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토크토크] 온전하게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

2018.09.01-2018.12.31 / 배우 서이숙


학박물관에서는 지난 8월 1일부터 특별기획전 <열하일기, 박지원이 본 세상>이 시작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소재로 한 이 기획전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전시로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형 전시다. 기획전의 주제가 박지원과 관련되면서부터 실학박물관으로 초대할 특별손님으로 배우 서이숙이 물망에 올랐다.


배우 서이숙과 박지원은 10여 년 전 인연이다. 서이숙은 극단 미추의 <열하일기만보>에서 박지원 역으로 무대에 섰던 적이 있다. 당시 <열하일기만보>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원작으로 정치, 철학을 풍자한 우화극이었고, 박지원은 나귀로 환생한 우화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우화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성별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당시 서이숙은 꽤 적절한 캐스팅이었다. 담담하고 무게감 있는 남성적 캐릭터를 소화해낼 수 있는 여배우도 흔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우화적 인물의 연극성을 잘 살려낸 서이숙의 연기는 훌륭했다. 동아연극상(2004)과 김동훈 연기상(2011)이란 이력이 말해주듯 서이숙의 밀도 있는 연기는 이미 여러 면에서 공인받은 바 있다.







중성적 성향의 이미지란 것은 배우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좋은 장점이 될 수 있다. 성별의 한계까지도 뛰어넘어 어떤 역할도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악 전공인 것은 배우 평생 좋은 지지대로서의 역할을 했다. 자유자재로 객석을 쥐락펴락하는 소리꾼의 무대에서 우리는 국악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연극성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미추 극단의 대표 작품이 마당놀이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미추 극단에서 서이숙은 조금씩 서서히 부각되었고, 마침내는 극단의 중심적인 배우로 자리매김을 했다. 정확한 발음과 적당한 톤, 적절한 연극성을 고루 갖춘 중성적 이미지의 배우 서이숙을 ‘기대되는 연극인’(2003)으로 주목했던 평론가 구히서는 그녀를 “발음, 감성, 인물을 보는 태도가 모두 정직하고 성실한 배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태도의 정직함과 성실함’이라는 자질은 과연 배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정직과 성실함을 조금만 비딱하게 보자면 그것의 본질은 지나친 도덕성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규범화된 조직과 사회에서 요구되는 정직과 성실은 ‘도덕성’이라는 양의 탈을 쓰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탈’로부터 과연 배우가 온전한 배우로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








‘정직하고 성실한’ 서이숙의 이면은 이상할정도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밥도 먹어보고, 차도 마셔보고, 장소도 옮겨보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꺼내 봐도 그녀에게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된 책 한 권을 이야기했다가 그녀를 알았다.

   인터뷰 주제와는 상관없이 흘러간 어떤 곁 이야기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소설책이었을 뿐이다. 베스트셀러라고 강조는 했지만, 꼭 읽어보라는 당부에 끄적끄적 노트하던 그녀가 당시에는 오히려 신선하게 보였다. 당연히 예의 차원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녀가 이튿날 문자를 보냈다. ‘소설책 대여 완료’ 실천력이나 추진력 하나는 최고다, 싶었는데 그 다음날 한 번 더 문자가 왔다. ‘역시 xxx(소설가 이름)!! 에이.... 눈물났네’ 참 오랜만에 마음 있는 곳에 자신의 생각과 몸이 함께 있는 사람을 본 듯 했다. 온전하게 지금의 순간에 서 있는 사람, 서이숙은 그런 사람이다.

박지원을 닮은 듯 아닌 듯 서이숙은 전시장 내부를 거침없이(?) 배회했다. 여기저기 유리곽에 기대서 한참동안 글자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떠들며 이야기하기도 하고, 별자리 전시공간에서는 아예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녀의 생각이란 참. 유리곽 안에 얌전하게 모셔놓은 책들은 제목만 허겁지겁 읽을 것이 아니라 한 줄이라도 정성껏 직접 읽어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전시장이란 게 힘들면 주저앉아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맛도 있어야 하는 것이고, 엉뚱하게 천정에 별자리를 만들어놨으니 서서 고개 들어 올려다보기보다는 누워서 편안히 보아야 더 잘 보인다. 그래, 서이숙이 맞다.





“침묵하고 수용하고 복종하던 시절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나이가 든 탓인가. 나는 이제 더는 ‘알겠다’ ‘하겠다’ 만은 하지 않으려고요. 오십이 되니까 정말 하고 싶은 것만을 하고 싶어졌거든요.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진짜 가만히 있어요. 정말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안하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좇기 듯이 뭔가를 하는 게, 그게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서.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녀가 안하려고 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무엇일 것이다.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먼 데서부터 힘들게 끌어올린 용기도 필요하지만, 고요한 평정심도 함께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쓰고도 휘청거리지 않는다. 상대를 가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대면을 위한 용기이기 때문에 그것은 힘의 세기보다 마음의 기울기가 중요하다. 그녀가 문득, 고요함 속에서 머무는 까닭이다.



새로운 것에 부산스럽지 않은 호기심으로 다가서고, 다른 것의 차이를 허용하려는 품 넓은 사고와 자세는 300년 전 한국의 실학자들이 취하고자 했던 태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도 실학자로 분류할만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그녀는 촬영 내내 <여성, 실학과 통하다>(실학박물관 발행, 2017)를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놀러오라고 해서 그냥 쓰윽 집에 있던 차림새로 올 줄 알았죠? 내가 요 앞에서 차 세우고 옷을 다 갈아입고 온 거라니깐. 내가 딱하면 떡 하니 준비하는, 좀 준비된 배우란 말이죠. 헷. 요즘 공부에 푹 빠져 사시는 정동환 선생님 정도는 아니어도 나도 뭐, 실학박물관 오니까 여기 되게 신기하고 좋네.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네요, 글쎄. 여자도 실학적인 생각을 했다니, 이 책도 되게 새롭네. 나 공부 좋아하는 사람 아닌데 이걸 안 볼 수가 없네, 없어. 사진도 엄청 찍었는데, 나 이거 한 권만 주세요. 이것 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또 언제 올까, 뒷전에 슬쩍 내려놓고 간 말이 고맙고 반갑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운 여름날, 실학박물관에게 기분 좋은 추억을 남겨준 그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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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숙 @김수미 @조연성

    • 실학박물관/ 뉴스레터86호

      스페셜 토크토크/ 배우 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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