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전태일의 인간선언은 완성됐는가

사회 분야 『전태일 평전』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전태일기념사업회, 2009








전태일의 인간선언은 완성됐는가


현미 - 동아일보 출판국 디지털플러스팀장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앨범에 수록된 노래「사계」의 첫 구절이다. 경쾌한 리듬에 실린 처연한 가사가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이 노래는 산업화 시대 여공의 애환을 그린 대표적 민중가요로 꼽힌다.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에 이르면, 햇빛 한 줌 들지 않고 허리 한 번 제대로 펴기도 힘든 천장 낮은 비좁은 작업장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재봉틀을 돌리는 미싱사(재봉사) 언니와 그 옆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실밥을 뜯고 다림질하는 어린 ‘시다’의 창백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것이 1964년 봄 열여섯 살 ‘시다’ 전태일이 목도한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현실이었다.


1991년에 출간된 『전태일 평전』에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실려 있다. 1966년과 1967년 사이 겨울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에서 작은 석유난로를 둘러싸고 여섯 명의 청년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활짝 웃고 있지만 앉아 있는 그들 머리에서 천장까지 거리는 불과 두 뼘. 여기가 바로 악명 높은 평화시장 다락방 작업장이다. 원래 높이 3미터 정도인 방에 수평으로 칸막이를 쳐서 방 두 개를 만들어 다락방 높이가 1.5미터도 안 됐다. 성인이 허리를 펴고 걸어 다닐 수 없는 공간이다. 게다가 8평짜리 방에 재단판과 열네댓 대의 재봉대, 그 옆에 붙은 시다판까지 작업대만으로도 꽉 차는데 32명의 종업원이 끼어 앉아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밀폐된 닭장 같은 곳에서 하루 14~15시간씩 일하니 감옥이 따로 없었다. 아쉽게도 이 사진은 2009년 『전태일 평전』 신판에는 실리지 않았다.


열악한 작업장 환경과 장시간 중노동보다 더 노동자들을 괴롭힌 것은 저임금이었다. 시다들은 교통비를 제하면 점심값도 안 되는 월급을 받았고, 그나마 정액월급제가 아니라 작업량에 따라 지불되는 도급제이다 보니 일감이 적을 때에는 사장님 눈치를 봐야 했다. 장사가 잘 안되면 닷새나 열흘씩 임금이 체불되거나 아예 못 받는 일이 허다했다. 노동자들은 몸이 망가지건 말건 당장 한 푼을 위해 더 길게 더 많이 일하려 했다.


전태일은 시다로 시작해 미싱사, 재단사보조, 재단사로 차근차근 몸값을 높여갔지만 딱한 처지의 어린 시다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점심을 굶는 시다들에게 버스 값을 털어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두세 시간을 걸어 통금 시간을 넘겨 집에 도착하는 일이 잦았다. 몸이 아픈 시다를 일찍 집에 보내고 대신 작업장 청소를 하다 주제 넘는 짓을 한다며 사장 눈 밖에 나 해고를 당했다.


어느 날 선량과 성실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 있었다. 미싱사가 작업 도중 새빨간 핏덩이를 토했다. 폐병 3기였다. 평화시장에서는 흔한 직업병 중 하나였다. 그 여공은 해고당했다. 1969년 겨울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전태일은 이 잔인한 노동 조건을 바꾸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려면 조직이 필요했고 법을 알아야 했다. 낮이면 틈틈이 재단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를 조직했고, 밤에는 판잣집에서 ‘근로기준법’ 조문을 뒤지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는 분노했다. “8시간 노동제는 다 무엇이며, 주휴제, 야간작업 금지, 시간외근무수당, 월차휴가, 연차휴가, 생리휴가, 해고수당 따위가 다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법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란 말인가?” 허울 좋은 법의 위선을 폭로하려면 누군가는 앞장서야 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시작되기 직전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 이렇게 쓴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간절한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화염 속에 쓰러졌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뚱이를 근로기준법 화형식의 불쏘시개로 삼았다. 스물둘의 젊음을 불살라 ‘인간선언’을 한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서울대 법과대 학생들이 ‘민권수호학생연맹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그의 시신을 인수해 학생장으로 장례식 거행을 추진했다. 각 대학별로 추도식, 항의집회, 철야농성이 이어지고 종교계가 가세하면서 갈수록 투쟁은 격렬해졌다. 그동안 현실의 질곡 아래 짓눌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노동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금기어처럼 여기던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입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 제일 큰 변화였다.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 집필을 시작한 것은 1974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들이 남긴 다섯 권의 일기장과 자료를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은신하던 조영래에게 전달하면서부터다. 조영래는 꼬박 3년 동안 1948년생 전태일이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죽어갔는지 기록했다. 이로써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 됐다. 하지만 그것이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걸렸다.


1976년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쓴 원고가 완성됐고 딱 다섯 부만 복사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국내 출판이 불가능하자 원고는 일본으로 건너가 1978년 일본어로 된 책이 먼저 나왔다. 저자는 집필자 조영래와 기획자 장기표의 이름에서 하나씩 따서 ‘김영기’로 했다. 1982년 청계피복노조 전 간부 민종덕 씨가 돌베개 출판사에 전한 복사본 원고가 1983년 6월『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저자 이름 대신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위원장 문익환) 엮음’으로 세상에 내보내야 했다.


이 책이 온전한 제목과 저자를 되찾은 것은 1991년 1월 개정판부터인데, 조영래 변호사는 개정판 발간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 책날개에는 ‘고인’으로 소개됐다. 이 책은 2001년 2차 개정판이 나왔고, 2009년 4월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신판을 펴냈다. 이처럼 지난했던 책의 출간 과정을 설명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발전 단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019년 오늘. 전태일이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워 인간선언을 한 지 49년, 조영래 변호사가 그 삶을 기록한 지 43년, 한국에 『전태일 평전』 초판이 나온 지 36년. 전태일의 인간선언은 완성됐는가. ‘오늘 전태일은 어디서 불타고 있는가?’ 조영래가 49년 전에 던진 물음을 우리는 아직도 안고 살아간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청계, 내 청춘』

안재성 지음, 돌베개, 2007


『자본주의와 노사관계』

강수돌 지음, 한울아카데미, 2014


『송곳』

최규석 지음, 창비, 2017







김현미 - 동아일보 출판국 디지털플러스팀장



1989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로 입사해 주로 교육과 문화 분야 취재를 담당했으며 신동아, 주간동아, 여성동아, 출판 편집장을 모두 지냈다. 특히 동아일보 내 단행본 기획자로 재직 시 미디어와 책의 결합에 주목해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밀리언셀러 및 스테디셀러를 탄생시켰다. 현재 동아일보 출판국 부국장으로 잡지 콘텐츠의 디지털 전략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편집위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 등을 지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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