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연구원

고려시대 강화의 유적과 공간 ④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시대 강화의 유적과 공간


이희인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강화의 위상과 유적

  Ⅲ. 도읍의 공간

  Ⅳ. 군현의 공간

  Ⅴ. 맺음말


Ⅲ. 도읍의 공간


강화도성은 강화현(군)의 치소 지역에 건설되었다. 1232년 7월 7일 강화에 도착한 고종이 강화 客館을 처소로 삼았다는 기록이 이를 시사한다.1*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이 일대에는 강도 都城이 남아있고 안팎으로 강도시기 고급 건물지가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강도의 공간 구조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도읍의 핵심 공간인 본궐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다. 도성의 주요 구성 요소인 별궁과 관아, 성곽, 태묘의 배치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사실상 왕릉을 제외하고 강도 핵심 시설의 위치와 배치에 대해서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문헌과 고고자료 모두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읍의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궐의 위치가 가장 중요하며, 강도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1. 본궐의 위치


강도의 본궐터는 그동안 ‘고려궁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고려궁지’에 대한 여러 차례 조사에서 고려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2* ‘고려궁지= 본궐터’의 공식은 근거를 잃었다. 최근 강화 관청리 일대에서 조사된 유적과 지형 등을 토대로 강도 본궐은 ‘고려궁지’ 서남쪽의 궁골 일대에 자리했다는 견해가 제시되면서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었다.3* 그러나 본궐이 견자산 북쪽에 있었다는 반론도 여전히 존재한다.4* 이는 문헌과 고고자료의 불일치와 그에 따른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삽도1. 간척이전 강화읍 일대 지형 /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17


강도의 본궐의 입지는 먼저 지형 조건을 통해 범위를 좁혀 볼 수 있다. 도성이 자리했던 강화읍 일대의 최근 간척이전 해안선 분석 결과 천도 이전에는 강화산성 남문과 견자산(정자산) 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파악된다.(삽도 1)5* 도읍의 동쪽 지역은 견자산에서 동쪽 갑곶까지 길게 뻗어 있는 구릉과 평지의 북쪽과 남쪽의 갯골을 따라 해수의 영향을 받았다.6* 따라서 현존하는 도성을 기준으로 볼 때 강도의 중심지는 관청리와 신문리, 남산리 일대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강도의 본궐은 북산(송악산) 남쪽 자락에 해당하는 관청리 일대에 자리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강도 건설의 기준이었던 개경의 본궐이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확인된 관청리 일대 유적군 모두 본궐터의 후보가 될 수 있다. 관청리 일대 유적군은 유적마다 조사 면적이 넓지 않아 현재로서 구체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만 유구와 출토유물로 보아 강도에 조성된 궁궐이나 관아, 사원, 저택 등 권위 건축물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관청리 유적군 가운데 강도 본궐과 관련한 유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관청리 657번지 유적이다. ‘고려궁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18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이 유적에서는 조선시대 유구와 함께 3기의 고려 건축물이 확인되었다. 이 중 1호 건축물은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주간 거리 3m 내외의 회랑 건축물로 추정된다. 1호 건축물 북쪽에는 3호 건축물 일부가, 남쪽에는 2호 건축물 일부가 연결되어 있는데 3개의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양상이다.7* 그런데 최근 유적 남쪽 687-1번지에서 657번지 유적에서 조사된 회랑과 동일한 축선으로 이어지는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8* 각 지점의 유구를 합쳐 보면 남북 방향으로 길이 약 60m의 회랑이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9* 궁궐이나 관청, 사원 등 귄위 건축물에서 주로 확인되는 회랑 건축물의 존재는 이 일대가 강도의 중심 공간 가운데 하나였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4∼500m 떨어진 강화군청 주변에서 2개의 유적이 조사되었다. 관청리 163번지 유적(강화군청 별관부지)에서는 건물지 2기와 석축이 확인되었고10* 145번지 유적(노외주차장부지)에서는 기단과 축대, 배수로, 보도 시설이 조사되었다.11* 강화군청 주변 유적군도 막새와 명문기와, 고급 청자가 출토되어 높은 위계의 건물 흔적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좀 더 범위를 좁혀 보면 관청리 657번지와 687-1번지 유적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본궐과 관련된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60m에 이르는 대형 회랑의 존재가 무엇보다 특징적이며, 지형 상으로 강화군청 일대 보다 본궐의 입지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삽도2. 강화읍 일대 지형과 유적 분포 / 이희인,2016


강도의 중심이 자리했던 현재 강화읍 도심지는 북산과(송악산) 남산(화산), 견자산(정자산)이 둘러싼 작은 분지 지형이다. 이곳은 북산에서 뻗어 나온 작은 능선을 기준으로 동서 구역으로 나뉜다.(삽도 2) 능선 서쪽은 동쪽에 비해 넓고 완만한 구릉과 평탄지가 펼쳐져 있지만 강화군청 일대는 서쪽의 작은 능선과 동쪽의 견자산 그리고 북산 자락이 에워싸면서 능선 서쪽 구역이 비해 면적이 좁고 경사도가 있다. 657번지와 687-1번지 유적과 강화군청 주변 유적군과의 직선거리는 약 4∼500m 정도지만 지형상으로는 능선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 반면 657번지와 687-1번지 유적 일대는 북산 방향으로 완만하게 경사가 시작되는 부분으로 북쪽 구릉 지역(궁골)를 포함하면 개경 만월대의 입지와 유사하다.


특히 이 일대의 水系 검토 결과 2개의 小하천이 궁골 일대를 감싸 안아 흐르다가 강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東洛川(현재 복개)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파악된다.12* 이는 개경 만월대 주변 하천이 沙川과 합쳐지는 양상과 흡사하다. 이와 관련하여 657번지 일대 동남쪽에 위치하는 관청리 405번지 유적(용흥궁 주차장 부지)이 주목된다. 이 곳은 오랫동안 물이 차 있었던 연못 자리로 파악되는데 이는 개경 본궐 동쪽에 있던 東池와 같은 기능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3* 이렇게 보면 강도가 개경을 모방해 건설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도의 본궐은 관청리 405번지 유적 서쪽에 자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한편 강도 본궐터의 후보지로 견자산과 북산 사이, 즉 강화중학교 일대가 지목되기도 한다.14* 이곳을 궁궐터로 보는 근거는 『고려사』에 전하는 강도 화재 기사에 등장하는 延慶宮이다. 1245년(고종 32) 견자산 북리 민가 800여 호 화재로 연경궁과 법왕사, 어장고, 대상부, 수양도감 등이 함께 연소되었는데15* 여기서 연경궁을 본궐의 오기라고 보는 것이다. 연경궁은 개경의 별궁 가운데 하나지만 본궐의 착오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며 개경 법왕사는 궁궐 동쪽 황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견자산 북리에 있는 연경궁이 본궐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도에서는 화재 이후 법왕사는 복구되지만 연경궁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볼 때 화재로 소실된 연경궁은 본궐이 아니라 실제로 별궁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16* 물론 견자산 일대는 강도시기 최우의 진양부가 있었던 곳으로 강도의 중심 공간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17* 게다가 조선 후기 견자산 바깥을 ‘고려 궁궐의 옛터[麗宮故址]’로 인식하기도 했던 것을 감안하면18* 현재로서 본궐의 입지로서 가능성을 전혀 배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관청리 일대 유적의 양상과 지형, 水系의 검토 결과 등을 고려했을 때 강도의 본궐터는 견자산 주변보다는 657번지 유적과 687-1번지 유적이 확인된 ‘고려궁지’ 서남쪽 일대로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보다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1. 윤용혁, 앞의 글, 15쪽.

2. 한림대박물관, 2003, 『조선궁전지 발굴조사 보고서』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11, 『강화 조선 궁전지Ⅱ』

3. 이희인, 2013, 「고려 강도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2016, 앞의 책.이상준, 2014, 「고려 강도궁궐의 위치와 범위 검

   토」 ,『문화재』제47-3호, 국립문화재연구소.

4. 김창현, 2016, 「고려시대 강화도읍 궁궐」, 『고려강도의 공간구조와 고고유적』, 인천시립박물관·강화고려역사재단 공동학술회의.

5.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17, 『강화 고려도성의 자연지리학적 연구』, 42∼44쪽.

6. 이희인, 앞의 책, 178쪽.

7. 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11, 『강화 성광교회∼동문간 도시계획도로 개설공사구간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8. 한성문화재연구원, 2017, 『강화 관청리 도시계획도로 개설공사 부지내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9. 김병희, 2018, 「강화도성의 구조와 성격」, 『고고학으로 본 한국중세사회Ⅱ- 고려성곽』, 한국중세고고학회, 25쪽.

10. 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15, 『강화 관청리 163번지 유적』

11. 계림문화재연구원, 2014, 『강화읍 관청리 145번지 유적』

12. 이상준, 앞의 글, 114쪽.

13. 이상준, 앞의 글, 120∼122쪽.

14. 김창현, 2016, 앞의 글.

15. 『高麗史』 卷53, 志 7, 五行 1, 火.

16. 정학수, 2017, 「강도시기 궁성(본궐)의 위치와 구조」, 『강화 고려도성 기초학술 연구』 1,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150쪽.

17. 『高麗史』 卷129, 列傳42, 叛逆, 崔沆.

18. 『輿地圖書』 江都府志, 古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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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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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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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경기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