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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고려전기 경기의 설치와 그 의미 ⑤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전기 경기의 설치와 그 의미


신은제 | 동아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성종 14년 赤·畿縣의 설치

  Ⅲ. 현종 9년 京畿의 설치

  Ⅳ. 문종대 경기제의 변화

  Ⅴ. 맺음말


Ⅴ. 맺음말


고려가 건국한 뒤 태조 왕건은 자신의 세거지인 송악과 인근의 개성현을 통합해 개주를 설치하였다. 호족들을 한편으로는 제압하고 한편으로는 통합하여 고려를 건국한 태조로서는 고려 전역에 대한 체계적 통제를 실현하기 어려웠고 그것은 뒷날을 기약해야 했다. 고려시대 지방을 본격적으로 제어하기 시작한 시기는 성종대 부터였다. 성종은 이전시기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온 양전과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置邑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고 그 결과 성종 14년 일련의 제도개혁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이 제도 개혁과정에서 성종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개경을 6개의 적현과 7개의 기현으로 구분한 뒤 개성부로 하여금 관할하도록 했다. 성종대 적·기현제는 한편으로는 전국적으로 籍의 작성이 완료된 시기에 이루어 진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란의 위협이라는 상황에서 군사적 성격의 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종대 마련된 적·기현제는 현종 9년 京과 畿를 구분한 경기제로 변화한다. 현종 9년 경내와 기를 구분하여 경은 5부로 구획하고 기는 12개 현을 나누고 개성현이 주현으로 3개의 속현을 관할하고 장단현이 주현으로 7개의 속현을 관할하였다. 이러한 체계는 현종 9년 완비된 주현-속현체계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현종대 경기제의 확립에서 보다 중요한 사항은 경내와 기가 구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의 복구가 필요했고 특히 송악성과 나성을 축조하여 공간적으로 京內와 京外가 구분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제도 개혁이었다.


경기는 문종대 다시 한 번 변화를 맞는다. 비록 그 변화에 대해서 연구자들 사이에 논란은 있지만, 문종대 양전, 전품규정, 전시과의 분급과 더불어 개경 인근 지역에 대한 일정한 재편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고문헌>


1.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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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三峯集』

『동국이상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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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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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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