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경원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연천군의 마을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분단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까지 격동의 시기를 보낸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 속에서 서울과 인접했던 경기도 또한 많은 근대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기천년 근대문화 유산답사'에서는 경기도에 있는 근대문화를 소개하고 경기도의 역사와 정체성, 문화유산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연천군은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 협곡과 주상절리, 폭포 등 지질 공원과 주먹 도끼가 발견된 전곡리 구석기 유적, 고구려의 호오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이 모여있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능, 고려 왕과 16 공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 터 등 옛 유적이 즐비하다.


그러나 가까운 과거인 한국 전쟁과 현재의 분단 상황이 더욱 잘 보이는 곳이다. 휴전선과 접하는 군사 보호구역이 있어, 국가 안보에서 중요한 지역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긋고 한반도를 나눌 때, 연천군 대부분을 소련군이 담당하였고, 미국 군정이 맡은 연천군은 파주군에 편입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 연천군이 수복되고 행정기능이 되살아난다. 이 과정을 거치며, 연천군의 행정구역이 일부 바뀌었다. 지금은 남쪽으로 경기도 파주시, 동두천시, 포천시에 접하며, 북동쪽은 강원도 철원군, 북서쪽은 북한의 장풍군과 경계를 이룬다.


연천역 앞


연천은 경기도 최북단으로 경기도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주민등록 인구수가 가장 적다. 큰 도시가 없으며, 소도시와 작은 마을이 철도 노선과 차탄천을 따라 발달했으며, 마을과 국도 3호선, 평화누리길도 나란히 지난다. 경원선을 타고 연천을 찾는다면, 초성리역, 한탄강역, 전곡역, 연천역, 신망리역, 대광리역, 신탄리역이 연천군에 속한다. 비좁은 신망리역을 제외하면, 기차역 앞에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점포가 늘어서고 마을을 형성되어, 철도를 따라 연천이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초성리역은 남북으로 긴 선 형태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한탄강역은 한탄강을 따라 야영장과 축구장 등 관광지가 늘어서 있다. 곧이어 전곡읍이다. 연천군민의 반 이상이 전곡읍에 산다. 전곡읍은 전곡역 좌우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전곡 버스터미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고, 공동주택이 즐비하다. 전곡역 주변의 큰길은 격자형이지만 외곽은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꽤 보인다.


그에 비해 연천역이 있는 차탄리는 반듯반듯한 격자형 도로 구획이다. 연천역 앞쪽은 계획 도로로 깔끔하고 넓지만, 지나다니는 인구는 적다. 이곳은 연천군청과 연천군법원, 연천공설운동장, 연천군민회관 등이 있다. 전곡역 주변이 지역 주민이 생활하는 도시라면, 연천역 앞 동네는 연천군의 행정을 담당한다.


연천역의 다음 역은 신망리역이다. 신망리역은 1956년 8월에 간이역으로 시작했다. 여기는 옛 마을 구조와 격자 구획이 섞여 있다. 역 주변에 6개로 나뉜 구획은 격자이지만, 구획 밖은 자연적으로 생긴 길로 에워싸고 있다. 신망리는 웃골로 일제강점기에 상리(上里)라 불리던 옛 동네였다. 신망리(新望里)라는 이름은 한국전쟁 이후에 붙여졌다. 1954년 5월에 미군 제7사단에서 피난민을 위해 만든 정착지로 새로운 희망을 품으라는 의미로 New Hope Town이라 불렀다. 정착지 규모는 99,173㎡(3만 평) 정도이며, 격자 구획으로 나뉜 곳으로 추정한다. 한 가구당 330㎡ 대지에 59.4㎡의 목조 가옥을 만들었다. 대략 100평 대지에 18평 규모의 주택을 100호 건립하여 선착순으로 피난민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전쟁 이후 연천에 가장 먼저 피난민이 들어온 곳이다. 미 공병단이 기본 골조를 세우고, 주민들이 흙벽을 발랐고, 인근 동네에서 구들장을 캐어 신망리에 구들장을 들였다. 전쟁으로 불탄 집의 구들장을 옮겨온 것이다. 전쟁 직후에는 고철을 주워 팔려는 희망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한적한 동네일 뿐이다. 신망리역은 1면 1선이 다니는 승강장으로 승강장과 역사가 무척 좁다. 기차역과 동네 길이 맞닿는다. 신망리역 북쪽에 대광리역은 역 앞에서 서쪽으로 좌우로 길게 늘어선 도로로 동네가 형성되었다.



신탄리역


연천군 북쪽에서 마지막 역은 신탄리역이다. 신탄리역 주변은 넓지 않은 편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마을이 있다. 신탄리(新炭里)는 고대산에 오르는 길이 있으며, 새 숯막이라 불리기도 한다. 역 앞쪽의 고대산은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산이다. 산에 올라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으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목재가 풍부하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산에서 목재를 가져와 숯을 가공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경원선이 생긴 후 숯 가공과 판매로 번창한 동네이다. 신탄리역은 철원읍에 백마고지역이 생기기 전까지 가장 북쪽에 있는 기차역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신탄리역사는 1961년 12월에 완공하였으며, 옛 간이역 같은 한적한 느낌이다.



남북분단을 알 수 있는 연천의 근대문화유산


■ 증기기관차와 연천역 급수탑


연천역은 1912년 7월에 영업을 시작했으며, 연천역사는 1958년에 건립하였다. 여기도 38선 북쪽으로 해방 이후 소련이 관리하던 구역이다, 1948년에 승강장 서쪽에 화물용 승강장을 만들어 군용 물자를 수송하던 시설이 남아있다.


연천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은 연천역 급수탑으로 등록문화재 제45호이다. 급수탑은 근대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증기기관차 시설이다. 1899년 경인선을 개통한 후 등장한 증기기관차는 1967년 디젤 전기 기관차로 교체될 때까지 전국을 ‘칙칙폭폭’ 달렸다. 증기기관차는 석탄을 태워 증기를 동력으로 움직이며, 증기가 발생하는 보일러, 기관, 차대, 주행부, 탄수차로 이루어진다. 증기의 압력으로 이동하므로 물이 떨어지면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적당한 거리마다 급수 시설을 하여 물을 공급하고, 기관차 뒤의 탄수차(炭水車) 한쪽에서 석탄을 넣거나 탄재를 꺼내고, 다른 쪽에서 물을 넣고 연료 탱크를 닦는 것이 급수탑이 있는 역의 풍경이었다. 급수탑은 주요 역이나, 중간역 상·하행 본선 승강장 끝 또는 기관차고 부근, 정비창 출고선 부근에서 궤도 중심으로부터 2.97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증기기관차에 급수하는 방법은 복잡하다. 급수를 위해 우물물을 급수탑 옆에 급수정에 모으고 펌프로 급수탑 위에 급수 탱크까지 올린다. 기차가 들어오면 급수 탱크에서 낙차를 이용한 수압으로 배관에서 철로 옆에 설치된 ‘ㄱ’ 자 형태의 급수전을 거쳐 기관차로 급수한다. 이렇게 증기 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을 산업화 시대의 상징물로 분류하여 등록문화재로 보존하는 것이다.


연천역 급수탑과 철로


초기에 건립한 급수탑은 석재를 쌓아 만들었으며, 콘크리트 급수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콘크리트를 사용했더라도 돌을 쌓아 올린 것처럼 줄눈을 넣기도 했다. 1930년대 급수탑 표준 도면이 마련되기 전까지 지역에 맞춰 개별 설계를 하였으나, 표준도면 이후 급수탑은 원통형으로 비슷한 모양이다.


연천역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상하행선에 원통형 급수탑과 상자형 급수탑이 있다. 1914년에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것이다. 원통형 급수탑은 일반적인 형태로 내부에 급수관 3개와 기계 장치가 남아있다. 원통형 급수탑은 높이 23m, 둘레 18m이다. 상자형 급수탑은 콘크리트에 줄눈을 넣어 언뜻 보면 돌을 쌓은 듯이 보이며, 기단, 몸통, 처마로 구성되었으며, 아치형 출입구가 있다. 연천역 급수 탱크는 지상에서 15m 높이의 콘크리트 구조로 길이는 7m 크기이며 최대 100톤까지 물을 담아 둘 수 있었다. 연천역에서 기관차가 서고, 급수할 때는 장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연천역 급수탑도 한국전쟁의 흔적이 있다. 여기저기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한국 전쟁 때 연천역 급수탑을 좌표로 삼아 폭격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그 시기에는 급수탑이 높아 보였으며, 지역의 이정표 역할을 했었다. 최근에 간 연천역 급수탑 주변은 잘 꾸며놓은 공원 같고, 연천군민이 재배한 농산물을 사고파는 장터가 열리기도 한다. 이제 연천역은 통근 열차와 평화열차가 다닌다. 2019년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이 복선으로 개통할 예정이다. 전철이 완성되면,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시작과 종착역이 되어 더욱 활발하게 이용되는 연천역이 될 것이다.



■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우리가 연천을 찾으면 각종 안보체험을 할 수 있다. 남방한계선을 따라 서 있는 전망대에서 북한을 볼 수도 있다. 백학면 백령리에 상승전망대는 1974년에 제1땅굴을 발견한 곳으로 북한을 관측할 수 있는 최전방 관측소이다. 지뢰밭 한가운데 북측으로 향한 땅굴 입구가 있다. 땅굴은 지표면에서 250~400m 깊이로 철근이 들어간 조립식 콘크리트를 사다리꼴로 엮어 만든 형식이다. 군사전문가들은 땅굴 규모가 1개 연대 병력이 1시간 이내에 침투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라 분석했다. 중면 횡상리에 태풍전망대는 휴전선까지 800m이며 북한 초소는 1,600m 정도로 북한과 가까운 전망대이다.


실향민의 망향비, 한국전쟁 전적비, 6.25 참전 소년전차병 기념비가 있으며, 날씨가 좋으면 망원경 없이도 북한 주민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긴장감이 맴도는 곳이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열쇠전망대는 신서면 덕산리로 육군 열쇠부대가 안보교육과 실향민을 위해 전망대를 건립하여 북한이 한눈에 본다. 전망대는 민간인 통제 초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한 후 갈 수 있다. 한편 장남면 반정리는 1968년 1월 21일에 북한 제124군 소속 김신조와 30명의 무장공비가 남방 한계선을 넘은 침투로가 있고 망원경으로 북한을 보면 연천 평야가 보인다.



■ 대전차 방어시설


대전차 방어시설은 남북분단의 상징적인 시설물로, 접경지대에서 전쟁이 나면 곳곳에서 방호 시설을 활용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늦추려 것이다. 대부분 1970년대 중반에 만들었다. 대전차방어시설의 정확한 위치와 개수는 군사 기밀이라 알 수 없다.



대전차방어시설 방호벽


대전차방어시설에 방호벽과 용치(龍齒, Dragoon's Teeth)가 있다. 방호벽은 군사 작전에서 중요한 도로마다 벽을 쌓고 벽 위에 장애물을 얹었다. 벽기둥을 폭약으로 날리면 벽 위에 장애물이 떨어져 길을 막아 벽과 낙석 장애물로 전차가 지나갈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도로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서울로 들어서는 주요 길목에도 있다. 이런 방호벽으로 긴 시간을 얻을 수 없으나, 우회로를 개척하기 힘든 곳에 설치하면 효용성을 높일 수 있다. 철원에서 연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설치한 방어벽의 옆은 하천이라 대체 우회로를 만드는 시간이 걸릴 곳이다.


용치는 얕은 하천, 숲, 평지에 설치한다. 철제나 콘크리트를 정사각형이나, 마름모꼴로 굳혀 만든 형상으로 차량이 용치를 밟으면 차량 바퀴가 용치 사이에 끼이거나 뒤집어지므로 차량 진입을 늦출 수 있다. 그러나 하천에 설치한 용치는 물이 흐르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비가 올 때 나뭇가지나 부유물이 용치에 걸려 물이 넘치는 피해가 있었다. 2011년 연천군에 집중호우가 생겨 하천이 범람한 후 용치를 제거한 기록이 있으며, 2013년에도 연천군 차탄천의 용치를 철거했다.



대전차 방어시설 용치


서울 외곽이 발전하고 수도권에 신도시가 생겨나며 방어시설이 꽤 철거되었다. 방치되어 도시미관을 해치거나, 도로가 좁아져 사고가 나거나 혼잡하여 차량 정체가 생겨 철거를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도로 확장이 어려워 지역 발전을 막는다는 의견도 거세다. 사실 이런 방어시설은 현대전에서 활용도와 중요성이 떨어질 수 있다. 효과가 우수한 대체 장애물을 설치하더라도 예전의 대전차 방어시설은 보존하여 후세에 남길 필요가 있다. 단일 시설물을 남기려는 노력보다 군사 장애물과 시설을 묶는 종합적인 정비와 대책을 검토할 때이다.



세부정보

  • 경기천년 근대문화유산 답사

  • 글, 사진/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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