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행주치마 입에 물고-행주산성

경기천년을 지킨 산성을 만나다


천천천 경기천년 기자단은 2018년은 경기천년의 해를 맞아 천년을 이어온 경기도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미래의 꿈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경기도 내 거주자와 학생, 직장인들로 꾸려진 기자단입니다.



2018년은 경기도가 천년이 되는 해이지요. 오늘은 천년동안 경기도를 지켜 준 경기도의 산성을 만나볼까 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426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때(1592) 일입니다. 그 시기에 행주산성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 순찰사였던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머물렀어요. 이때 한양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후퇴한 왜군 3만여 명이 모여 있었지요. 그들은 벽제관에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군대를 크게 이긴 후여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7개 부대로 편성된 일본군이 새벽을 기점으로 공격을 해 왔지만 권율 장군은 이미 강력한 화약 무기들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어요. 수적으로도 열세했던 전투에서 우리나라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신무기들이 동원됐다는 점과 부녀자들까지 나라를 지키는데 동참했기 때문이에요.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치마에 돌을 날라서 함께 돌을 던지며 싸웠어요.


결국 일본군의 피해가 갈수록 늘어났어요.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러 우리 군대가 두 배의 지원 병력을 배치하자, 일본군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을 못하고 하루 만에 행주산성에서 물러났지요. 행주 대첩은 단 하루 만에 끝났답니다. 하루 동안 7차례나 크게 싸움을 벌였지요. 우리 군대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했답니다.



당시 왜군과 싸웠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가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농민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이 승리가 더욱 놀라운 것이지요.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하네요.


사적 제56호. 1963년 지정. 면적 347,670㎡의 행주산성


행주산성은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에요.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고 하네요.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지요.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 지대였지요.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때 조선군 전체를 지휘한 명장으로, 행주 대첩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7년 동안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권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라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행주산성 산허리에 목책(木柵) 자리가 남아 있고,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지요.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웠답니다.


2018년, 경기천년의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이렇게 경기도를 목숨 바쳐 지켜주신 분들이 계시기에 경기천년이 이렇게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래를 위해 목숨 바쳐 조국을 지키신 분들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주산성은 고양 행주산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답니다. 이상 경기천년 기자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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