늘 소개할 우계 성혼입니다. 얼마나 우애가 깊었으면 길고 긴 경기천년의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우계 성혼의 영정


앞서 설명한데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율곡 이이(1536∼1584)에게는 평생을 함께한 절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본가인 경기도 파주에서 20세 때 만난 우계 성혼(1535∼1598)입니다. 그는 성수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령, 호는 우계입니다.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긴 학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文廟)에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입니다. 1682년 나란히 배향됐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기호학파에서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추앙받았습니다. 율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계를 알아야 하지만, 오늘날 성혼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데요.


우계성혼박물관(파주읍 향양리 390-57)


경기도 파주에서는 우계 성혼의 삶과 행적을 조금 더 살펴 볼 수 있는 우계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는 부친 성수침을 통해 조광조의 학문을 배워 정몽주, 길재로 이어지는 고려 말의 의리학과 조선 초기의 도학을 계승하였으며, 1572년 율곡과 성리학에 관한 토론을 하여 이기일발설을 정립하였는데, 이 논쟁은 한국 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혼은 평생 거의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고, 유학의 이론에도 매우 해박했지만, 고결한 인품과 수양으로 동료, 제자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계기념관


성혼은 거의 평생을 재야의 선비로 살았지만,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은 지극하였습니다. 그는 16세기말 일본의 침략을 당하여 <편의시무 9조>와 <편의시무 14조>를 임금에게 올려 전쟁 중의 국방대책, 민생문제, 조세문제 및 언로문제 등 당시 전쟁 중의 비상대책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법이라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겨 백성에게 불편을 가져와 해롭기 때문에 개혁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특히 개혁을 주도할 기관으로 혁폐도감의 설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성혼선생의 묘(파주읍 향양리 산 8-2)


성혼은 공직자의 윤리로서 청렴, 신중, 근면 세 가지를 제시하였고, 개혁의 대안을 수집하고 임금을 돕기 위해 언로를 활짝 열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성혼은 성리학의 이론적 계발보다는 내면적인 자기 자신의 수양을 중시하였고, 진실한 마음의 확립, 진실한 노력, 실천을 중시하는 무실학풍을 열었습니다. 또한 자기 수양의 방법으로 경을 중시하는 우계학파의 학풍은 개방적인 데 특징이 있고,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여 조선 양명학의 씨를 뿌렸습니다.


성혼선생의 묘(경기도기념물 제 59호)


우계 성혼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죽은 뒤 선조 35년 기축옥사(己丑獄死)와 관련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인조 11년(1633)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묘역은 사성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을 중심으로 우측에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봉분정면에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상석 앞에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쌓았으며 좌우에 문인석을 배치하였습니다. 묘소의 입구 우측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김집(金集)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습니다.


파산서원 (파평면 파산서원길 24-40)


이 서원은 조선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39~1564)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 아우 절효공 성수종(節孝公 成守琮, 1465~1579) 및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1497~1579)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입니다. 선조 원년에 율곡 이이, 휴암 백인걸 등 파주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효종 원년(1650)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이 서원은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철폐시에도 존속되었던 47개 서원중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곳입니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진 것을 그 뒤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타 1966년 서원 본전인 사당만 복원하였습니다. 사당 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돌리고 정말 중앙에 솟을 삼문을 두었습니다. 사당은 이별대의 기단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의 초석과 원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면칸은 퇴칸(退間)으로 개방되어있고 각 칸에는 2분합의 띠살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지중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둥머리에는 보 방향으로 2단의촛가지를 결구한 이익공(二翼工)의 공포형식(?包形式)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싸여져 있습니다. 이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 등은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기천년을 맞이하여 길고 긴 시간동안 친구사이를 유지해, 역사 속에도 우정을 남긴 우계 성혼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계 성혼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시고, 두 번의 가슴 아픈 전쟁으로 인해 파산서원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1000년의 역사 속에 후학을 양성하고 평생이라는 긴 시간 속에 우정을 변치 않았던 우계 성혼, 경기천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해야할 위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경기천년 기자단이었습니다.





세부정보

  • 출처/ 파주시청, 연합뉴스 한영우 명예교수 '우계 성혼 평전' 믿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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