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중국의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 똥거름에 있노라

문학-고전-산문 분야 『열하일기』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17






중국의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 똥거름에 있노라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이 중국 북경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이다. 연행록(燕行錄)이라고 불린 조선시대 중국 기행문은 많다. 줄잡아 500편이 넘는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이 모든 연행록을 뛰어넘는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특유의 호기심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본 미지의 세계와 선진 문물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려니와 천하대세에 대한 전망과 세계에 대한 비전까지 날카롭고 풍자적이면서 경쾌한 필치로 담아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역사, 문학, 음악, 풍속, 종교, 예술, 당대의 과학 기술과 우주론에 이르는 연암의 식견은 넓고 깊다. 책에 묘사되거나 창조된 다양한 인간 유형과 인물 형상의 모습은 웬만한 문학 작품을 뛰어넘는다.


연암은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중국에 다녀왔다. 8촌 형인 사절 단장 박명원을 따라 공적인 소임 없이 다녀온 이 여행에서 연암은 압록강 너머에서 북경에 이르는 중국 동북 지방과 북경 그리고 조선 사람에게는 전인미답이었던 열하지방을 견문했다. 중국을 여행하고 책을 집필할 당시 연암의 나이는 44세였다. 학문과 문장이 당대를 대표할 만큼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집권층인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음에도 노론의 체제 논리를 따르지 않고 벼슬을 포기했던 그는 농·공·상의 연구를 통한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철학을 지닌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부였다. 서구 세계가 동아시아로 지배력을 확장해가는 상황에서 세계를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통로 또한 중국일 수밖에 없었다. 변방에서 세계를 보던 연암에게 천하대세를 전망하고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중심을 직접 호흡하고 체험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한 연암의 무기는 붓 한 자루였다. 붓 한 자루 들고 일행에 앞서 달리며 머무르는 곳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만나는 사람마다 필담을 나누었다. 장복과 창대라는 두 시종을 거느리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연암을 산초 판사와 함께 풍차에 달려드는 돈키호테에 비유하는 연구자도 있다. 용감하다는 점에서 연암은 돈키호테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행장과 언행의 모든 면에서 정반대에 가깝다. 돈키호테가 시대를 역행했다면 연암은 시대를 앞서갔고 돈키호테의 창이 녹슬고 무디었다면 연암의 필봉은 유려하면서도 예리했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던 만큼 그는 선후배의 연행록을 읽고 “그곳의 대학자를 만날 경우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를 고심하며 여행을 준비했다.


3권으로 나누어 번역된 『열하일기』의 번역본 제1권은 압록강을 건너 책문을 통과하고 요양에 이르는 「도강록(渡江錄)」에서 시작한다. 이어 심양(瀋陽)의 이모저모를 적은 「성경잡지(盛京雜識)」, 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인 「일신수필(馹迅隨筆)」,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기행록인 「관내정사(關內程史)」, 북경에서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를 향해 가는 이야기를 적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으로 이어진다. 저 유명한 「호질(虎叱)」은 「관내정사」에 포함돼 있다. 열하의 숙소인 태학관에 머물던 이야기를 적은 「태학유숙록(太學留宿錄)」에서 시작해 「산장잡기(山莊雜記)」로 끝나는 2권은 열하에서 만난 지식인들과의 이야기와 기행문으로 구성돼 있다. 하룻밤에 강물을 아홉 번 건넌 이야기로 유명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산장잡기」에 담긴 수필이다. 3권은 장성 밖 중국을 여행하며 들은 신기한 이야기들 모음인 「구외이문(九外異聞)」과 북경의 이곳저곳을 기행한 뒤 적은 「황도기략(黃圖記略)」이 핵심이다.


기행문은 조선 선비가 쓴 책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이는 경쾌하고 해학적인 필치와 어느 한 장르에 묶이지 않는 다양한 구성 그리고 200여 년 전 연암이 보고 듣고 겪은 세계에 대한 생생한 정보 덕이다. “생김새가 사뭇 다르고 옷차림이 다른 사방의 외국인들, 칼과 불을 입으로 삼키는 요술쟁이들, 라마교 불교인 황교(黃敎)와 그 승려 반선(班禪), 난쟁이들 등 『열하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비록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중략) 진기한 새나 짐승, 아름답고 특이한 나무에 대해서도 그 생긴 모습과 특징을 완벽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책의 머리말을 대신한 유득공의 서문은 과장이 아니다. 중국 최고 통치자인 황제와 고위관료, 종교 지도자에서 장사치와 서민대중,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인물들의 언행과 양태를 묘사해내는 솜씨도 빼어나다. 이를 통해 청나라의 통치 현실과 민심의 향배를 비판적으로 통찰하며 천하의 변화 추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연암은 사상가이자 학자,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뿐 아니라 진솔하고 구김살 없는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캐릭터 또한 창조해낸다. 책에 쓰인 문체가 연암체라는 이름을 얻고, 이를 금기시하는 정조의 문체반정에도 불구하고 당대와 후대 지식인들에게 유행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의 저류를 관통하는 것은 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배우자는 북학(北學) 사상이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를 받들고 청나라를 적대시하는 존명반청(尊明反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허황된 북벌(北伐)을 주장하며 지배층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청나라 사람을 되놈이라며 멸시했다. 그러나 연암은 책문을 넘어서자마자 두드러지는 중국의 풍요와 앞선 문물, 제도 그리고 힘을 직시했다. 난방 장치에서 성곽과 건물에 사용한 벽돌,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 등을 유심히 관찰하며 낙후한 조선의 문물과 만성적인 빈곤을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암의 이용후생 정신은 중국의 장관이 성곽과 궁실, 누각, 환상적인 풍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진 기와, 똥거름에 있다고 적은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깨진 기와 조각으로는 튼실하고 아름다운 담을 쌓을 수 있고 똥거름으로는 먹을 것을 풍성하게 생산할 수 있는 까닭이다.


연암은 “조선의 지독한 가난은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전적으로 선비가 제 역할을 못 한 것에 있다”며 당대의 지배층을 비판했다. 이런 시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집필한 지 100년이 지나도록 금서가 되다시피 한 채 엄혹한 세월의 마모를 이겨낸 『열하일기』는 한국의 고전일 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 반열에 올라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지음, 돌베개, 1998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홍대용 지음, 김태준 외 옮김, 돌베개, 2001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지음, 태학사, 2003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문화일보에서 20년 가까이 기자로 재직하며 북 리뷰 및 학술, 종교 담당, 북 리뷰 팀장, 문화부장 등으로 일했다. 2011년 인문학 공동체인 대안연구공동체를 개설해 강의와 세미나, 출판 기획, 잡부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스코트 니어링 평전』을 번역했고 여럿이 쓰는 몇 권의 책에 글을 보탰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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