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실학박물관

고즈넉하게 바라보기

배우 예수정

예수정은 태어날 때부터 배우란 직업이 운명적으로 너무 가깝게 있었다. 전원일기 할머니 역으로 오랫동안 안방극장에서 익숙했던 고(故) 정애란 씨가 어머니였고, 직업이 유명배우였던 엄마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극장과 방송국 분장실이 놀이터였던 액터키드였다. 생활이 연극이었고, 영화였고, 드라마였다. 그런데도 배우 예수정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스스로도 40년 무명배우란 소리를 그저 툭툭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낸다. 뭘 물어도 쑥스럽게 먼저 웃고, 어줍잖은 듯 머쓱해하고, 끝말을 다 마치치도 못할 만큼 어색해하고 수줍어하는 외모와 행동은 그녀가 자그마치 40년 역사를 가진 존경받는 대배우란 생각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무대에서의 그녀는 화려하지도 않고 강렬하지도 않다. 그러나 아프도록 뜨겁다. 밖으로 뿜어내는 열기가 아니라 한껏 온 몸으로 품어 덥혀낸 열기다. ‘예수정표 정서’라고 불릴 만큼 그녀의 그것은 담담하고 고요하게 독특한 깊이를 갖고 있다.

연극 무대 안팎으로 인격적인 면에서 먼저 존경받는 그녀의 인생관은 사실상 사물과 현상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서 출발한다. 스스로가 매순간 새롭게 거듭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겸손한 품성에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실학자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대개 문학과 출신들이 그렇잖아요. 소소한 일들과 일상적인 것을 지루하게 느꼈죠. 부질없는 관념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던 탓이에요. 내가 만든 유리성 안에 들어앉아서 우아하고 겸손한 척하면서 살았던 거죠. 군더더기, 허영, 가짜… 그런 걸로 살았던 것 같아. 아주, 늦게 나는 알았어요. 그 사소하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반짝거리고 귀한 것이었는지. 마루 끝에 무심하게 놓여 있던 그 누룽지는 누군가가 천지개벽 같은 마음으로 끓여낸 것이었어. 세상에는 수많은 답이 있고, 내 것이 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 그것들이 나를 키워왔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실은, 아직도 모르는 게 더 많지만.”














흰머리 탈색은 3년 전 위안부 할머니를 맡았던 연극 <하나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머리가 무슨 인연을 만들었는지 이후로 브라운관에서도 스크린에서도 그녀는 내내 그렇게 흰머리 역할이었다. 억지로라도 염색을 했어야 했던 그 이전보다 아예 탈색을 택하는 지금이 썩 나쁘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아마 70대를 되게 잘 살 거예요. 하도 이렇게 미리 연습을 해놔서(웃음).” 좋지도 싫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그것들. 세상의 질서를 예수정은 가만히 바라보고 받아들이면서 느낀다.  


“나는 이제 관객이 편안하게 보여요.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너무 두려웠거든요. 관객 앞에 서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설혹 실수가 있다고 해도 오히려 관객들에게 용서받는 느낌을 더 크게 받는다고 할까. 항해하고 있는 한, 관객은 꼭 알아주는 것 같아요. 간혹 배 저어가다가 물에 빠져도 그들은 참 너그럽게 받아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이 덕분인지도 모르죠. 난 이제야 과정이 보이기 시작해요.”


예수정은 스스로 설득시키지 못한 연기는 차마 행위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스스로는 이 사실을 부끄러워도 한다. “꼭 아마추어 같잖아.” 그런데 실은 그렇게 마음이 움직여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미련한(?) 사람만이 주는 진정한 울림이 있다. 적어도 필자가 지켜보았던 지난 10년간의 배우 예수정은 무대에서 변함없이 그 울림을 관객에게 전하는 배우였고, 그녀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그녀의 작품을 신뢰했다. 드라마와 영화가 그녀에게는 연극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연극은 3달 동안 한 작품에 흠뻑 빠져 있잖아요. 연극 대본은 읽어도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해요. 드라마나 영화는 좀 다르죠. 물론 작품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깊이가 그렇게 깊기도 어렵고, 그렇게 읽어서도 안 되죠. 더군다나 나 같은 배우는 주인공도 아니니까 장면을 이해하기 위한 글로 읽어야지. 내 연기가 전체에서 기능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거지 드라마 대본에 사상의 여유까지 부릴 필요는 없죠. 그런 면에서 연극은 배역의 크기와 관계없이 배우들 모두가 작품에 한동안 젖게 되잖아요. 작품 속에 있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 같은 다른 장르를 찾아 읽는다던가 하면서 자신을 그 시간과 작품에 꾸준히 묻히는 시간이 있죠. 그래서 오히려 저는 그런 시간을 즐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말하면서 돌아보니, 난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또 다른 걸 발견한 것 하네. 예전에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는데, 난 요즘 퍽 그게 재밌거든요.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을 보게 된 것 같아요.”


상설전시를 시작하는 영상 앞에서는 오래된 <대망>이라는 역사소설을 떠올렸고,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냈다는 편지 앞에서는 박물관의 역할에 연신 감탄을 했다.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보면서는 요즘 마음을 두고 있는 종교 모임에서의 경험이 가만히 오버랩되었다.








“교회는 딱딱한 껍질만 만나게 해요. 그 안에 말랑말랑한 것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교회는 자꾸 껍질만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싶어. 나도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한동안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죠. 우연히 영국 목사님 설교를 받아서 하는 곳을 알게 되었는데, 영시 전공한 분이 작은 교회를 열어서 영국에서 감동받았던 설교 말씀을 번역해서 설명해주세요. 절 같은 교회죠. 새벽기도 같은 거 하자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면, ‘새벽에는 위험하니까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기도하면서 아이에게 밥 잘해줘라’ 하세요. 혼자 가만히 잘 있는 게 잘 믿는 거다, 하시죠. 그런 마음을 나누는 곳이에요.”


5월에 연극 <엘렉트라>를 끝낸 후에 한동안 유해진과 윤계상이 함께 출연하는 <말모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일제 시대에 한글을 없애려는 억압 속에서도 지하에 숨어서 한글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곧 들어가는 드라마는 채널A가 6년 만에 야심차게 내놓는 <열두밤>이다.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모티브로 6년에 걸쳐서 사랑을 나누며 성장하는 젊은이들의 작품인데, 예수정은 여기에서 전직 사진작가로 출연한다.

주목할 만한 차기작은 영화 <허스토리>다. 6월 27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작품에서 예수정은 김희애, 김해숙 등과 함께 위안부 할머니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 재판을 다룬 영화 <허스토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현지에서 23번 재판을 했는데 놀랍게도 1번의 승소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예수정은 박순녀 할머니를 모델로 한 박할머니를 맡았다. 박할머니는 일본군들이 뱃살 위에 장난으로 툭하면 칼질을 했던 것이 그대로 상처로 남은 것을 평생 낙인처럼 지니고 살아왔던 인물이다.


“나는 <하나코> 연극을 할 때에도 사실 위안부를 다룬 이야기가 썩 내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할머니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폐를 끼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건 너무 얕고 개인적인 생각이었어.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대의적인 일이었어요. 전쟁 때 특히 드러나는 폭력적인 남성 시각적 사회 속에서 ‘너희의 자궁’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자각시키려는 노력인 거예요. 여자란 그렇게 소모적으로 쓰이는 존재가 아니라 소중한 하나의 객체이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거죠. 뜨겁게 했어요. 연기한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닌 것 같아. 기자시사회에서 봤더니 다행히 내가 오버액션을 안 해서 할머니가 느껴졌어요.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을 가지고 이 할머니가 일본에 직접 가서 할 말을 했구나’가 느껴졌어요.”



실학박물관으로의 초대를 청하던 날, 예수정은 특유의 겸손한 웃음으로 ‘아, 영광이에요’라고 응대했다. 늘 보아왔듯 그녀 식의 정중한 태도와 답변이라고만 생각했다. 실학박물관 촬영과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실학박물관에서 보낸 시간을 어쩐지 어설프게 물었던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그녀에게 실학박물관에서의 2시간은 어땠을까.


“나는 ‘영광’이라는 말을 잘 안 써요. 그런데 실학박물관에 초대받은 건 진짜로 영광이었어요. 실제로 박물관을 오가는 길에 내내 그렇게 생각했어. 실학박물관은 특별한 곳이에요. 난 어릴 때부터 영조, 정조, 정약용 같은 분들을 우리나라 진짜 지식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그분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그런 곳을 갈 수 있었다니. 평생 그 생각을 그렇게 진득하게 해서 그랬나. 인생은 절대 그냥 안 지나가. 생각으로 바라던 것들은 어떻게든 만나게 하지. 내게도 이런 기회가 이렇게 올 줄이야. 이제 정말 나는 그분들의 책을 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더없이 가깝게 느껴져요. 난 이 기회가 너무 기쁘고 반가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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