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근대문화유산 답사] 너른 고을 광주시에서 근대문화유산을 찾기 힘들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분단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까지 격동의 시기를 보낸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 속에서 서울과 인접했던 경기도 또한 많은 근대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기천년 근대문화 유산답사'에서는 경기도에 있는 근대문화를 소개하고 경기도의 역사와 정체성, 문화유산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조선 시대 넓었던 광주에서 현재의 광주시가 되기까지


광주시(廣州市)는 경기도 중동부 지역이다. 광주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경안천은 용인시에서 광주시로 흘러와 퇴촌면과 팔당호로 연결된다. 동쪽으로 양평군, 여주시, 서쪽으로 성남시, 북서쪽은 하남시, 남쪽으로 용인시, 이천시, 북쪽으로 남양주시와 양평군에 접한다. 광주시의 북쪽은 팔당호가 있고, 남한강이 흐른다.


광주시(廣州市)는 조선 후기에 광주부(廣州府)와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된다. 정조 13년(1789년)에 24개의 면이 있었다. 1789년 송동면과 일용면이 수원이 되었고, 고종 32년(1895년)에 월곶면, 북방면, 성곶면은 안산군으로, 1914년은 의곡면, 완륜면을 수원으로, 초부면은 양주군이 된다. 1960년대는 행정구역의 변화가 컸다. 광주군도 크게 변한다. 1963년에 언주면, 중대면, 구천면 전체, 대왕면의 일부가 분리된다. 나중에 서울특별시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전체와 서초구 일부가 되는 곳이다. 1973년은 대왕면, 낙생면, 돌마면 전체와 단대리, 상대원리, 탄리, 수진리, 복정리, 창곡리가 성남시로 독립한다. 이후 1989년에는 동부면, 서부면, 중부면 상산곡리가 합쳐 하남시가 된다. 광주군이 분화만 된 것은 아니다. 남종면은 1914년에 양평군에서 광주군으로 옮겨온다.


조선 시대 광주는 수원, 안산, 서울특별시 강남 일대, 성남, 하남 등 한강 아래쪽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였으나, 지금은 3읍, 4면, 3개 동이 남았다. 경안천을 중심으로 5개의 저수시설이 있었다는 오포읍, 봄부터 가을까지 전 지역에 풀과 나무가 왕성하고, 달이 전 지역을 비추어 자연과 달이 어우러진다는 초월읍, 신립장군 묘와 곤지 바위가 있는 곤지암읍과 도척면, 퇴촌면, 곤지암읍, 남종면, 남한산성면의 5개 면, 경안동, 송정동, 광남동이다.


성남시로 나뉘는 과정을 보면 당시 국내 상황을 알 수 있다. 1960년대에 전국이 개발되고 산업이 발달하며 농업이 해체된다. 농민들은 서울로 모였으며, 많은 사람이 도시 빈민이 되어 판자촌이 생겨났다. 정부와 서울시는 서울 인근에 공장을 유치하고 상하수도 시설과 전기를 가설하여 사회기반 시설이 갖춰진 대단지를 만들려 했다. 서울 인구가 팽창하는 것을 막고 위성도시로 공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이다.


1968년 5월에 ‘중부면 성남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을 시작한다. 여기서 중부면은 광주군이다. 광주군 중부면은 허허벌판이었다. 그 이듬해 집도 지어지지 않은 광주대단지에 이주민이 옮겨와 천막촌을 만들어야 했다. 주민들에게 공장과 상가 등 일터를 약속했지만, 도로도 정비되지 않아 오가기 힘들 정도였다.


조급하게 개발하고 행정을 처리하던 시절에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를 강제로 차단하고 제한하려던 미숙한 처리였다. 신도시 개발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2~3년 이내에 신도시 조성을 마무리하고, 도시 개발이 덜 된 상황에서 강행한 강제 이주는 여러 문제가 발생했으며 반발이 거셌다.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이주민의 요구를 수용하고 광주 대단지를 성남시로 분리하는 소동이 있었다.



광주군의 중심이었던 경안리의 경안장과 우시장


경안장



조선 시대 후반에 광주는 큰 장이 많았다. 성내장, 경안장, 송파장, 사평장, 우천장 등등 10개의 장이 열렸다. 이 중에서 송파장이 가장 번성했으나 점차 약해진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생기고 도로가 나면서 물류를 이동하는 수단이 달라졌고, 1925년 홍수로 송파강이 큰 피해를 봐 한강의 흐름이 바뀐 것도 있다. 그 후 송파장이 열리던 송파강과 송파나가 메워진다. 지금은 송파강이 없어지고, 송파구 잠실동과 신천동에 걸쳐있는 석촌호수로 남았다.


송파장이 힘을 잃은 후 경안장이 그 뒤를 이어받는다. 경안장은 18세기부터 있던 장이다. 경안리는 경안천을 통해 북한강과 연결되어 육로, 수로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서해안의 소금과 해산물을 가져올 수 있으며,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특산물을 싣고 온 상인이 모여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3일과 8일에 열렸던 경안장은 1914년에 광주군청이 남한산성에서 경안리로 옮겨오고, 송파장을 흡수하여 더욱 번성한다.


광주시사(8)-사진과그림으로보는광주 p.64 광주우시장, 경화여자고등학교 건너편 소방서 인근1950년대 후반


아랫지방에서 소를 가져온 상인들이 모여 우시장도 생긴다. 경안우시장은 일제강점기 초반에도 있었으나, 커진 것은 한국전쟁 이후이다. 1960년대에 경안우시장이 좁아져 송정리의 하천 주변으로 우시장을 옮긴다. 이곳은 ‘우전께’로 불리기도 했다. 그 지명에 대한 유래를 찾기 힘들지만, 우시장이 있던 자리라 그렇게 불렀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주변에 도축장도 생겼으며, 상인들은 말이 쉬던 마방에 소를 맡기고 묵기도 했다. 우전께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였다. 경제발전은 우시장도 영향을 주었다. 이때부터 먹기 위한 소를 키웠다. 농사에 도움을 주는 소보다 먹는 소의 거래량이 많았다. 수원, 이천, 충주, 상주, 문경, 김천 등에서 소가 올라왔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우전께의 소 거래가 마장동 우시장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경안전통시장 2017년


그러나 농∙축산업이 기계를 사용하는 대규모 농장으로 발전하고, 광주의 마을은 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우전께는 급속하게 쇠락하던 중 1989년에 홍수 피해로 폐장하였다. 이제 우시장의 흔적은 없으며, 상가와 주택이 들어선 도시일 뿐이다. 한편 경안장도 쇠퇴하였으며, 자리를 옮긴 경안전통시장은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공존한다. 1990년대 대형마트가 생기며 상권이 위축되었으나, 2010년에 아케이드를 설치하고 최근에 공영주차장을 만들어 부흥을 꿈꾸는 중이다.



광주군의 근대산업 섬유업


광주의 산업은 농사에 관련된 양조장과 정미소, 곡식조합 등이 대부분이었다. 해방 즈음에 근대 산업이 시작된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실을 생산하던 광주직물공장이 경안리에 설립한다. 이 공장은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당하여 공장을 서울로 이전하였으나, 공장 일부를 광주에 남겼다. 실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던 영향으로 삼창직물과 태창직물 등 섬유공장이 광주에 들어선다. 1959년에 작성한 광주군 제조업 사업체 명단에는 섬유업체가 9개가 있다. 모두 광주면과 구천면에 있었으며, 6개 업체는 인견 직물을 생산하고, 나머지는 이불안감이나 천 기저귀에 쓰이는 소창직과 실을 뽑는 생사를 생산했다. 해방 직후에는 대부분 소창직을 생산하던 업체였으니 한 걸음 발전한 양상이다. 1960년대 초반에 섬유 공장들이 ‘바늘에 실을 빨리 꿰고 달리기’ 등 체육대회를 열어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경쟁력을 잃는다. 1970년대 후반은 직물업도 자동화되어, 소규모로 영세했던 광주의 섬유업이 약해진다.



광주시사(5)-근대화산업화도시화 태흥(삼창)직물공장 2009년


2010년 3월에 발간된 『광주시사(廣州市史) 제8권-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광주』에 삼청직물 공장과 창고 사진이 있다. 1960년대에 있던 삼청직물 공장 건물은 2009년 10월까지 남아있었다. 건물 형태나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큰 차이가 없다. 평 슬래브 지붕에 간단한 규모로 2층에 작업실이 있었다. 건축적으로 큰 의미를 따질 수는 없으나, 광주에서 성장했던 근대산업을 기록하는 자료이다.



광주시사(5)-근대화산업화도시화 태흥(삼창)직물공장 1960년


신익희 생가


해공 신익희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 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며, 독립운동, 건국, 민주정치, 민족 교육 등 수 많은 일을 하였다. 광주군에서 태어나 상해 임시정부에서 임시헌법의 토대를 만들고, 초대 대의원과 내무차관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제헌 국회의장이었다. 1956년에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통령에 출마한 정치가이다. 한편 국민대학(현재 국민대학교)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지낸 교육자이다.



신익희생가 바깥채 2017년


신익희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초월읍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이다. 집 뒤에 낮은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 경안천이 흐르는 배산임수 터이다. 원래 생가터는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이었다. 1865년 큰 홍수로 피해를 보고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안채와 바깥채가 ㄱ자형과 ㄴ자형이 비껴져, 동남쪽과 서남쪽으로 트인 ㅁ자형이다. 신익희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 외에도 건축적 가치도 높다. 조선 말기 경기지역의 소지주가 거주한 전통 한옥의 규모와 형식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바깥채가 파손되어 개축했으며. 2002년 12월에 안채에 불이 났다. 기존에 조사해둔 도면으로 원형에 맞춰 복원했다. 신익희 선생과 관련된 유적은 종로구 효자동에 해공 신익희가옥(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23호)과 강북구 수유동의 신익희 묘소(등록문화재 제530호)가 있다.



마무리


광주시는 농경사회에서 경공업 산업으로 넘어갈 때 다양한 업종이 광주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적응을 잘 했다. 그러나 팔당댐이 건설되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1970년대 후반에 중공업 산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체기를 맞기도 했다.


모든 도시는 생겨나서 발전하며 부흥하고 쇠퇴기를 거친다. 그리고 다시 재도약한다. 너른 고을 광주에서 근대문화유산을 찾는 일은 쉽지 않지만, 경안장터와 우시장, 섬유업 등의 옛 유산에서 파생된 흔적은 남아있다. 광주시는 수많은 자연재해를 이겨냈고, 산업의 바뀌는 사회에 적응하며 발전하였듯이, 역사가 살아있는 도시로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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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 경기천년 근대문화유산 답사

    • 글, 사진/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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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 경기문화예술의 모든 것,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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