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개성에 남아있는 고려 문화유산 (1)

개성과 고려 & 만월대와 왕릉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이광표 (동아일보 논설위원)



1. 개성과 고려


서울에서 약 80km, 승용차로 불과 한 시간.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나서면 바로 거기 북한 땅 개성(開城)이 나온다. 개성은 고려 건국 이듬해인 919년 수도가 된 이래 강화로 수도를 옮겼던 기간(1232~1270년)을 제외하고 44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때 개성의 이름은 개경(開京)이었다.


고려 수도 개성은 상당히 번창한 도시였다. 비 오는 날 개성에서 서쪽의 예성강까지 처마 밑으로 비를 맞지 않고도 갈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올 정도였다. 고려 때 예성강 하류에는 벽란도(碧瀾渡)라는 국제무역항이 있었다. 고려와 무역을 하기 위해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벽란도항에 드나들었을 만큼 벽란도는 크게 번창했다. 우리나라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 같은 이야기들은 고려의 경제가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 년 전 그 때의 영화(榮華)는 보이지 않고 지금은 분단의 아픔이 쓸쓸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개성이 고려의 수도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려의 흔적은 개성 도처에 여전히 남아 있다. 고려의 왕궁이었던 만월대, 온갖 시련 속에서도 수도를 지켜냈던 나성,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무덤, 애틋한 사랑으로 널리 알려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무덤, 불교국가 고려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영통사와 같은 사찰, 고려 탑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불일사 5층 석탑과 현화사 7층 석탑, 고려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고려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비극적으로 살해당한 선죽교, 독특한 모습으로 승탑의 파격적인 미락을 구현한 화장사 지공선사 승탑, 하늘의 천문을 관측했던 고려 첨성대 등등.


역사적·문화적 중요성에 힘입어 개성의 역사유적지구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개성 역사유적지구엔 고려와 조선의 문화유적인 개성 성곽(고려 말~조선 초), 개성 남문(조선), 만월대, 첨성대, 성균관, 숭양서원(조선), 선죽교, 표충비(조선), 왕건릉, 7왕릉, 명릉, 공민왕릉의 12개 개별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유적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이 고려의 유적·유물들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개성이 고려 역사문화의 보고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모습


북한 땅 개성은 남북 갈등과 남북 화해의 현장이다. 분단의 상흔이고 또한 통일과 희망의 상징이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과 공동선언 이후 2004년 개성공단을 가동했고 2007년 12월엔 개성 관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008년 11월 개성관광이 중단되고 2016년 2월엔 개성 공단이 폐쇄되었다. 남과 북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만월대를 공동 발굴했다. 만월대 터 가운데 서쪽 지역에 대한 발굴을 진행해 수많은 건물의 흔적과 유물을 발굴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2015년엔 고려시대 금속활자 한 점을 발굴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후 남북공동발굴은 2016년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중단된 채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의 성과를 토대로 우리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때 남북공동 발굴 특별전 <하나된 고려, 하나되는 남과 북-고려황궁 개성 만월대>를 개최하기도 했다. 2018년엔 특히 남북 화해 분위기와 남북정상의 판문점 선언에 따라 개성에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개성이 다시 평화와 화해의 공간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만월대 공동발굴 재개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고려 수도 개성은 우리에게 매우 각별한 곳이다. 개성의 고려 문화유산은 통일시대 경기의 소중한 역사문화의 당당한 한 축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개성의 고려 문화유산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이다.



2. 오백년 도읍지, 고려왕궁 만월대


1928년 서울 단성사(團成社)에서 신파극단 취성좌(聚星座)의 공연이 열렸다. 여배우 이애리수가 막간을 이용해 무대에 등장해 새로 나온 가요를 불렀다. 곡조는 구슬펐고 가사는 애잔했다. 신곡 「황성옛터」였다. 노래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황성옛터」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져요.’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의 달 밝은 밤, 그 영화(榮華)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역사의 무상함만 짙게 내려앉았다. 이 쓸쓸한 가사가 애수 어린 곡조와 함께 식민지 시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과 맞물리면서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이다. 1932년엔 레코드로 발표됐고 무려 5만 장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레코드에 적혀 있는 공식 이름은 「황성(荒城)의 적(跡)」이었다.




만월대 터 전경


개성에 남아 있는 고려의 흔적 가운데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역시 고려왕궁 만월대(滿月臺)의 터다. 만월대는 송악산을 북쪽에 배경으로 두고 남쪽의 구릉 지대에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흙을 높이 돋운 뒤 건물들을 세웠다. 송악산 자락의 지기(地氣)를 훼손하지 않고 동시에 건물을 높은 곳에 배치함으로써 고려왕조와 왕궁의 위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만월대는 동서 길이 373m, 남북 길이 725m, 둘레 2170m에 이르며 북한 국보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월대라는 명칭은 당초에는 높은 축대를 쌓고 지은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의 앞뜰을 가리켰는데, 훗날 궁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때인 1530년에 펴낸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 등장한다. 만월대라는 명칭도 처음부터 만월대였던 건 아니었다. 왕궁 안에 망월대(望月臺)라고 하는 누각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그 망월대의 이름을 따 망월대 망월대 부르다가 만월대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만월대 모형 / 고려역사박물관 소장


만월대는 개성에 있는 여러 궁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법궁(法宮) 역할을 했다. 만월대는 외곽의 황성과 내부의 궁성으로 이루어졌다. 궁성 권역은 크게 정전인 회경전 중심의 외전 일곽과 장화전(長和殿) 중심의 내전 일곽, 서북쪽의 침전 일곽으로 이뤄져 있었다. 건축물을 남북 중심축을 따라 일직선으로 배치하지 않고 지형에 따라 축을 다르게 하여 자유롭게 배치했다. 만월대의 건물 배치는 고구려 왕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고구려를 계승하려 했던 고려의 정신을 왕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궁성을 보면, 남문인 승평문(昇平門)을 들어서면 구정(毬庭, 격구 경기를 하는 넓은 마당)이 나오고 구정을 지나면 다시 신봉문(神鳳門)이 나온다. 신봉문과 이어 창합문(閶閤門)을 지나면 궁궐의 중심 전각인 회경전(會慶殿)이 나온다. 회경전은 33단으로 된 4개의 돌계단 위에 꾸며져 있었다.


회경전은 만월대의 정전이다. 회경(會慶)이라는 한자 의미에 걸맞게 고려의 정치 의례와 같은 주요 의전을 거행했던 공간이다. 특히 기우제와 같은 국가 행사, 중국 사진의 접대 등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을 치렀다. 그러나 현재 회경전의 건물이 단층(單層)이었을지 중층(重層)이었을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다 아직까지 그 구조를 밝혀줄 만한 결정적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경전 서쪽에는 임금과 신하가 조회를 하는 건덕전(乾德殿), 임금의 집무 공간인 선정전(宣政殿), 임금이 기거하는 중광전(重光殿) 등이 모여 있었다. 이 서쪽 구역이 바로 남과 북의 역사학계가 7차례에 걸쳐 공동발굴을 진행했던 곳이다.


만월대는 원래 후삼국의 하나인 태봉국(후고구려)의 왕궁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태조 왕건이 고려 건국 이듬해인 919년에 고치고 확장해 지은 것이다. 그 후 1232년 몽골 원나라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던 39년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고려의 왕궁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현종 때 거란의 침임, 인종 때 이자겸의 난, 고종 때 몽골 침입 등으로 인해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며 시련을 견뎌냈다. 하지만 1361년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와 만월대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고 폐허로 변해 버렸다. 지금의 만월대의 폐허는 그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만월대의 웅장했던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빈 터와 함께 주춧돌, 계단들만 남았다. 폐허가 된 만월대 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궁궐의 중심 건물인 회경전에 오르는 33계단의 장대함이다. 쓸쓸함과 웅장함이 교차하는 그 모습 속에 고려왕조 오백 년의 영욕(榮辱)이 고스란히 교차한다. 북한은 현재 개성의 고려역사박물관에 만월대의 모형을 전시해 놓았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만월대가 크게 훼손되자 공민왕 후반부터 고려 왕들은 수창궁(壽昌宮)에서 집무를 보았다. 만월대가 법궁이었다면 수창궁은 여러 이궁(離宮) 가운데 하나였다. 수창궁은 조선의 태조가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창궁의 건물도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이곳에 학생소년궁전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 있던 용머리 조각은 만월대 회경전 앞 용머리 조각과 함께 개성 성균관 대성전 뜰에 옮겨 놓았다.



3. 고려의 꿈이 묻힌 곳, 왕릉


1) 태조 왕건릉



태조 왕건릉



개성시를 중심으로 판문군과 개풍군 일대에는 고려 왕과 왕비, 왕족들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다. 17개의 고려 왕릉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모두 정확하게 조사 연구되지는 않았다. 개성의 왕릉이나 왕족의 무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무덤이다.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왕건릉 현릉(顯陵)은 고려의 태조 왕건과 신혜왕후 류씨(神惠王后 柳氏)를 함께 묻은 합장릉으로, 현재 북한 국보 제 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덤의 높이는 6.26.m, 지름은 11.56m이다.


왕건릉은 943년 조성되었지만 이후 고려시대에 네 차례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거란 침입과 강화 천도 때 이장(移葬)과 환장(還葬)을 거듭하다 충렬왕 때인 1276년에 지금의 위치에 제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려를 건국한 왕이었기에 전란이 있을 때마다 역대 왕들은 태조 왕건의 재궁(梓宮,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관)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능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1906년엔 도굴을 당하기도 했으며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954년에 복구했다. 북한은 1992년 태조 왕건릉을 발굴 조사했고 이후 무덤과 그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발굴 조사 당시 무덤에서는 등신(等身) 청동상이 나왔는데 대체로 태조 왕건상으로 추정한다. 또한 무덤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벽에는 매화나무·참대·청룡(靑龍)이, 서벽에는 소나무·매화나무·백호(白虎)가, 북벽에는 현무(玄武)가, 천장에는 8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2) 공민왕릉



공민왕릉


태조 왕건릉에서 서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봉명산 기슭에 공민왕릉이 있다. 공민왕의 무덤은 2개의 봉분으로 이뤄져 있다. 공민왕이 묻혀 있는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데, 이 둘을 포함해 일반적으로 공민왕릉이라 부른다. 고려 왕릉에서 이렇게 왕의 무덤과 왕비의 무덤이 바로 옆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경우는 공민왕릉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공민왕릉은 고려 말기의 왕릉 제도를 완성하고 나아가 조선 왕릉 제도의 토대는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에게 알려진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 봉분 하나의 높이는 약 8m, 지름은 약 13m이다.


1365년 공민왕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그 무덤을 직접 만들었다. 1372년엔 자신의 사후에 대비해 무덤을 미리 만들었고 1374년 신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그곳에 묻혔다. 공민왕은 자신의 무덤의 석실과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의 석실에 구멍을 뚫어 두 무덤을 연결시켰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혼이 이 구멍을 통해 서로 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죽어서도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하고 싶었던 공민왕의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 왕릉이다.


공민왕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은 대부분 돌로 석실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뒤 흙으로 봉분을 쌓은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다. 태조 왕건릉과 공민왕릉처럼 내부에 벽화를 그려놓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석실 내부 벽화는 공민왕릉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공민왕릉인 현릉의 석실 내부엔 동벽, 서벽, 북벽과 천장에 벽화를 그려 놓았다. 12지상이 한쪽 벽에 4구씩 그려져 있고 천장에 북두칠성과 해와 달 등이 그려져 있다. 12지상은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오색구름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이다. 손으로 홀을 들고 있으며 동물이 그려진 모자를 쓰고 있다. 이 12지상을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벽화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56년 공민왕릉 내부를 수리할 때였다.



공민왕릉 내부 벽화



공민왕릉은 일제강점기인 1905년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1920년에 일부 수리 공사를 진행했고 1956년 다시 수리 및 내부조사를 실시했다. 공민왕릉은 규모나 내부 벽화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 등으로 보아 고려 왕릉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는다.



2018년 9월 19일에 진행된 <경기문화유산학교> 3강 강연 모습





세부정보

  •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 2018. 8. 13

    기획/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편집/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참여자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
경기 문화예술의 모든 것, 경기문화재단
누리집
http://www.ggcf.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