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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이원익선생 묘 및 신도비 李元翼先生 墓 및 神道碑

경기도기념물 제85호





청백리 이원익李元翼(1547~1634)의 묘이다.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공려功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태종의 왕자였던 익녕군益寧君 치袳의 4세손이며, 아버지는 함천정 이억재咸川正李億載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대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등을 지내고 관직이 좌의정과 영의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한백겸韓百謙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에 실시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다섯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인조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원익의 묘는 광명시 소하동 서독산 능선 하단 전주이씨 묘역 안에 있다. 부인 영일정씨迎日鄭氏와 쌍분이며 남동향으로 위치하여 있다. 묘역은 크게 2계階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계에는 봉분과 묘표, 혼유석을 배치하였고, 상계의 계체석에 상석을 걸쳐 배치하였다. 하계에는 향로석, 망주석 2기, 문인석 2기를 배치하였으며 장명등은 현대에 세운 것이다.


이원익선생 묘,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묘역 입구 길가에 위치한 신도비는 17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마모가 매우 심하다. 형태는 이수방부형螭首方趺形으로 이수, 비신, 대석을 모두 별도로 끼운 형태이다. 비문은 이준李俊(1560~1635)이 지었으며,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이 썼다. 전액은 ‘의정부영의정완평부원군증시문충이공신도비명議政府領議政完平府院君贈諡文忠李公神道碑銘’이다. 이수 앞면에는 쌍룡이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좌우대칭으로 조각하였고, 뒷면에는 단룡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습을 부조하였다. 용의 얼굴을 크게 강조하였으나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있으며, 용의 이목구비와 S자형의 신체는 고부조로 조각하여 생동감이 있다. 17세기의 이수방부형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동양 최고의 전서체를 자랑했던 미수 허목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신도비이다.


이원익선생 신도비,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이원익선생 신도비 이수,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이원익선생 신도비 기대,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이원익의 묘표는 1734년(영조10)에 건립한 것이다. 묘표의 비문은 4세손 이존도李存道가 기술하고, 안진경顏眞卿의 글씨체를 집자集字하여 건립하였다. 형태는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으로 대석은 거의 매몰된 상태이다.

망주석은 하계에 2기를 배치하였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편이며, 주신柱身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이다. 하계의 대표적인 석물은 문인석으로 망주석 아래에 2기를 배치하였다. 형태는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으로 안면이 앞으로 많이 돌출되어 있으며, 신체의 곡선이 기둥형으로 경직되었다. 특히 양 옆으로 갈라진 포袍의 옷주름은 매우 형식적이다. 17세기의 전형적인 문인석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대체적으로 17세기 전반기의 묘제와 석물을 유지하고 있으나 18세기에 추보한 묘표, 현대에 추보한 장명등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특히 미수 허목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이원익의 신도비는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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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시대/ 조선시대

    규모/ 1기

    / 쌍분, 묘비 1기, 장명등 1기,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신도비 1기

    / 신도비 높이 335cm

    재질/ 석재(화강암, 대리석)

    주소/ 여주시 상거동 산19-18

    지정일/ 1985.09.20

    소유자/ 충현박물관

    관리자/ 충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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