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식민지를 견딘 판타지, 청록파

문학-현대-운문 분야 『청록집』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록집』

박두진·박목월·조지훈 지음, 을유문화사, 2006








식민지를 견딘 판타지, 청록파


김응교 -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청록파 3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이 문단에 얼굴을 내민 시기는 ‘일제 말 암흑기’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식민통치를 강화한 일제는 1940년 2월 창씨개명 정책을 시행했고, 같은 해 8월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폐간했다. 이듬해 4월엔 유이한 문예지 〈문장〉과 〈인문평론〉을 폐간하고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금지했다.


“부족방언의 실천적 세련을 통해서 또 고전연구와 그 전파를 통해서 우리 정체성 탐구에 주력해 온” 정지용의 〈문장〉을 통해 등단한 세 시인은 친일이나 일본어로 작품 발표를 하지 않고, 우리말로 시를 쓰는 소극적 저항을 했다.


해방 직후 을유문화사에 취직한 박두진은 좌우익의 혼란 가운데서 〈문장〉 출신 시인들의 사화집을 기획한다. 박두진은 경주에 살던 박목월과 조지훈에게 요청하여, 세 사람은 시집 내기로 결정한다. 세 명이 모여 백록담(白鹿潭)의 정지용 추천으로 나왔으니 사화집 제목을 ‘청록(靑鹿)’이라 하자고 합의한다.


책 표지에 실린 저자 이름은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순서로 나온다. 나이순이라면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이고, 가나다순이라면 박두진, 박월, 조지훈이어야 한다. 박목월이 가장 앞에 나온 것은 단순히 1915년생으로 가장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1933년 18세의 나이에 동시로 이미 등단한 선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박목월은 이후 온 국민의 기억에 남을 동요로 남은 동시「송아지」를 발표했었다. 1916년에 태어난 박두진은 1920년에 태어난 조지훈보다 나이가 네 살 많지만, 기획자로서 이름을 제일 뒤에 적지 않았을까? ‘일종의 겸양적 뒷자리’였을 거라고 유성호 교수는 추측한다. 이제 저자 이름이 나온 순서대로 간단히 소개해본다.


박목월 시인은 장자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동시 시인으로 출발한 그는 1940년 〈문장〉 9월호에 시「가을 어스름」과 「연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박목월을 추천했던 정지용은 박 시인을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소월이 툭툭 불거지는 삭주귀성조(朔州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아. 민요풍에서 시에 발전하기까지 목월의 고심이 더 크다. 소월이 천재적이요, 독창적이었던 것이 신경 감각 묘사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민요”에 시종하고 말았더니 목월이 요적(謠的) 뎃상 연습에서 시까지의 콤포지션에는 요(謠)가 머뭇거리고 있다. 요적 수사(修辭)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한국시이다.“( 〈문장〉, 정지용)라고 평가했다.


박목월은 공동시집 『청록집』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지만. 자신의 본명을 넣은 『박영종 동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의 시편들은 형극의 시대를 사는 시인의 모국애를 담고 있다. 그 슬픔의 시기를 박목월은 여백과 민요의 미학으로 극복해낸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청노루」, 『청록집』, 박목월)


이 시는 읽고 나면 저 모든 풍경이 빨대처럼 청노루 맑은 눈에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당연히 청노루라는 동물은 없다. 시인이 만들어낸 환상 속의 동물이다. 청운사(靑雲寺)는 ‘푸른 구름의 절’이고, 자하산(紫霞山)은 ‘보랏빛 무지개 산’이다. 박목월의 시는 이렇게 두어 개 단어로 독자를 신비(神祕)로 인도한다. 마지막 5연에 “도는/구름”도 실제 도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주고 있다. 박목월은 이후 이 시에 나오는 절이나 장소 이름은 모두 “나 이것은 내가 명명(命名)한 내 판테지(Fantasy)”였다고 남겼다. “나는 그 무렵에 나대로의 지도(地圖)를 가졌다. 그 어둡고 불안한 세대에서 다만 푸군히 은신하고 싶은 어수룩한 천지”(『보랏빛 소묘』, 박목월)가 그리웠다고 썼다. 어둡고 희망이 없는 ‘일제 말기’라는 심리적 압박을 피해 차라리 판타지 공간에서나마 가까스로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다.


조지훈은 그의 시에서 불교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조지훈의 이상 공간은 전통과 고전 그리고 동양적인 것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대개 폐쇄된 공간 속에서 근경으로 나타난다. 첫 추천작인 「고풍의상」에는 그의 시정신이 집중되어 있다. 동양적 전통의 정제된 미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은 ‘자지빛 호장을 받힌 호장저고리’와 ‘열두 폭 기인 치마’를 입고 있는 ‘고풍의상’을 한 여인의 자태이다.


불교의 전통 고전 무용을 다룬 「승무」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빈 臺에 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중략) //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적으로는 밤에 절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승무를 찬찬히 관찰하며 세상의 번뇌를 승화시키는 지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박두진 시인은 기독교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박두진이 1930년대 말기의 절망적 상황에서 쓴 「향현(香峴)」은 식민지 현실을 절망하고 저주하는 대신, 밝은 내일을 갈망하는 박두진의 등단작이다. 본래 산의 모습은 ‘침묵이 흠뻑’ 지루하게 적셔 있는 수동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그는 산의 실상에 가치의 전환을 일으킨다. 산을 보며 장차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기다리는 민족의 이상을 꿈꾸며, 여우 · 이리 · 사슴 · 토끼 등 어울리지 않는 짐승들이 싸우지 않고 즐거이 뛰는 절대평화를 그리고 있다. 「향현」에는 전체적으로 수직 상승 이미지가 가득 차 있다.


1939년 〈문장〉에 발표한 「묘지송」에는 당대 현실을 ‘무덤’ ‘주검’ 등으로 비유하고 있다. 『국경의 밤』 등의 시에서 그러했듯이 ‘무덤’이란 일제하에서 현실을 암유하는 표상이며, ‘주검’이란 그러한 무덤 속과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에 해당된다. 이는 시 「푸른 하늘 아래」에서 현실이 ‘처첨한 밤’이나 ‘황폐한 땅’과 같이 부정적이면서도 비판적으로 묘사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묘지송」에는 비관적인 현실 인식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그것이 밝은 것, 희망적인 것으로 변모되어 있어서 관심을 끈다.


좌우익이 대결하며 행사 시 기념 시가 범람했던 해방정국에 『청록집』은 “당시 시의 사상성과 예술성의 결합을 주장하는 ‘순수시’의 개념을 대표하는 위치에”서며 청년문학가협회의 태도를 보여주는 결과물로 주목받는다고 평가되어 왔다. 더불어 억압을 이겨낸 장자적 판타지(박목월), 불교적 판타지(조지훈), 기독교적 판타지(박두진)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박목월 시전집 』

박목월 지음, 이남호 엮음, 민음사, 2003


『詩 - 조지훈 전집 1』

조지훈 지음, 나남출판, 1997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

김응교 지음, 박이정, 2004







김응교 -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집 『씨앗/통조림』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과 평론집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곁으로-문학의 공간』 『그늘-문학과 숨은 신』 『일본적 마음』 『한국시와 사회적 상상력』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 『시인 신동엽』 『이찬과 한국근대문학』 『韓國現代詩の魅惑』 등을 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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