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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고려시대의 길 (1)

길의 기원과 고려시대 이전의 길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서영일(한백문화재연구원 원장)

사람이 생활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길이다. 현대의 도시와 마을은 그 내부는 물론 외부로 연결되는 많은 길들이 있고 이를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생업과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사방팔방으로 다양한 길들이 있지만 공기와 같이 평상시에는 얼마나 소중한지 잊고 지낸다. 하지만 공사나 자연재해 같은 이유로 일시적이나마 그 길이 막히면 생활 속에 어려움을 비로소 크게 느끼게 된다. 길은 경제활동을 통해서 생활필수품을 얻고 주변 지역 및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수단이다.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유지하면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길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선사시대의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은 도시와 국가가 등장하면서 그 활용과 의미도 확대되었다. 도시나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킨 것은 권력이었다. 권력은 사람이나 자원을 모으고 분배하는 힘이다. 도시나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사람과 물자는 물론이고 그것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길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이후 길은 도시나 국가의 혈관이라고 여겨져 왔다. 도시나 국가가 발전하고 그 속에서 경제와 문화가 번성할수록 길의 정비가 더욱 촉진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길의 발달과 활용은 일종의 문명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마을이 등장하고 청동기 문화 단계에 이르면 권력이 등장하였다.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등장하고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이어져왔다. 인류사의 보편적 발전 단계와 다르지 않다. 길의 정비와 활용 역시 다른 세계의 여타 국가와 다르지 않은 발전 과정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이전 한국의 길에 대한 오해

아직도 19세기 이전 한국의 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더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조선시대 이전에는 변변한 길이 없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상당하다. 그러한 인식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사례가 ‘지게’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지게는 한국의 전통적인 운반도구로 얼마 전까지도 광범위하게 쓰였다. 지게의 과학성과 활용성을 미화하기도 하지만 수레와 비교해서 일종의 가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국 현대의 대표적인 문학가 중 한사람인 이어령은 󰡔흙속에 저 바람 속에󰡕(1963년)라는 수필집 속에 실린 「지게를 한탄 한다」는 글에서 지게는 수레가 부족하고 다닐 수 있는 길도 없고 만들지도 않았던 데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았다.

지게의 용도와 효용성은 산길, 논두렁 길 등에서 최고였으니 이러한 인식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길이 없었던 것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조선시대에 어떤 길이 있었고 그것이 왜 폐허가 되었는지 그 당시로서는 이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일제가 건설한 ‘신작로’ 이전에는 한국에 길(도로)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까?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국토개발은 전국토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작로’는 ‘새로 만든 길’이란 의미로 그 이전의 ‘옛길’ 또는 조선시대 이전의 길과는 구분되는 의미이다. 신작로가 한국의 근대화된 교통체계를 만드는 데 공헌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신작로의 의미를 너무 과도하게 부여하여 그 이전에는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논리적 비약이다. 길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국가 기능이 약화된 결과이다. 그것이 국가 기능을 약화시킨 원인이 아니다.

조선시대 국가가 관리한 길은 역도이다. 조선 초기부터 역제를 정비하고 역도를 대로, 중로, 소로로 나누고 관리하였던 흔적은 곳곳에 보인다. 서울 살곶이 다리, 진천 농교 등 교량도 있다. 정조의 화성 행차 장면을 그린 그림 속에는 넓은 길과 한강의 부교가 있다. 왕이 행차를 위해 임시로 부교를 설치하고 해체하였다. 이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더구나 상상도 아니다. 실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지 않았다거나 길이 없어서 지게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부는 맞지만 다 맞는 말이 아니다.

최근 고고학 조사에서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길들이 전국에서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길이 있었고, 길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였던 관리 능력의 부재가 지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중앙정부가 모든 기초행정단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한 중앙집권국가의 등장 시기를 삼국시대, 늦어도 통일신라시대로 파악하고 있다. 지방관을 파견하고 지방을 관리하는데 가장 필요한 수단이 바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체계, 그 중에서도 길이다. 중앙의 행정 명령을 전달하고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국가 운영의 핵심이며 그것은 길을 통해서 가능하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관도, 고려와 조선시대 역도(역로) 등이 그런 역할을 하는 길이었고, 그 길의 관리와 유지를 담당한 부서와 관리들이 존재했다. 길을 만들고 관리할 수 있는 국가 재정이 유지될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9세기 조선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심하였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조세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다. 국가 기간도로였던 역도를 관리할 능력도 없었다. 그 결과 길은 점차 엉망이 되었다. 19세기 말 조선에 도착한 서양인들에 눈에 비친 가장 형편없는 조선의 모습은 바로 길이었다. 그들은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 몰랐다.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낙후된 이유를 형편없는 도로 때문이라 생각했다. 한국의 위정자들은 길을 만들려는 의지도 없고 그들에 순응한 착한 백성들은 그 때문에 가난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일제는 식민사관을 내세워 한국은 길도 만들지 않는 미개한 나라였다고 왜곡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전근대 국가의 길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관리되고 유지되었는지 구체적인 사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고려시대의 길을 중심으로 그러한 편견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길의 기원

길은 언제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길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오래된 의문이다.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누구나 동의하는 일반적인 것은 아직 없다. 그나마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야생동물 통로 기원설’과 ‘원시인 이동로 기원설’ 등 이다.

야생동물 통로설은 야생동물의 이동로를 사람이 이용하면서 길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이 북아메리카 대평원의 인디안(Plains Indian) 길이 미국 횡단철도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대평원의 인디안은 무리지어 이동 생활하는 들소를 사냥하여 그 고기, 뼈, 가죽 등을 식량과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였다. 들소 떼는 계절에 따라 먹이를 찾아 이동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를 사냥하는 인디언들도 역시 그 길을 이동하면서 살았다. 이 길을 일명 인디언 통로(Indian Trails)라 부른다. 인디언 통로는 후대에 서부개척민들이 이주하면서 그 이동로로 사용되었으며 미국의 대륙횡단철도의 모체가 되었다. 들소 떼의 이동 통로가 미국 철도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다.

원시인 이동로 기원설은 인류의 길의 기원을 신석기시대로 보고 있다. 구석기시대까지 인류는 이동 생활을 하였지만 신석기시대부터 마을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농경이 시작되면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떠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신석기시대에도 농경이 확대되어 완전한 정착생활이 가능하기까지 식량을 구하기 위해 계절에 따라 몇 군데 거주지를 번갈아 이동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이동하던 길이 이후 완전한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고 마을이 고정되면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주변 지역에서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는 길로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고학 자료를 살펴보면, 이미 신석기시대에 식량이나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바닷가와 내륙 사이의 근거리 이동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드물지만 원거리 교역의 흔적도 보이고 있다. 사람이 일정 지역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다. 마을을 이루어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일정한 생활 구역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서 접근할 수 있는 자원도 제한되었다. 부족한 자원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주변지역과의 교역이나 교류가 불가피하였다. 결국 교류 및 교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하였다.

이 밖에도 각 지역의 자연 환경이나 인문 환경 등 다양한 요인으로 길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길의 처음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목적으로 비롯되었던지, 식량이나 생활에 필요한 각종 필수품을 얻으려는 행위와 관련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길은 사람들의 경제활동과 관련되어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정기적으로 또는 반복적으로 왕래할 수 있는 길이 등장하여 이후 그 기능과 의미도 점차 확대되었다.

고려시대 이전의 길

최근 경주나 부여 등지에서는 유적의 정비 및 도심 개발 등 여러 이유로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삼국시대 도로나 교량도 발굴되었다. 경주나 부여 등지는 당시 왕경이었다. 왕경의 도시 계획과 시설 등은 국가의 주도 아래 추진되었다. 관청, 시전, 사원, 민간 주택 등 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건물을 서로 연결하여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는 길의 건설과 유지에 국가의 관심과 역량이 집중되었다. 출토 된 길은 차(수레)도와 인도가 구별되고 노면은 수레가 다니기 편리하도록 포장까지 하였다. 그 위에 수레가 지나가서 생긴 바퀴 자국도 선명하였다. 그 덕분에 수레의 크기나 종류, 이용 방법도 일부 짐작할 수 있다.

경주나 부여는 왕경이라는 특수한 지역이기에 길을 잘 만들고 유지와 관리도 철저하였을 것이다. 그 외에 지방은 사정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지방에서도 삼국시대의 도로가 출토되었다. 경산지역에서도 신라시대 도로가 출토되었다. 신라 국원소경이 있었던 충주 탑평리에서도 시가지와 도로가 출토되었다. 서울 구로 지역에서도 삼국시대 도로가 출토되어 주목되기도 하였다. 이밖에 도로의 출토 사례는 더 있다. 이러한 도로들은 삼국시대 지방 도시나 마을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도로가 존재하였던 사정을 알려주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서울 세곡동 신라 마을 유적에서는 마을 안길에 여러 번 왕래한 수레바퀴자국이 도로와 같이 출토되었다. 춘천 중도에서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경작지 가운데에서 농로가 출토되었다. 농로에도 역시 수레바퀴 자욱이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수레 사용을 위한 길이 마을은 물론 경작지 내부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광범위한 도로망과 수레 사용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소지왕 때 우역제를 실시하고 관도를 정비하였다. 관도는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길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경주 주변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오문역(五門驛 : 곤문역·태문역·건문역·감문역·간문역) 등의 이름과 오통(五通 : 동해통· 북해통·해남통·염지통·북요통) 등 길의 이름도 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의 기록에 의하면 김유신은 662년 평양성에 고립된 당군에 식량지원을 위해 2,000여 대의 수레에 군량을 싣고 경주에서 평양으로 행진하였다. 중도에 추위를 만나서 수레를 끌고 가기 어렵게 되자 군량을 말과 소에 실어서 운송하였다. 2,000여 대가 넘는 수레가 지나갈 수 있는 튼튼한 도로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실크로드 /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이러한 기록과 고고학 자료 등으로 미루어 보면 삼국시대부터 왕경과 지방을 연결하는 큰 길은 물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관련된 근거는 부족하지만 이러한 길에 수레와 같은 교통수단과 역과 같은 교통시설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전쟁과 상업이 길의 발달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주목된다.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서 길을 개척하고 장악하였던 사례는 많다. 비단길, 초원길, 차마고도 등이 바로 그런 이유로 생겨나서 동서간의 교역을 위한 길로 활용되었다. 국가가 등장한 이후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이 빈번해지는데, 이 때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길이 크게 발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마의 길이다. 로마에서 정복지까지 군대와 보급품을 운반하기 위한 포장된 넓은 길이 만들어졌다. 현재에도 유럽 곳곳에서 당시의 포장도로가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 사이에 국가의 생존을 건 전쟁이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위정자는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물자를 최대한 집중하여 효율적으로 운영하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 진군로나 군사보급로 등이 새로 개척되고 운영되었다.

신라에서 길의 건설과 관리는 처음에 군사업무를 담당한 병부에서 담당하였다. 이후 육로는 승부, 수로는 선부 등의 담당 관청이 생겨났지만, 애초에 병부에서 길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던 것이다. 이는 군사 활동이 교통로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백제와 고구려는 이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이 없어 사정을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의 국가 발전 단계는 서로 비슷하고 신라의 사례에 비추어 보아 군사를 담당한 관청에서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신라 관도는 왕경에서 지방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관도는 왕경과 지방을 잇는 혈맥과 같은 것이었다. 관도를 활용하는 것은 주로 국가의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와 군대였다. 관도를 이용하는 군인과 관리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역과 같은 교통 시설이 있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역과 같은 시설도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역에서는 말과 배 같은 운송수단도 제공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발발하면 관도는 군사 이동과 병참을 위한 보급로로 활용되었다. 관도가 지나가는 곳에는 경주에서 변경까지 산성이 줄지어 연결되어 있었다. 삼국이 통일되고 전쟁이 끝나면서 산성은 지방 통치의 중심지로, 관도는 경주와 지방을 잇고 행정 명령을 전달하고 조세를 수송하는 길로 기능이 변화되었다. 이후 신라시대의 관도는 고려시대 길의 모태가 되었다. 나아가 신라시대의 길이 한국 전통 길의 골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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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201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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