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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오윤겸선생 묘 吳允謙先生 墓

경기도기념물 제104호





삼정승을 지낸 오윤겸吳允謙(1559~1636)의 묘이다. 오윤겸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토당土塘이다. 1597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9)에는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26년 우의정, 1627년(인조5)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의 나이에 영의정에 올랐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秋灘文集』을 비롯해 『동사일록東槎日錄』, 『해사조천일록海槎朝天日錄』 등이 전한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오윤겸선생 묘, 2015 ©경기문화재연구원


오윤겸 묘는 오산리 해주오씨 묘역 능선 골짜기를 따라 서북향으로 위치하여 있다.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쌍묘의 형태이고, 1986년에 묘역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봉분 둘레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묘역은 2계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계에 봉분·상석을 배치하고, 하계에는 묘갈·향로석·동자석 2기·망주석 2기·문인석 2기를 배치하였다.

하계의 서쪽에는 1647년(인조25)에 건립한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의 묘갈이 있다. 비문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짓고, 의정부좌참찬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썼다. 대석의 상단에는 단순한 연판문을, 앞·뒷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묘갈의 총 높이는 약 258cm이다.

상석과 혼유석은 17세기 이후 유행한 물손질을 한 형태로 표면이 매끄럽다. 상석의 앞부분은 계체석의 끝에 걸치면서 아래에 별도의 장대석을 받침으로 하였다. 향로석은 17세기 전형적인 육각형의 향좌아香坐兒 형태로 균형이 잘 맞고 정갈하다. 다리는 호족형으로 하단이 매몰된 형태이다.


오윤겸선생 묘 동자석, 2015 ©경기문화재연구원


동자석은 상석의 좌우에 시립하여 2기를 배치하였다. 머리는 쌍계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 모아 작은 지물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원만하고 살짝 미소를 짓고 있으며, 신체표현은 사각형태이고 직선적이다. 소매가 좁은 포袍를 입고 있으며 포 하단에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손 아래로 허리띠의 긴 끈을 음각하였다. 뒷면 어깨에는 운견雲肩을 허리에는 포두를 음각하였는데, 운견의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옆면 어깨를 걸쳐 흐른 긴 띠가 옆면 하단까지 길게 드러워졌다. 17세기 전반기 쌍계형 동자석의 대표적인 형상이다.

망주석은 동자석과 문인석 사이에 2기를 배치하였는데, 서쪽의 경우 묘갈에 약간 가려서 어색한 배치이다. 망주석은 전체 높이가 85cm정도여서 규모가 작고 주신柱身이 매우 짧아 어색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운두雲頭에는 여의앙련如意仰蓮을 조각하였고, 주신에는 귀耳가 있는데, 마모가 많이 진행되어 형태가 명확하지 않다.


오윤겸선생 묘 문인석, 2015 ©경기문화재연구원


문인석은 하계의 가장 남쪽에 2기를 배치하였다. 형태는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이다. 안면표현은 동자석과 유사하게 원만하면서 평면적이고, 목이 가슴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엉거주춤한 자세이다. 금관을 포함한 머리의 비율이 신체의 약 1:2.5 정도인 점, 조복 앞면의 폐슬과 뒷면의 후수를 선단형태로 간략하게 음각한 점, 형식적으로 일정한 간격의 옷주름을 표현한 점 등 전체적으로 17세기 중반 사대부가의 묘역 석물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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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시대/ 조선시대

    규모/ 1기

    / 쌍분, 상석 1기, 묘비 1기, 향로석 1기, 동자석 1쌍,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주소/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산5

    지정일 / 1988.03.21

    소유자/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중

    관리자/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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