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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고려시대의 경기제 운영

『문화정책』은 경기문화재단이 국내외 문화정책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추진하는 다양한 문화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2017년 여름부터 발행하고 있는 계간지입니다. 본문은 『문화정책』 4권 논단 내용입니다.


정학수 인천문화재단 강화역사문화센터 연구원


경기 이념의 형성과 경기제


경기(王畿)는 군주가 거주하는 도읍을 보호하고 그 기능을 돕기 위해 설정한 일정한 구역을 말한다. 경기는 중국사에서 기원하였다. 중국사에서 경기제는 종법(宗法) 원리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와 관련이 있다. 주(周) 나라가 다스리는 천하 영역은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직할지와 분봉 제후가 다스리는 제후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천하의 중심에 있는 천자의 직할지가 왕기(王畿)로서 이것이 경기의 유래가 되었다.


주 나라의 천하관에 따른 영역구분은 당시의 통치력에 기초한 것이고, 주의 봉건제는 종법 원리에 입각한 신분적 질서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주대의 현실상 위계질서가 예제(禮制)로 나타난 것과 같이, 질서체계에 입각한 영역 등급 내지 서열화의 논리가 천자의 본거지인 왕기를 설정하고 중시하는 이념적 기반이었다.


왕기 설정 이념은 진(秦)·한(漢) 등의 역대왕조를 거쳐 당대(唐代)에 와서 경조부윤(京兆府尹)과 경조부윤이 겸한 경기채방사(京畿採訪使)가 통치·감독하는 경기통치제(이하 ‘경기제’로 줄임)로 모습을 갖추었다. 경기제는 고대 중국에서 왕(천자)을 정점으로 하는 질서의식을 통치영역에 적용하여 제도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唐)의 경기제


당의 경기제는 북제(北齊, 550∼577) 이래 지방의 주현을 적(赤)·기(畿)·망(望)·긴(緊)·상(上)·중(中)·하(下)의 7등급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던 제도를 당이 받아들인 것이다. 713년(현종 개원 1) 경도(京都)가 다스리는 곳을 경현(京縣, 혹은 赤縣)으로, 도성 밖 주변지역은 기현(畿縣)으로 구분하여 이들을 천자가 거주하는 3경(경조부=서도, 하남부=동도, 태원부=북도)에 각각 두고 특별지역으로 통치하였던 데서 확립되었다.


경조부의 관할은 원래 적현과 기현으로 구분되었는데, 중기 이후 적(赤=京), 차적(次赤), 기현(畿縣)의 구별이 생겼다. 즉 당 초기에는 장안과 만년 2현이 적현이고 나머지는 모두 기현이었는데, 후에 기현 가운데 능(陵)이 조성됨으로 인해 점차 적현(=경현)과 같은 차적현(次赤縣) 등급이 출현하였다. 장안과 만년현에도 외곽에 능이 있었다.


당의 경기제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신분 질서에 따라 영역에 등급을 두어 차등적으로 지배하였던 왕기 이념과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경기는 사방의 근본으로 인식되어 부역(賦役)을 가볍게 하거나 혜화(惠化)가 먼저 이르도록 하였다. 왕기제를 계승한 중국의 경기제에는 단순히 경사(京師)가 있어서 중시된 이상의 의미, 즉 천자 중심의 사회 운영 질서론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국사의 경기제 수용


한국사에서는 고려왕조 초기인 10세기 말 성종 때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차원에서 중국사의 경기제 원리에 입각하여 개경(開京) 일대의 통치 제도를 정비한 것이 경기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삼국 및 신라시기에도 경기제를 가리키는 왕기(王畿)·기내(畿內) 등의 용어가 사료에 등장하지만, 중국 당대(唐代)에 도읍과 그 주변 지역을 특별시하는 통치제도로 확립된 경기제를 본격적으로 도입·운영한 것은 고려 초기로 생각된다


고려 왕실은 신라 하대와 후삼국시기에 지방세력에서 성장했고, 태조 왕건은 신라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비(非)진골 출신이었다. 후삼국을 통합한 초창기 고려는 내부 통합과 함께 국왕 중심 집권질서 수립이 당면 과제였다.


왕실의 고향이자 근거지에서 비롯된 왕기 이념은 태조 때 ‘개주(開州)’라는 왕도 일원의 행정구역으로 반영되었다. 개주는 신라 군현제를 토대로 편성되었으며(개주=송악군·강음현·송림현+개성군·덕수현·임진현), 개주에 위치한 서울이 개경이었고, 개주는 개경을 포함하는 왕도의 특별구역이었다. 태조는 이곳에 10개의 절을 건립하여 불국토 신라 왕경을 대신하고자 하였다.



고려 경기 13현. 고려초의 개주는 선대의 활동무대, 즉 왕실 선대의 고향이자 근거지였다. 성종대 개성부는 개주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고려 경기제의 운영


고려정부는 성종 14년(995)에 개경 일대를 적현(赤縣)과 기현(畿縣)으로 편성하고 이를 개성부(開城府)가 다스리게 하였다. 이는 당의 경조부(京兆府)가 경현(=적현)과 기현을 다스리게 한 것과 같다. 고려정부가 신라에서 부분적으로 활용되던 것과는 달리 도읍 일원의 통치조직으로 경기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당시 최고의 문화수준으로 인식된 당의 문물제도와 같게 만든 것은 지방세력과 차별되는 왕실 위상을 높이려는 조치로 이해된다.


태조 이래 도읍 내 열개 사찰의 건립 및 성종대 태묘 등 유교시설 건립은 국왕 거주 공간의 성소화(聖所化)로 개경 위상 정립에 기여하였다. 또 왕실 고향 또는 근거지의 성지화(聖地化)도 추구하였는데, 이는 당에서 왕릉이 조성된 고을을 적현으로 삼은 것과 같이 왕릉이 조성된 개경 인근 개주 군현을 적현으로 설정하였다. 신성성과 질서의식이 부여된 성지·성소를 제도화한 것이 성종대 적기제(=경기제)라고 할 수 있다.


고려 경기 13현. 국초의 개주는 성종대 적현의 토대로서 고려 왕실 선대의 활동무대, 즉 왕실의 고향이자 근거지였다. 성종대 개성부는 개주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경기제가 한국사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고려 성종 때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도입’의 의미는 경기 통치 기구나 조직 등의 면모를 고려시기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그렇게 보는 것만이 아니고, 8세기에 체계화된 당의 경기제에 대해 고려정부는 역사적·경전적 이해를 바탕으로 고려의 통치제도에 전면 적용하려 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송 제도를 모델로 한 성종 때의 중앙과 지방통치조직의 대대적 개편은 고려의 현실에 맞지 않은 것이 적지 않았다. 특히 지방통치 면에서 당시 지방조직 단위는 부·주·군·현(府州郡縣) 등이 난립했는데 성종 때는 이러한 행정단위를 정리하여 당의 주현제(州縣制)와 같게 하여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안착하지 못하고 23년만인 현종 9년(1018) 현실을 감안한 전면적 조정이 가해졌다. 그 결과 주현(州縣) - 속현(屬縣) 체제와 계수관(界首官) 제도를 골격으로 하는 지방제도가 수립되었다.


『고려사』 지리지 왕경 개성부 연혁에서는 현종 9년(1018)의 개성부 폐지와 개성·장단현령 설치를 경기제의 시작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고려 경기제의 시작을 이 때로 보기도 한다.1) 현종 9년 경기 개편 의미는 도읍에 나성(羅城)이 축조되는 것을 계기로, 개경 5부를 제외한 왕도의 특별구역(적현과 기현)에 대해서도 주현-속현체제 및 계수관제의 적용을 받게 하려는 의도였다. 관련 기사에, “현종 9년에 (개성)부를 없애고 현령을 두어, 정주·덕수·강음의 세 현(縣)을 관할하고, 또 장단현령을 두어 송림·임진·토산·임강·적성·파평·마전의 7개 현을 관할하게 하여, 모두 상서도성에 직속시키고, 이를 경기라 불렀다.”2) 고 할 때 ‘직예 상서도성, 위지경기’의 의미는 다른 지방과 달리 (왕도의 특별구역은) 계수관의 통할을 받지 않고 중앙이 직접 관장한다는 것으로, 이를 통해 기보(畿輔)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3) 현종 9년에 개편된 경기제는 문종 때에 이르러 보완된다.


문종 16년(1062)에 개성현령을 지개성부사로 승격시키고 이를 통해 경기지역(13현)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4) 이는 지개성부사가 경기 계수관 역할을 하게 한 것으로, 이 무렵 서강(西江, 예성강)의 병악(餠嶽) 남쪽에 장원정(長源亭)을, 덕수현에 흥왕사를 창건하는 등 경기에서 벌어지는 국가적인 공역에 대응하기 위해 외관 원료를 증치 확대한 조치로 이해된다. 대체로 문종 때 정비된 경기제의 큰 틀은 이후 경기지역에 감무(監務)가 파견되는 등 일부 조정이 있었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정부가 강화(江華)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유지된 듯하다.


문종 때 경기제 운영과 관련해서는 개성현에 치소를 둔 개성부가 경기 13현을 통할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대해 문종 때 전시과의 시지(柴地) 분급지의 확대를 경기의 확대로 이해하여 문종 23년(1069) 이후에는 이른바 ‘대경기제(大京畿制)’가 실시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강화천도 시기에는 문종 이래의 경기제가 정상적으로 실시될 수 없었다. 원(元) 간섭기에 들어와 경기제가 복구되었는데, 이때의 경기제는 문종 때보다는 성종 때 제도를 더 닮은 모습이었다. 개경에는 개성부가 설치되었고 개경 밖의 개성현에 현령관이 설치되어 ‘경기8현’을 관장하게 하였다.5)


원 간섭기에 복구된 경기의 범위는 현재, 관원들의 부족한 녹봉을 보완해 주기 위한 방편으로 경기8현에 녹과전(祿科田)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근거로 고려 전기보다는 축소된, 경기8현을 중심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 견해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원래의 경기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만큼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려의 경기제는 고려 말에 이르러 광역행정구획인 도제(道制)로 전환되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여기에는 집권세력의 교체와 그에 따른 사전(私田) 개혁이 배경이 되었다. 이로써 고려 전기의 경기제는 봉건 이념에 기초하여 사적(私的)이면서 질서의식이 강하게 투영된 특별한 공간에서 출발하여 고려 후기와 원 간섭기의 조정기를 거쳐 조선왕조에서의 경기제는 사대부들의 물적 토대라는 기본 속성은 유지하면서도 보다 공적(公的)이고 일반적인 행정구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려 경기제의 역사성


고려국가의 통치영역은 공간적으로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되고, 중앙은 도읍인 개경과 경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기는 도읍인 개경으로 인해 설정된 도읍의 배후지였다.


고려는 상하(上下) 질서의식이 담긴 경기의 이념을 국가의 통치체계에서 실현하려 했다. 그 통치기구가 ‘왕경 개성부(王京開城府)’였다. ‘왕경 개성부’는 해당시기의 경기 인식과 현실에 따라 변화했는데, 그 과정은 경기의 기능들이 통합되었다가 점차 ‘왕경 개성부’ 통치체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다른 통치제도로 분화, 정비되는 방향이었다.


경기와 경기제가 신라 때는 개별·분산적으로 이해되었는데, 고려시기에는 통합과 동시에 기능 분화의 단계이고,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다시 도제(道制)로 자리잡아 거경시위(居京侍衛) 사대부의 물적 토대가 되는 한편, 국가 재정·경제적 기능과 군사적 기보(畿輔) 지역으로서 기능 등이 재확립된 단계라 할 수 있다.


경기의 이념과 제도는 이런 측면에서 제민일치 사상에 따른 급전방식인 균전제(均田制)가 경기의 제도적 완성을 보이는 당(唐) 현종 때(712∼756) 붕괴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봉건적 질서의식으로 재무장하는 역사단계에서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나아가 개경의 경기가 현종 9년에 성립하였고, 현종 15년 기사에서 西京畿의 용례가 보이는 것을 볼 때 평양의 서경기 역시 현종 9년에 제도적 틀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 『고려사』지리지 왕경 개성부 연혁


3) 현종 9년 2월에 개성·장단 등 전국 20군데 현령을 파견했고, 모든 州와 府의 관원이 奉行해야 할 6개 조항을 새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해에 장리의 공복을 정하고 향직의 인원 수와 직제를 마련하고 호장 천거 규정을 마련하였다. 이로 보아 현종 9년의 경기 개편은 2월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이때 기존의 서경기도 개편하여 동서남북 4道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이후 인종∼명종대에 서경기의 재편이 있었다.


5) 개경환도 이후 몽골 영향으로 개성부가 도성을 관장하고 개성현이 도성 밖(경기)을 관장하게 한 것은 이후 조선시대 한성부가 漢京(한양·서울)을 관장하는 전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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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정책』은 경기문화재단이 국내외 문화정책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추진하는 다양한 문화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2017년 여름부터 발행하고 있는 계간지입니다. 본문은 『문화정책』 4권 특별인터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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