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연구원

임진강 유역 원삼국~삼국시대 취락과 지역 정치체의 동향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이 글은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 임진강 유역, 분단과 평화의 고고학'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임진강 유역 원삼국~삼국시대 취락과 지역 정치체의 동향


한지선(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Ⅰ. 머리말

Ⅱ. 취락(주거지) 분석기준

Ⅲ. 임진강 유역 취락 양상

Ⅳ. 임진강 유역 지역 취락의 특징과 정치체 의 동향

     1.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 취락의 특징

     2. 임진강 유역의 정치체의 동향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임진강 유역은 원삼국시대 이래 한성백제기까지 예계문화권(박순발 1996)에 포함되어 취락과, 성곽, 분묘 등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는 지역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연천 강내리 유적(고려문화재연구원 2012)을 비롯한 다수의 유적이 발굴조사됨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문화정체성을 구명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먼저 본 발표의 주제인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 취락연구에 대해서는 주거지의 평면형태, 취사 시설, 시대별 주거지 장축방향의 변화 및 그것들의 상관관계, 중도식 경질무문토기 등 출토유물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1) 특히 경기북부권과 서울경기권은 양자간의 취락의 변화 양상에 있어 지역적 친연성이 강하고, 한성백제기 취락의 양상도 다수 공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번 발표의 주된 내용은 경기북부권 중에서도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 취락에 대한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중심은 임진강 유역권에 집중하여 살펴보겠지만 인근 한탄강 유역권과 임진강 및 한탄강의 지류상에 위치한 대표적인 취락들을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취락의 양상만으로 정치체의 동향을 쉽게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으나 이미 중부지역 일대에 대한 일차적인 검토를 수행(한지선 2015)한 바 있어 이를 기반으로 공통분모 속에서의 취락간 위계문제, 그리고 정치체의 지역 변동 문제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취락(주거지) 분석기준


취락(주거지)의 분석기준은 역시 주거지의 평면형태와 취사시설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주거지의 면적, 출토유물 등에 대한 분석 등 더해지게 된다. 중부지역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 주거지의 가장 특징인 출입구가 돌출된 주거지인 呂·凸字形 주거지의 평면형태와 취사시설에 대한 형식분류는 다음과 같다.


표1. 呂·凸字形 주거지 평면형태(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수정)

표2. 呂·凸字形 주거지 취사시설(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수정)


이 중에서 경기북부권만을 대상으로 할 때는 강원 영서지역이나 경기 남부지역 등 여타의 중부권 유적에 비해 쪽구들의 설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이 점은 서울 경기권의 양상과도 유사하다. 또한 육각형의 평면형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쪽구들 단계에서 이미 출현하고 있는 점에서 육각형주거지를 무조건 ‘한성백제식 주거지’(한지선 2009)로 단정할 수 없다는 근거가 확인되기도 한 지역이다(송만영 2010, 한지선 2013).


다음의 <표 3>은 경기북부권 수혈주거지의 시기별 양상을 평면형태와 취사시설을 기준으로 나열한 것이다. 이전 분석과 달리 좀 더 착목한 지점은 오각형과 육각형 둔각의 평면형태일 때 장축이 길고 단축이 짧은 장방형구조가 일반적이지만, 육각형 평면형태가 점차 각이 뚜렷하게 되면서 장축과 단축의 비례가 거의 정비례화 된다는 점을 좀 더 상기하여 적용해 보았다.


표3.  경기북부권 수혈주거지 시기별 양상


주거지 면적의 경우 출입구를 제외한 주거 내부를 기준으로 하였으며, 대체적으로 60㎡이하가 다수를 차지하면 대형 취락의 경우 100㎡, 150㎡이상을 기준으로 구분하면 대체적으로 위계적인 해석이 가능한 기준임을 확인한 바 있다(한지선 2015). 따라서 임진강 유역권 취락에서도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여 분석하였다.


이외에도 원삼국시대 출토유물은 경질무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낙랑계토기와 타날문토기 원저단경호 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낙랑계토기와 같은 외래계토기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위계나 특징, 변천을 육안으로 뚜렷이 파악하기 어렵고, 변화도 매우 더디기 때문에 원삼국시대 출토유물에 대한 분석은 한계가 있다. 다만 한성백제기 신기종의 출현으로 합과 뚜껑, 직구 호류 등과 기대, 흑색마연토기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는 양상은 확실히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준으로 취락의 기본분석에 포함하여 출토유물도 함께 살펴볼 예정이다.


Ⅲ. 임진강 유역 취락 양상


임진강수계에 직접 인접하여 확인되는 취락은 총 9개소 정도 있으며, 인근 한탄강 유역권에 약 3개소, 이외 임진강과 한탄강 등의 小支流에 인접한 내륙에 5개소 정도가 확인된다. 물론 발표자가 간과하고 있는 유적이나 최신의 사례가 더 추가될 가능성이 있지만 기존의 보고서 발간을 기준으로 유적을 선별하였으며, 각 유적별로 취사시설의 분포양상을 살펴보았다. 노지와 쪽구들의 경우 원삼국시대, 일자형부뚜막의 경우 한성백제기에 주로 확인되기 때문에 이를 도식적으로 기준하면 각각의 취락의 시기 폭이 어느 쪽에 좀 더 기울어져 있는지, 혹은 시기 폭이 긴지, 짧은지를 간략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표4. 임진강·한탄강유역 취락 유적 분포도와 유적별 주거지 형식나열


1) 연천 삼곶리 유적(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12)


이 유적에서 조사된 주거지 수는 모두 21기로 원삼국~백제기에 걸친 시간폭을 가진다. 노지와 쪽구들의 비중이 전체 확인된 주거지 중 87%를 차지하고 있고 일자형부뚜막이 시설된 여·철자형 주거지는 단 3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3기 중 2호주거지의 경우 단축과 장축의 비례가 거의 정비례하고 있어 육각형주거지 단계에서도 매우 발달된 형태를 보인다.


전체적으로 장방형(오각형, 육각형 둥근)에서 점차 정방형(육각형 각진)으로 평면형태가 확인되지만 시기 변화를 보여줄 만한 유물의 출토는 소략하다. 주거지의 장축방향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주거지는 1호와 3호주거지(남-북)이지만 2호주거지는 원삼국시대 장축(북서-남 동)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주거지 면적은 쪽구들 단계 주거지에서 대부분 대형 면적이 확인된다(7호-113.2㎡, 5호-97.1㎡). 반면 일자형부뚜막 주거지는 30~40㎡로 매우 소형에 해당한다. 주거지 간격은 대부분 중복을 제외하고 10~30m 사이에 밀집 분포했다. 특히 7호주거지 주변으로 넓은 광장이 형성되어 있고, 주거면적도 가장 큰 것으로 보아 중심 주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주거지 내 철생산관련 단야로 등 유구가 확인되고 있어 생산 중심취락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강내리 등지의 소비지로 삼았을 것으로 보고자는 보고 있다.


도면1. 연천 삼곶리 유적 주거지와 출토유물


2) 연천 합수리 유적(한울문화재연구원 2012)


이 유적에서 취사시설과 평면형태가 확인되는 유구는 총 6기로, 취사시설의 경우 쪽구들이 5기, 부뚜막이 1기 확인되었고, 평면형태는 오각형이 2기, 육각형이 2기가 확인되었다. 육각형 평면형태는 쪽구들과 일자형부뚜막이 시설된 주거지에서 각각 1기씩 확인되었는데, 모두 후면부가 각진 형태이다. 장축의 경우 일자형부뚜막이 시설된 5호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거지나 수계와 평행한 남-북 방향을 보였으나 쪽구들이 시설된 육각형 주거지인 6호만이 동서방향으로 축이 틀어져 있어 주목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오히려 쪽구들이 시설됐음에도 불구하고 6호주거지가 가장 늦은 주거지일 가능성도 있으나, 출토유물이 빈약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주거 면적은 쪽구들이 시설된 육각형주거지인 4호주거지가 가장 크다(57.8㎡). 출토유물은 백제토기는 확인되지 않고 경질무문토기(호, 발, 뚜껑류)와 타날문토기 원저단경호 파편이 다수 확인되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주거지 간의 분포 간격이 매우 넓다는 점(30~50m)인데 그만큼 밀집도가 매우 낮았음을 보여준다.


도면2.  연천 삼곶리(좌)와 연천 합수리(우)의 유구 배치도


3) 연천 강내리 유적(고려문화재연구원 2012)


주거지 71동 중 68개 유구에서 노지단독 11기, 쪽구들+노지 42기, 일자형부뚜막+노지 2기, 일자형부뚜막 단독 13기 등이 확인되었다. 그중 쪽구들의 경우 후단벽에 4기, 나머지는 모두 측장벽에 설치된 것이다. 쪽구들의 비중이 전체 주거지의 60% 넘게 차지하고 있어 원삼국 시대가 취락 내 중심시기를 이루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장방형에서 육각형까지 다양한 평면형태가 확인되며, 방형의 출입구시설이 없는 소형 주거지도 다수 확인되었다. 여·철자형 주거지만을 대상으로 살펴본 결과, 주거지 면적의 경우 노지(68호주거지-122.1㎡), 쪽구들(27호 주거지-150.2㎡), 일자형부뚜막+노지(64호주거지-115.8㎡), 일자형부뚜막(2호주거지-91.1 ㎡)으로 대형주거지가 확인되며 그중에서도 쪽구들 주거지의 면적이 월등이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도면 3>은 이 유적에서 1단계로 취사시설(노지, 쪽구들, 부뚜막)을 구분하고, 2단계로 주거지 장축변화(남북→동서)를 기준하여 3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이들 간의 중복은 없으며, 대형주거지 출입구쪽으로 넓은 광장이 조성되는 점이 확인된다. 먼저 노지주거지(1기)는 원삼 국시대 전통적 취사시설로 시기적으로 가장 이르게 확인된다. 따라서 노지단독 주거지의 장축 또한 취락의 전통적 조성양상을 보여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후단벽 쪽구들이 측장벽 쪽 구들 주거지에 선행하는 중복관계를 감안하여 1기에 포함시켰다. 측장벽 쪽구들 주거지 단계 (2·3기)에 들어서면 전통적 장축(남북)과 새로운 장축(동서)이 혼재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부 뚜막주거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대형의 부뚜막 주거지(2, 64호)가 전통적 남북 장축으로 조성된 점이 주목된다. 또한 쪽구들 주거지 중 가장 대형에 속하는 27호주거지를 중심으로 중형 급 주거지가 새로운 장축(동서)으로 조성되어 있는 점 또한 매우 이례적인 양상이다. 대개 일자형부뚜막이 설치되는 단계는 백제와의 관련성이 높고, 따라서 전통적 장축과는 다르게 조성되어 시기적 단절성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박경신 2012, 한지선 2015). 그러나 이렇듯 일자형부뚜막의 대형주거지가 쪽구들의 소형주거지와 함께 전통적 장축에서 조성되고, 쪽구들의 대형주거지가 일자형부뚜막의 소형주거지와 함께 새로운 장축에서 조성되는 양상은 매우 드물다. 이와 관련하여 27호주거지에서 출토되는 유물 또한 발달된 대옹과 경부 조임이 강한 호류 등이 포함되어 있는 점도 이 주거지 단계가 쪽구들이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성백제기에 해당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뒤에서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표5.  연천 강내리 유적의 취사시설별 주거 면적 분포


도면3.  연천 강내리 유적의 취사시설과 장축변화를 기준한 취락의 변천과정


도면4. 연천 강내리 유적 주거지와 출토유물


4) 파주 주월리 유적(경기도박물관 1999)


이 유적에서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구까지 포함해 약 16기이고 그 중 온전한 유구는 한양대에서 발굴한 1,2,3호주거지와 경기도 박물관에서 발굴한 96-7, 97-4호 등 5기 정도이다. 이 중 가장 잔존상태가 양호한 주거지는 96-7호로, 육각형(둥근) 평면에 일자형부뚜막이 시설되어 있다. 일찍이 한성백제Ⅰ기 단계의 대표적인 주거지(한지선 2003)로 주목한 바 있는데, 백제 중앙양식토기인 합, 개배, 대옹, 시루, 직구호류가 출토된 바 있고, 96-8호 주거지에서는 합의 견부에 요철이 장식된 형식과 함께 무개 및 유개 고배, 다량의 주조철부 등 출토되어 출토 유물의 위계상 중요취락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면적은 125㎡이다.


도면5. 파주 주월리 유적 주거지와 출토유물


5) 파주 선유리 유적(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13)


총 15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으나 5기 정도를 제외하고 상태가 불량하다. 평면형태 육각형과 오각형이 함께 확인되며, 쪽구들시설은 확인되지 않고 일자형부뚜막 주거지(5기)가 확인되었다. 특히 5호주거지에서 합을 비롯한 대호류와 동이, 주조철부 등이 확인되었다. 이외 유구 및 지표수습에서 직구평저호와 뚜껑, 대옹편 등이 확인되어 한성백제 중앙양식토기의 양상을 볼 수 있다. 1호주거지의 면적은 약 55㎡이다.


도면6.  파주 선유리 유적 주거지와 출토유물


6) 파주 당동리 유적(경기문화재연구원 2009)


이 유적에서는 16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먼저 1지점에서는 11기가 조사되었으나 대부분 잔존상태가 불량하지만 5호는 방형, 6호는 철자형, 9호는 원형의 평면형태를 보인다. 그중 원형인 9호주거지는 사천 늑도유적처럼 벽면을 돌아 긴 쪽구들을 시설하고 있어 이 일대에서는 드문 양상을 보여준다. 출토유물은 대부분이 경질무문토기 일색으로 타날문토기로는 (격자)심발, (격자)장란형토기편, (격자 다수)호류가 일부 확인될 뿐이다. 6호주거지의 면적이 가장 크다(25.5㎡). 7지점에서는 5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일자형부뚜막을 시설한 장방형 내지 철자형의 주거지였다. 1지점과는 시기차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1지점에서는 소형 투공의 경질무문토기 시루가 확인된데 반해, 7지점에서는 대형의 원형투공을 한 경질무문토기 시루 등이 확인된다.


도면7. 파주 당동리 유적 주거지와 출토유물


7) 파주 와동리 유적(경기문화재연구원 2010·2011)


이 유적에서는 약 17기의 여·철자형, 방형, 장방형 평면구조를 가진 다양한 주거지가 확인되 었으나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취사시설 등 제 특징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다만 출토유물 상에서는 한성백제기 양상이 다수 확인되었고 이형 토기 등 특색있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유물상으로만 보았을 때 그 위계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4지점 주거지에서는 흑색마연토기 직구호를 비롯하여 (중·대)합, 뚜껑, (추정)개배 등이 출토되었고, 기타 주거지에서도 시루, 대옹, 병, 평저소호 이외에도 토제 절구, 경부 조임이 두드러진 발달된 호류 등이 주목된다. 특히 대옹의 견부 문양대는 풍납토성 출토품에나 보이는 다양한 압인문이 확인되었다. 또한 대각을 가진 발형 배신의 이형토기류도 특징적이고, 금속기로는 동령과 동탁, 삼지창 등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가장 큰 주거지는 14지점 주거지로 76㎡이다. 나머지는 모두 40 ㎡이하의 소규모 주거지군에 해당한다.


도면8. 파주 와동리 유적 지점별 주거지와 출토유물


8) 파주 동패리 유적(국방문화재연구원 2012)


총 12기의 한성백제기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평면형태는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확인되지 않는 유구가 대부분이나 취사시설은 모두 일자형 부뚜막을 시설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출토 유물도 한성백제기 중앙양식토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가장 큰 주거지는 6호주거지로 120㎡에 달한다. 유물과 주거지의 면적으로 보아 위계가 상당히 있는 취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면9.  파주 동패리 유적 주거지와 출토유물


9) 포천 중리 유적(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15, 서경문화재연구원 2016)


이 유적에서는 모두 11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그 중 여·철자형 주거지는 10기로 쪽구들이 시설된 주거지가 6기, 일자형부뚜막이 시설된 주거지가 4기 확인되었다. 평면형태로 오각형과 육각형이 모두 확인되었는데, 쪽구들 주거지에서도 4기가 육각형평면에 해당된다. 장축방향은 모두 수계와 평행한 방향으로 조성되었다. 면적은 가장 큰 주거지가 15호주거지(서경)로 67.64㎡로 소형급에 해당된다. 전반적으로 소형의 주거지가 일열로 배열된 양상으로 형성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심발과 대호, 원저호 등이 확인되며, 8호주거지(쪽구들, 오각형)에서 삼릉형철겸동촉이 출토되었다.


도면10. 포천 중리 마산유적 주거지 일람

10) 포천 중리 용수재울 유적(겨례문화재연구원 2016)


총 32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고 그 중 취사시설과 평면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주거지는 30개 유구로 노지단독의 취사시설이 설치된 주거지는 없고 쪽구들 주거지(26기)가 전체 주거지의 약 86%의 압도적인 비율이며 일자형부뚜막은 단 3기에 불과하다. 쪽구들 주거지 중 평면형태가 육각형을 보이는 경우도 12기에 달한다. 출토유물상으로 경질무문토기 이외에 타날문토기편, 회색무문양토기편 등이 확인되고 있고, 그 외 특징적인 것은 없다. 주거지 면적은 1호주거지(쪽구들, 육각형)가 82㎡로 가장 크며, 나머지는 대부분 60㎡이하의 소형급이며, 부뚜막 주거지의 면적은 16㎡이하로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소형급에 해당한다. 포천 중리 마산유적과 유사한 취락 형태를 보여준다.


11) 포천 사정리 모래내 유적(중앙문화재연구원 2014)


포천 중리 유적 인근에 위치한 사정리 모래내 유적은 총 29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취사시설을 명확히 파악 가능한 유적 21기 중 아래의 <도면 11>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취사시설 배치양상이 확인된다. 이중에서 측장벽에서 시작해 후단벽으로 배연되는 짧은 모퉁이 쪽구들의 형태가(모퉁이쪽구들) 6기이고, 일자형부뚜막에 노지가 함께 시설된 형태가 9기이다. 대체로 포천 중리 유적에서 다수 확인되는 측장벽 쪽구들 시설 주거지와는 다르게 짧은 (모퉁이)쪽 구들 내지 일자형부뚜막 주거지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주거지 장축 방향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가 없는데 부뚜막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원삼국시대 이래로 전통적 주거지 조성 방식이 지속되었음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퉁이 쪽구들 주거지에서 삼각형 투공을 한 백제식의 시루가 확인되는 것도 한성백제기에 진입했음에도 전통적 취락이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시루 이외에는 경질무문토기 이외에 특징적인 양상이 확인되고 있지 않다. 주거 면적은 모퉁이 쪽구들 주거지에서 가장 큰 64㎡가 확인되고 있어 소규모의 취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퉁이에 쪽구들이 후단부쪽으로 꺾이는 형태는 이 유적을 비롯해 풍납토성(미래 라-18호주거지)에서도 확인된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도면11. 포천 사정리 모래내 유적 주거지와 출토유물


12) 포천 자작리 유적(경기도박물관 2004·2015)


이 유적은 총 26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으며 일부 짧은 부뚜막이 시설된 소형의 방형 주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여·철자형 주거지에 일자형부뚜막이 시설된 주거지로만 구성되어 있다. 다른 취사시설이 확인되지 않아 원삼국시대에 조성된 취락이 아니라 한성백제기에 조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Ⅰ-2호주거지는 면적 180㎡로 기대를 비롯한 대옹, 직구호, 뚜껑, 동이, 시루 등이 출토되고 있다. 풍납토성을 제외하고 지방에서 확인된 여·철자형 주거지 중 최대크기이다. 이후에 조사된 Ⅲ-1호주거지의 경우도 120㎡에 달하고 출토유물상 에서도 견문 문양대가 있는 소형호나 합, 시루, 뚜껑 등의 존재로 그 위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도면12. 포천 자작리 유적 주거지와 출토유물


13) 양주 옥정동 유적(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12)


이 유적에서는 총 28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중 육각형 주거지가 7기, 방형 주거지가 14기 확인되었다. 육각형 주거지 중 단 2기(10, 24호)를 제외하고 장축은 남북방향이며, 방형 주거지는 모두 남북방향이다. 육각형 주거지에서는 동이와 시루, 호류, 병류 등이 확인되었고, 각진의 육각형 주거지(7호)도 확인되었다. 방형 주거지 중 15호주거지가 가장 큰데 75.8㎡ 이다. 이 주거지에서 백제 중앙양식 토기인 합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방형의 소·대형주거지는 소위 ‘마한계주거양식’으로 실제 25호주거지에서는 4주와 마한계 시루도 출토된 바 있어 주목된다. 따라서 이 지역의 경우 육각형주거지계(예계)와 방형주거지계(마한계)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면13.  양주 옥정동 유적 방형 주거지(상)와 육각형 주거지(하)와 출토유물


Ⅳ. 임진강 유역 지역 취락의 특징과 정치체의 동향


1.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 취락의 특징


원삼국시대 중부지역은 수계를 중심으로 한 서북한지역과의 물자 이동 등 교역에 기반해 취락이 발전했다. 따라서 낙랑을 포함한 외래계 유물의 분포양상을 보면 대부분 중요 수계를 중심으로 확인되며, 임진강 유역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도면 14>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면14. 임진강 유역 낙랑유물 출토현황(황윤희 2013)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외래계 유물은 토기류의 경우 평저호, 원저호, 분형토기, 완, 옹, 화분형토기 등 다양한 기종이 확인된다. 금속기류는 대표적으로 삼릉형 철경동촉을 비롯해 동 령, 동탁, 동경, 지환과 이조선 돌대주조철부와 철산 등이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유리옥류와 금, 박환옥 등이 있다. 철경동촉 등의 유물로 보아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경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황윤희 2013)되며 취락의 존재 시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낙랑(계)토기는 이후 재지화되는 경향이 강한 단경호와 평저호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종이 3세기 전반대를 기점으로 급격히 소멸하는 양상이 확인된다(홍주희 2013). 임진강 유역에서도 동체부에 촘촘한 침선이 부가된 평저호류(연 천 학곡리 적석총, 연천 삼곶리 적석 총 등) 등을 제외하고 소멸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강 유역에서도 대부분 유구 출토품이 적어 교차편년을 실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다수이다. 다만 연천 강내리 유적에서 확인되는 측장벽 쪽구들이 부가된 주거지(39호)에서는 분형토기를 비롯해 鐵鏟이 출토되고 있다. 측장벽 쪽구들이 부가된 주거지는 대부분 2세기 후반 ~ 3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 공반되는 외래계 유물의 유입 시기를 추정한 기존 편년2)과는 차이가 있다.


원삼국시대 대표적인 취락의 평면 형태는 여·철자형 주거지이며, 오각 형이 주류를 이루고 육각형이 소수 확인된다. 또한 취사시설의 경우 노지와 쪽구들이 확인되는데 쪽구들은 측장벽에 설치된 것이 주류를 이루며 이외에 후단벽과 모퉁이에 설치된 사례가 소수 확인된다.


측장벽 쪽구들의 경우 여·철자형 주거지에서 3세기에 경기북부권과 서울경기권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확인되며 강원권에서는 후단벽 쪽구들 이외에 측장벽 쪽구들은 거의 확인되지 않고, 경기남부권의 경우도 소량 확인될 뿐이다(한지선 2015). 따라서 측장벽 쪽구들의 경우는 경기북부권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임진강 유역도 예외는 아니다.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취락에서 원삼국시대의 경우 측장벽 쪽구들이 시설된 주거지 비율이 압도적이다. 또 한 연천 강내리 유적이나 연천 삼곶리 유적 등 임진강 상류 지역에서는 노지나 부뚜막이 시설된 주거지보다 쪽구들이 시설된 주거지의 주거 면적이 크고 공반유물도 외래계유물을 비롯해 다양한 점으로 보아 중심 거점 취락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양상은 포천 중리와 용수재울 유적에서도 동일하다.


한편 원삼국시대 측장벽 쪽구들 단계에서 일자형부뚜막과 노지가 함께 공반되는 단계를 거쳐 일자형부뚜막단독으로 설치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한성백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 이 통설인데, 이것과 관련해 임진강 유역 취락에서는 예외적인 양상이 확인된다. 풍납토성에서 와 같이 편년의 중심이 되는 유적에서는 이러한 계기적 변화(쪽구들→부뚜막 시기적 단절성)가 중복을 통해서든 장축의 변화 등을 통해서든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연천 강내리 유적에서는 쪽구들 주거지와 일자형부뚜막이 단독으로 시설된 주거지가 함께 확인되고 있지만 장축의 변화(남북→동서)가 있어 이를 추적한 결과, 이 두 가지 장축 모두에서 쪽구들이 시설된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한성백제기에 진입한 이후에도 쪽구들 주거지가 일정 기간 공존 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는 영서지역에서 노지를 설치한 육각형주거지에서 한성백제기 토기가 나오는 사례(한지선 2018)도 유사하게 보이는데, 큰 변화의 흐름은 있더라도 전통적 문화가 고수, 유지되는 시간적 차이에 의해 지역별로 제 양상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 과도기적 양상은 포천 모래내 사정리 유적에서도 유사한데, 여기서는 특히 모퉁이에 짧게 꺾이는 쪽구들3)이 노지와 함께 시설된 주거지가 다수 확인된다. 물론 일자형 부뚜막과 노지가 시설된 주거지도 확인되며, 상호간의 장축의 변화도 중복관계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주거지 형태만이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유적도 이 유적이 거의 유일하다. 모퉁이 쪽구들 주거지에서 삼각형 투공 시루가 출토되는 점 등으로 보아 한성백제기 진입 후 과도기적 양상으로 파악되는데, 왜 이 유적에서만 유독 이러한 모퉁이 쪽구들과 노지가 딸린 일자형 부뚜막 주거지가 밀집 분포하고, 측장벽 쪽구들 주거지와 일자형 부뚜막 단독 주거지의 비중이 낮은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일단은 취락의 존속기간이 짧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 번째로 주목되는 점은 쪽구들 주거지가 확인되지 않고 일자형부뚜막이 설치된 취락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이다. 포천 자작리 유적이 대표적인데 확인된 주거지 전량이 한성백제기 일자형부뚜막이 단독 시설된 주거지에 해당된다. 원삼국시대 주거요소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 유적은 이외에도 파주 와동리, 파주 동파리, 양주 옥정동 등이 있다. 이는 원삼국시대에 없었거나 매우 소형급의 취락이었다가 한성백제기에 신생 내지 급성장한 취락으로 볼 수 있다.


네 번째로 주목되는 점은 양주 옥정동, 파주 와동리, 당동리 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마한계 주거지의 존재이다. 마한계 주거지는 평면 정방형의 사주식 혹은 무사주식의 짧은 부뚜막이 부가 되는 형태이다. 한성백제기 말기 장방형의 소형 장방형 주거지와는 구분되는 양상인데 이러한 주거양식이 임진강 하류역에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옥정동 유적에서 마한계 시루가 확인된 점 등으로 보아 마한계 집단의 취락 내 거주가능성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방형계 주거지 중 취락 내 면적이 가장 큰 옥정동이나 와동리에서는 합과 흑색마연토기 직구호 등 위계를 보여주는 한성백제 중앙양식토기도 함께 출토되고 있어 백제 중앙과의 관련성 내지 시기성을 엿볼 수 있다.


임진강 유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 원삼국시대에는 외래계 유물 이외에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 이외에 특징적인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질무문토기로는 시기를 구분하기 어렵다. 따라서 신기종의 출현을 기점으로 각 유적의 하한은 추정해 볼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필자의 한성백제기 4기 분기설정(한지선 2013)에 의거하여 간략하게 검토한 것이 <표 6>이다.


표6. 임진강유적 취락의 주거지 형식별 양상


표7. 임진강·한탄강 유역권 취락의 분기설정

2. 임진강 유역의 정치체의 동향


정치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준할 것인가가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중도유형문화 내지 예계문화권에서는 원삼국시대에 해당되는 유적에서 위계를 엿볼 수 있는 유물군이 거의 없고, 출토유물도 소략하여 그 대안으로 주거 면적에 착목한 연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결과 주거지 면적 통계상의 평균(약 60㎡)을 기준으로 유적 내에서의 주거면적간의 격차가 큰 경우와 작은 경우, 노지 주거지와 일자형부뚜막 주거지 면적간의 상당한 격차와 공반 유물의 상관성 등에서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한지선 2015).


따라서 임진강 유역 취락의 위계와 관련하여 출토유물, 주거면적을 기준하고, 취사시설, 장축방향 전환 등 제 양상 검토를 통해 시기성을 나누어 이 지역 정치체의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 정치체의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원삼국시대 주거 전통이 한성백제기 까지 유지되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를 염두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1군 전통적 강세 취락


먼저 가장 주목되는 취락은 연천 강내리 유적으로 노지(A)단계에도 가장 큰 주거면적(120 ㎡)을 보였는데 쪽구들 단계에서도 150㎡급(27호)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거점 취락을 형성하여 서북한지역과의 교역 등에서 우위를 점했던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육각형 일자형부뚜막 주거지와 장축을 함께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쪽구들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초대형의 주거지가 확인된다는 것은 그만큼 전통적인 문화가 강하게 잔존했던 지역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이 유적에서 확인되는 육각형 일자형부뚜막 단독의 주거지 규모가 소형급인 점을 고려한다면 한성백제기 어느 시점부터는 그 세가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화천 원천리 유적이나 홍천 성산리 유적 등은 기존의 전통적 주거 전통과 대별되는 육각형 일자형부뚜막 주거지를 축조하면서 그 면적이 이전에 비해 월등히 커지는 양상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2군 신흥취락


앞서서도 언급했듯이 원삼국시대 주거지가 확인되지 않고 바로 일자형부뚜막이 시설된 주거지만이 확인되는 유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포천 자작리 유적이다. 총 24기의 주거지가 확인되 었으나 전량 일자형부뚜막이 시설된 육각형주거지이다. 따라서 한성백제기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조성된 취락으로, 1호주거지의 면적이 지방 유적내에서는 가장 큰 180㎡를 보이고, 유물에 있어서도 기대를 비롯한 합, 직구소호와 각종 호류 등으로 보아 최상위급의 정치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군 소규모 장기 존속 취락


장기 존속이란 원삼국시대부터 한성백제기에 이르기 까지 소규모(60㎡이하) 주거지로 구성된 취락으로 쪽구들 단계에서 일자형부뚜막 단계, 짧은 부뚜막이 달린 소형의 (장)방형주거지 등이 확인되는 유적을 말한다. 임진강 유역권에서는 연천 초성리, 합수리와 파주 선유리, 당동리, 운정, 와동리, 양주 옥정동 유적 등이 해당되거나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임진강 유역 하류역에 위치한 유적들의 경우 마한계 주거지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합과 같은 한성백제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존속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수계를 따라 분포한 소규모 취락으로 원활한 교역을 위한 중간 기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군 과도기적 취락


원삼국시대 이래로 한성백제기 도래 전후한 과도기까지 존속하다가 취락이 소멸되거나 이주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포천 사정리 모래내 유적이 대표적인데, 유적내에서도 쪽구들 주거지와 부뚜막 주거지 모두 확인되지만 그 사이에 모퉁이 쪽구들과 일자형부뚜막에 노지가 부가된 주거지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모퉁이 부에 짧은 쪽구들을 설치하는 사례는 많지 않지만, 일자형부뚜막에 노지가 함께 설치된 주거지와 함께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원삼국시대 후기~한성백제기의 과도기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21호주거지에서 출토된 삼각형투공 시루의 존재 등으로 보아 이 유적의 경우 한성백제기에 진입한 시점에서 과도기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존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취락별 분석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원삼국시대 이래 한성백제기에 들어서면서 중심세력의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임진강 유역에서 가장 큰 거점 취락은 연천 강내리 유적(1군)이었다. 연천 삼곶리 유적(생산지)과 함께 철생산 품목의 유통과 더불어 낙랑군이나 고구려와의 접경지, 즉 예계문화권의 북부 전선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지역과의 다양한 물자 교류를 담당한 교역의 중요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지선 2015). 또한 임진강 하류와 중상류에 일부 소규모의 도시가 형성되어 그러한 물자 수송을 비롯한 다양한 보조 활동을 수행했을 것이다(3 군). 그러나 한성백제기에 들어서면서 성립기(한성백제Ⅰ기)단계에서는 연천 강내리 유적이 잠시 존속하지만 이후 파주 주월리 유적을 중심으로 중심세력권이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 강내리 유적에서 육각형 일자형부뚜막 주거지의 면적을 축소되었지만 파주 주월리 유적은 120㎡급으로 새롭게 축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성백제 중앙양식토기의 대거 유입은 이러한 중심세력권 변동에 백제 중앙세력의 힘이 실렸음을 보여준다. 파주 주월리 유적에서는 한성백 제2기 전후 단계의 유물만이 확인되고 더 이상의 위계품도 확인되지 않지만, 포천 자작리 유적 Ⅰ-1호주거지는 180㎡급으로 서울 풍납토성(가-30호수혈건물지(300㎡))을 제외하고 여·철자형주거지 중에서는 가장 크며 기대, 합, 뚜껑, 직구소호, 외반소호 등 다양한 중앙양식토기가 함께 확인되었다. 특히 기대의 경우 완형인데다가 지방에서는 출토된 단 세 곳4) 중 하나이 기도 하다. 또한 Ⅰ-2호주거지에서는 중국제 자기편도 출토된 바 있다.


앞선 시기별 거점취락 뿐만 아니라 한성백제 중앙양식토기 중 유일하게 지방에 다수 출토되고 있는 盒의 출토양상을 보자면 중형급이상의 취락도 함께 존속, 성장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임진강 하류역의 파주 와동리 유적에서는 흑색마연토기 직구단경호편이나 토제절구, 평저소호, 주조철부와 동령과 동탁 등의 금속기까지 출토되고 있어 면적(76㎡)에 비해 유물의 위계가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근 동패리 유적은 주거지는 오히려 더 큰데(120㎡) 출토 유물은 토제절구를 비롯한 소합과 시루, 소호류가 확인되고 있어 와동리에 비해 빈약한 편이나 이 취락 역시 중형급의 중소도시로서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강 유역에서는 포천 자작리나, 파주 주월리 유적, 파주 동패리 유적 등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쪽구들 단계보다 일자형 부뚜막이 채용되는 단계의 주거지 면적이 축소되는 경향이 확인된다5). 이는 백제의 통제권 하에 과거의 정치력이 그만큼 축소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은데, 오히려 일자형 부뚜막만 확인되는 취락, 신흥취락으로 분류되는 파주 주월리 유적이나 포천 자작리 유적과 같은 취락에서 매우 큰 주거지가 확인되고 있는 점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일자형부뚜막 단계에서의 임진강 유역권의 한성백제기 세력 재편은 전통취락을 배제하고 전통적 세력이 미비했던(노지단계에서 주거 면적이 매우 작거나 소량인) 지역이나 아예 새로운 지역에 ‘신흥취락’을 형성시키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Ⅴ. 맺음말


임진강 유역의 취락들은 대부분 노지가 단독으로 설치되는 단계와 함께 측장벽 쪽구들이 설치된 주거지가 다수 확인되고 이후 일자형부뚜막이 육각형 주거지에 설치되는 등 일관된 변천이 확인된다. 다만 시기적으로는 주된 두가지 주거 속성이 공존하는 약간 병행기 내지 과도기적 양상도 함께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임진강 유역권에서 확인된 취락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천 강내리 유적이나 파주 주월리 유적, 인근의 포천 자작리 유적 등의 발굴성과는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 취락의 양상과 정치체의 변동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원삼국시대 초기 유적들은 임진강 수계와는 떨어진 내륙 산간에 입지한 경우가 다수였지만 서북한 지역과의 교역이 본격화 되고 외래계 유물의 유입이 많아지면서 점차 수계에 인접하여 취락을 형성, 발전시켰다. 특히 원삼국3기 단계인 3세기를 중심으로 취락이 급성장하는 과정을 겪었으며 그 중심에는 연천 강내리 유적이 있었다


한성백제기 성립 이후에도 이들 지역에서 전통을 고수하려는 움직임은 상당히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 강내리 유적에서도 소형의 육각형 부뚜막 주거지와 대형의 쪽구들 주거지가 일부 공존한 양상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대형의 육각형 부뚜막 단독 주거지가 축조되면서 거점취락으로서의 중심지 이동이 이루어졌으며, 그 배후에는 백제 중앙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기존의 전통적 강세취락을 소멸 내지 축소시키고, 새로운 거점 취락을 형성시키는 방식으로 세력 재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에 상응하게 한성백제 중앙양식토기 중 가장 위계가 높은 기대와 중국제 자기류 등의 유물을 사여하는 방식이나 중형급의 취락이더라도 흑색마연토기 직구호 등의 사여를 통해 교통로상의 장악에 힘쓴 결과는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도면15.  임진강유역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 취락의 면적별 분포도









1) 그간의 취락 관련 연구는 아래의 주제로 이루어져 왔다. ‘주거군’을 설정하여 그 기준을 장축방향의 공통성에    기반한 연구(박경신 2011·2012·2015,강세호2017), 주거지의 평면형태의 변화에 기반한 연구(송만영1999·2010),

  경질무문토기의 형식변천에 기반한 연구(김일규 2006, 진수정 2009, 이준호 2003·2009, 이승재 2009) 혹은 이

  를 취사난방시설의 변천과 연계한 연구(김 준규 2013·2017), 평면형태와 취사난방시설의 변화에 기반한 연구

  (박중국 2011·2012·2013·2016, 이병훈 2011·2016, 박경신 2016, 한지선 2013·2015), 유적 AMS결과에 기반한

  연구(김장석·김준규 2016, 이창희 2015, 김준규 2017) 그리고 관련하여 대표적인 학술대회로는 다음과 같다. 

  중부고고학회, 2014, 『국가성립 전야의 중부지역』 2014년 정기학술대회. 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 2014,

  『쟁점, 중부지역 원삼국시대~한성백제 물질문화 편년』 제11회 매산기념강좌. 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

  2015, 『 중부지역 한성기 백제 주변 정치체의 동향』 제12회 매산기념강좌.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2013, 『근초고왕 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 쟁점세미나.

2) 김무중(2013)은 철산이 중국에서 戰國~漢代에 걸쳐 사용되며, 전국시대에는 돌대가 없다가 한대에 이르러 나

   타나는 경향으로 보아 강내리 39호주거지 출토 철산의 유입시기는 후한(後漢, 25년~220년) 전기를 넘지 않

   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측장벽 쪽구들의 중심시기는 3세기이다.

3) 송만영(2018)은 필자가 언급한 모퉁이 쪽구들이 일자형 부뚜막의 조형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부뚜막은 후

   단벽 쪽구들→측장벽 쪽구들→모퉁이 쪽구들→일자형부뚜막으로의 계기적 변천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모퉁 이 쪽구들→일자형부뚜막으로의 변화를 3세기 전·중엽 경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확인된

   수량이 매우 소략하여 이 형식이 확인되지 않는 유적의 경우 모퉁이 쪽구들이 생략된 채 측장벽 쪽구들에서

   일자형부뚜막으로 변천된 것인지, 일자형부뚜막의 출현에 있어 다른 루트로 전달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

   다.

4) 지방 유적에서 기대는 횡성 읍하리유적(연세대학교 원주박물관 2013)과 충주 탑평리 유적(국립중원문화재연

   구소 2012), 포천 자작리 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완형은 자작리 유적이 유일하다.

5) 영서지역에서는 일자형부뚜막이 채용되는 단계의 주거지 면적이 월등히 커지는 경향을 보여 경기북부권과

   대조를 보인다(한지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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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주제/ 임진강 유역, 분단과 평화의 고고학

    일시/ 2018.10.19.(금) 10:00 ~ 18:00

    장소/ 전곡선사박물관 강당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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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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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경기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