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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삼남길 9구간 진위고을길

오산 맑음터공원 ~ 평택 원균장군묘

<경기옛길-삼남길>


삼남길 9구간 진위고을길

오산 맑음터공원 ~ 평택 원균장군묘



# 9구간 진위고을길


맑음터공원에서 야막리 쪽으로 내려오면 평택시 진위면으로 접어듭니다. 진위현 관아가 있었던 진위면사무소나 진위천 인근의 풍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진위향교에서 옛 진위현의 위세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진위천을 건너 계속 가다보면 ‘흰치고개’라고 불렸던 소백치와 대백치를 지나게 됩니다. 흰치고개를 지나면 내리저수지 인근에 위치한 원균장군묘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 진위면 가곡리,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경주 이씨 가문의 땅


무봉산 서편자락인 진위면 가곡1리 신가곡은 마을의 산과 골짜기(谷)가 아름답다(佳)고 해서 가곡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입니다. 무봉산과 접한 이 마을과 인근 지역은 조선 후기 경주 이씨 상서공파의 집성촌으로 백사 이항복 이후 9명의 영의정과 수많은 판서를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건영, 석영, 철영, 화영, 시영 등의 6형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명문가의 특권을 버리고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끝내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조선 팔도 어느 대갓집에 견줘도 그 떵떵거림이 수그러들지 않을 이 명문가 가족 60여 명은 요즘 물가로 따지면 수백억에 해당하는 재산을 처분한 후 압록강을 건넜고 이후 치열한 항일투쟁에 나섭니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가문이었던 셈이죠.


이들은 온 재산을 쏟아 부어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키워냈습니다. 일제에 투항하여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하나 같이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집안의 부녀자들도 삯바느질과 거친 일을 기꺼이 감내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했습니다.


그 모진 세월을 겪으며 6형제는 하나둘씩 세상을 떠납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았을 때, 6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시영뿐이었습니다. 한때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로 잘나가던 엘리트였던 그가 36년 일제 강점기를 버텨내고 해방을 맞았을 때 나이는 일흔 여덟이었습니다.


지금도 가곡리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과거 이곳이 경주 이씨들의 집성촌이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습니다. (글 출처 : 경기옛길 이야기책)



# 삼남길 진위면 백현원에서의 야자타임


삼남길은 중요 간선도로망이었던 만큼 관리와 여행자가 쉬고 묵을 수 있는 역참과 원, 점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 중 백현원은 평택시 진위면에 있었던 원인데, 이곳에는 맹사성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맹사성은 고향인 아산에서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 백현원에 잠시 묵었는데요.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로 검소함이 몸에 배었던지라 초라한 행색으로 다녔고, 누구도 그가 좌의정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인 여럿을 거느린 젊은 선비 한 명이 먼저 아랫목을 차지하고는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맹사성의 행색을 보더니 반말로 ‘공당문답’을 하자고 했습니다.


공당문답은 일종의 야자타임과 같은 놀이로 말끝을 ‘ㅇ’으로 끝내는 놀이입니다. 아마도 행색이 초라했던 맹사성을 얕보는 마음 때문이었겠죠. 맹사성은 좀 더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한양에 무슨 일로 가는공” 하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벼슬하러 간당”하고 대답했습니다. 맹사성은 “그럼 내가 도와줄공?”이라고 묻자 젊은 선비는 맹사성의 초라한 행색을 비웃으며 “아니올시당”하고 맹사성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야자타임이 끝나고 맹사성은 젊은이와 헤어져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며칠이 지나 과거에 합격한 젊은이들이 삼정승에게 인사를 하러왔습니다. 맹사성이 면면을 살펴보는데 그들 중에는 백현원에서 공당문답을 했던 젊은 선비가 끼어 있었죠. 잘 됐다 싶은 맹사성은 젊은이가 자신의 앞에 오자 부채로 입을 가리고는 “그래 과시는 잘 봤는공”하고 물었습니다.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젊은이는 고개를 들어 좌의정에 앉은 사람이 그 초라한 행색의 선비였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당”하고 대답했습니다. 젊은 선비의 교만함은 미웠지만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고 심성까지 나쁘지 않다고 판단해 맹사성은 그를 크게 중용했다고 합니다. (글 출처 : 경기옛길 이야기책)



# 진위향교 대성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진위향교는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조선 초기의 건물은 소실되고 조선 후기에 중수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대성전, 명륜당, 외삼문, 서재 등이 남아있고, 갑오개혁 이후 교육의 기능이 사라진 이후 봄, 가을에 석전을 봉행한다고 합니다.



# 원균장군묘


경기도 기념물 제57호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이순신과 함께 합포, 적진포, 사천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칠천량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우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그를 선무 1등 공신으로 봉했습니다.


원균 장군의 묘역은 400㎡으로 평택시 도일동 마을 뒤편 야산에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묘역을 계속 관리하고 있고, 사당을 세워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삼남길 9구간에는 진위향교와 원균장군묘에 스탬프가 있습니다. 고즈넉한 진위현의 마을길을 천천히 걸어보세요!    http://ggoldroad.ggc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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