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우리 민족의 얼을 바로 세워주는 큰 스승의 웅혼한 외침

문학-고전-운문 분야 『허난설헌 시집』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 시집』

평민사, 2015






섬세한 번역으로 살아난 천재 여성의 날카로움과 깊이


방민호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옛사람들 중에는 현대의 김소월이나 이상이나 박인환처럼 젊어서 세상 떠난 시인들이 많다. 여성 시인들 가운데 한시로 이름 드높았던 허난설헌 역시 불과 27세로 세상을 등진 명인 중의 명인이다.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난다고 했던가. 총명하고 깊은 감수성 지닌 난설헌이 나고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지만, 박명하게 두 자식을 잃고, 배 속의 아이까지 세상 빛을 못 보게 된다. 또, 그 자신마저 불길한 예지몽을 따라 유명을 달리하니, 이 모든 것을 하늘의 뜻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난설헌 시집의 번역자인 허경진은 평민사에서 이미 많은 한시를 번역해낸 바 있다. 특히 난설헌처럼 한시로 널리 알려졌던 매창의 한시집도 아름다운 말을 골라 운치 있게 번역했으니 그중 하나가 다음의 한시다.


        擧世好竿我操琴(거세호간아조금)

        此日方知行路難(차일방지행로난)

        刖足三慙猶未遇(월족삼참유미우)

​        還將璞玉泣荊山(환장박옥읍형산)


「自恨薄命(자한박명)」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시는 매창이 스스로의 운명을 한스럽게 여겨 노래한 내용이다. 첫 시행은 매창 스스로 거문고를 즐겨 타니 피리 소리를 좋아하는 뭇 세상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다시 세 번째, 네 번째 행에서 월형, 그러니까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세 번이나 당하고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산에 올라 옥덩이를 안고 울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형산의 옥」이라는 중국의 고사에 연결되는 것으로, 이 한시를 통해 진짜 예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 예술가의 아픈 내면세계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허난설헌 또한 매창보다 십 년을 앞서 살다간 불행하디 불행한 여성 예술가였다. 그는 세상이 다 아는 시대의 반역아 허균의 손위누이로 동생과 마찬가지로 삼당 시인의 한 사람이었던 손곡 이달에게 한시를 배웠다. 서자 태생의 이달에게 한시를 배워 계급이나 적서 타파에 관심을 가졌다던 허균처럼 허난설헌의 시 또한 가만히 보면 결코 한가하고 평온한 사대부 여성 지식인의 시라 할 수 없다. 그녀의 시에는 차가운 빛과 뜨거운 열정이 흘러넘친다.


「감우(感遇)」라는 시를 살펴보자. 번역한 분은 이를 ‘난초 내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옮겼다. 원문과 그 번역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枝葉何芬芳(지엽하분방) / 가지와 잎 그리도 향기롭더니,

        西風一被拂(서풍일피불) / 가을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 /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 빼어난 그 모습 이울어져도

        淸香終不死(청향종불사) /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 아파져

        涕淚沾衣袂(체루점의몌) /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이 시는 「감우」, 곧 ‘느낌’이라는 제목 아래 모은 네 편의 시 가운데 첫 번째 것으로 난초를 노래했다. 이 시에 번역자는 「난초 내 모습」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원시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이는 허난설헌의 당호가 바로 이 난초로부터 이름을 따왔음을 십분 고려한 것으로, 번역자의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미적 감수성이 투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이 시는 허난설헌 자신의 삶을 한 가닥 난초에 의지해 압축해 보인 빼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이르게 가버린 젊음 속에서 그 한스러움에조차 사그라지지 않는 “맑은 향기”를 간직한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러한 자신의 기품을 의식하고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대학원 시절에 이 시집을 접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녀의 시가 얼마나 빼어나며 아름다운지 충분히 감득하지 못했었다. 학생 때 『테스』나 『폭풍의 언덕』을 읽고 어떤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고, 1950년대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보고도 그 주인공의 비애의 깊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듯이, 허난설헌의 한시는 애초에 한문으로 쓴 데다가 여성의 섬세하면서도 깊은 심리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어, 젊은 청년인 나로서는 충분히 헤아리기 어려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좋은 번역의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번역자 허경진은 수십 년 공력을 들여 한시를 우리말로 옮겨온 힘으로 허난설헌의 시를 능히 현재에 살도록 했다. 이 시집만 해도 1986년에 초판을 낸 뒤 1999년에 개정 증보판을 냈으며, 이를 통하여 고증이 필요한 시들을 걸러냈다. 이윽고 그는 허균이 죽은 누이를 위해 펴낸 『난설헌집』을 완역하는 데 이른다.


허난설헌의 시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점은 난설헌이 자신의 불행한 삶과 그를 초월한 이상세계를 노래하는 데 머물지 않고 가난하고 힘든 하층민을 위해서도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담아 시를 선사한 것이다. 시집도 가지 못한 채 남의 베를 짜는 처녀와 변방에 나가 군역을 치르는 사내를 노래한 시들을 읽으면 난설헌의 인간됨과 그 향기를 다시 살피게 한다. 「가난한 여인의 노래」라 번역된 「빈녀음(貧女吟)」 네 수와 「수자리의 노래」라 옮긴 「새하곡(塞下曲)」 다섯 수, 또 「요새로 들어가는 노래」라 한 「입새곡(入塞曲)」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동정과 연민의 시들을 음미하고 나면 그녀가 품었던 남성 세계의 냉소와 환멸이 실감 나게 와 닿는다. 그녀는 삶의 고통과 슬픔을 모르는 남성들의 향락과 퇴폐를 냉정하게 꿰뚫어볼 줄 아는 여성이었고, 이 시들을 옮길 때 번역자의 솜씨는 한층 공교로워졌다. 다음은 「색주가의 노래」라 옮긴 「청루곡(靑樓曲)」이다.


        夾道靑樓十萬家(협도청루십만가) / 좁은 길에 색주가 십만 호가 잇달아

        家家門巷七香車(가가문항칠향거) / 집집마다 골목에 수레가 늘어서 있네

        東風吹折相思柳(동풍취절상사류) / 봄바람이 불어와 님 그리는 버들 꺽어버리고

        細馬驕行踏落花(세마교행답낙화) / 말 타고 온 손님은 떨어진 꽃잎 밟고 돌아가네


이 노래와 함께 「젊은이의 노래(少年行)」을 읽으면 허난설헌이 품고 있던 한의 비수를 직각할 수 있다. 번역자 허경진의 섬세한 말 고름이 허난설헌이라는 요절한 천재 여성의 의식의 날카로움과 깊이를 오늘에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리라.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매창시집』,

허경진 옮김, 평민사, 2007


『손곡 이달 시선』,

허경진 옮김, 평민사, 1992


『교산 허균 시선』,

허균 지음, 허경진 옮김, 평민사, 2013






방민호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94 『창작과 비평』 제1회 신인 평론상 수상하며 비평에 등단했고, 2001 월간 문학잡지 〈현대시〉 신인추천 작품상 수상하면서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 봄 계간 문학잡지 〈문학의 오늘〉 에 단편소설 「짜장면이 맞다」를 발표하며 소설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는 다음과 같다. 연구서로는 『이상 문학의 방법론적 독해』 『일제말기 한국문학이 담론과 텍스트』 등, 문학 평론집으로는 『서울문학기행』 『행인의 독법』 등, 시집으로는 『숨은 벽』 등, 장편소설 및 소설집으로는 『대전 스토리, 겨울』『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등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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