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리본(Re:born) 파티

용인_김창환, 노동식, 배상욱 작가의 작업실




동천동 작업실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이 방문했던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도시들은 실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도시들이 아니라 가상의 도시들이다. 칼비노가 보기에, 하나의 도시에는 수많은 기억, 욕망, 기호 등이 얽혀있으며, 이를 해독하는 방식은 극히 다양하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칼비노는 그 다양한 얽힘 들에 대해 묘사했다. 그러한 묘사는 더 이상 도시라는 공간이 단순히 정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출현과 사라짐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공간으로서 존재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시의 형태는 그 목록이 무한하다. 모든 형태가 자신의 도시를 찾고 새로운

        도시들이 계속 탄생하게 될 때까지, 모든 형태의 변화가 끝나고 나면 도시의

        종말이 시작된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도 그 불안정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건설될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말 현재 건설공사가 한창인)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그 불안정한 움직임을 오롯이 겪고 있는 예술가들이 있었다. 김창환, 노동식, 배상욱 작가가 그들이다. 그들은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새로운 도시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사라지게 될 또 다른 도시, 두 번 다시 재건될 수 없을 과거형의 도시로서의 동천동 작업실을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7년 전 처음 이 작업실에 둥지를 틀었던 김창환 작가는 이곳이 그 당시 아주 절실했던 순간에 자신에게 찾아온 보석 같은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만학도로서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절 보일러수리공이나 건축공사현장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느라 고된 하루하루를 보냈던 그에게 작업실이라는 공간은 삶에 대한 성찰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공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그는 작업실이 ‘인내의 공간’ 이라고 정의한다. 자신과의 싸움을 견뎌나가고 있는 작가의 고통스럽지만 값진 시간들이 이 공간에 가득 차있었다.

동천동 작업실은 김창환, 노동식, 배상욱 작가가 함께 작업하는 공동 작업실이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쉐어 하우스가 성행하고 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미술계에는 협업, 공동 작업등의 작업 방식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이 있었고, 어느 덧 그러한 작업 방식은 안정적인 궤도에 이르러 지금은 지극히 익숙한 풍경이 되어 있다. 그리고 작업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일 또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에는 서툴다. 동천동 작업실 곳곳에는 그 함께 살아보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손으로 쓴 작업실 수칙이라는 낡은 종이가 입구에 붙어 공동 작업실의 매력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작가 모두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는 것에 분명히 장점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배상욱 작가는 혼자 작업할 때 매너리즘과 같은 어려운 순간들을 맞닥뜨렸을 때, 술 한잔기울여가며 고민을 풀어놓고 서로 도와줄 수 있는 뜻이 맞는 친구들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작업을 함에 있어서 큰 위안이 된다고 했다. 사실 세 작가들은 모두 조각을 주요 매체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각각 철, 솜, 나무라는 판이한 재료들에 대한 물성을 탐구해오고 있다. 서로가 다루는 물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는 방식도 다르다보니, 자신이 미처 풀지 못한 지점들에 대한 힌트를 서로에게서 얻기도 하며, 때로는 그저 불안한 심경을 다독여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어준다고 했다. 이렇듯 작업실이라는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사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처음에 동천동 작업실에 대한 사연을 듣기 전까지는 한 장소가 완전히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하는 상황에 대해 그리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사연을 듣고서 동천동을 처음 찾았던 날, 낡디 낡은 곧 철거를 앞둔 각종 인근의 시설물들이 모두 애처로워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신문지면에 동천동**아파트 대단지를 분양한다는 광고를 보는 순간, 아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김창환 작가는 동천동의 교통이 사통팔달 편리해서 워낙 잦은 전시와 미팅으로 외부 활동이 잦은 작가들에게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고 아쉬워했다. 사실 이곳만큼이나 조용하면서도 월세가 저렴하고 교통까지 편리한 곳은 아마 수도권에서 다시 찾기 힘들 것 같다고 한다.



뭐, 어찌됐든 이제는 각자의 새로운 둥지를 찾아 나설 때가 되었고, 그날 저녁에는 동천동 작업실과 멤버들의 다시-태어남(Re-born)을 응원하는 리본파티가 열렸다. 참여자들은 다양했다. 평소에도 늘 작가들을 응원해주었던 지인들에서부터, 이곳에 처음 와보는 어린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 그리고 몇 년 째 지내면서도 여전히 데면데면했던 이웃들까지 가세했다. 그리고 이미 담담하게 이 전환기를 받아들인 작가들은 동천동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보금자리에 대한 설렘과 기대를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그곳을 찾았던 모든 참여자들은 동천동에 대해 작가들이 들려주고 보여준 기억들을 공유하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간직하기로 약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억의 과정들을 가시화하기 위한 어떤 특별한 행사를 억지로 만들거나 진행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 기억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탓에 그것들을 참여자들 각자가 스스로 체화해내는 데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벅찬 표정들이었다. 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동천동 작업실은 딱 하루 저녁 다 같이 모여 모두의 눈에, 귀에, 그리고 마음에 작업실에 대한 기억을 조용히 묻어두기로 했다. 먼 훗날 우리가 기억 속의 동천동은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곳일지라도, 분명 이곳에 자리했던 이들은 그곳에 예술가들이 있었음을 증명해 줄 수 있으리라.



행사가 끝날 무렵 세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를 물어보았다. 김창환 작가는 경기도 양평에 새로운 작업실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새로운 작업환경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배상욱 작가는 김창환 작가의 새로운 작업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작업실을 하나 마련했다고 한다. 아마도 오랜 동지를 멀리 떠나보내지 못할 것 같았나보다. 이들과 달리, 노동식 작가는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또 다른 공동 작업실에 입주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아마도 공동 작업실이 갖는 매력에 흠뻑 빠진 모양이다. 그리고 세 사람은 서로의 앞으로의 행보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음을 눈빛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난 뒤, 김창환 작가가 그들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이미 리본파티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작업실을 완전히 비웠고 지금은 각자의 보금자리에 정착하느라 애쓰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동천동 근처를 지나는 길에 이제는 과거형이 된 동천동 작업실을 들렀는데 여기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요.”라고 한다. 그리고는 수 초간 우리는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고 침묵이 흘렀다. 그 짧은 순간 우리의 머리와 심장을 스쳐갔던 감정은 얼추 비슷했을 것 같다. 통화를 끝내고 난 후, 작가는 나에게 몇 장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천동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보금자리가 지어지고 있는 경기도 양평 현장 사진 한 장도 마지막에 덧붙여주었다.



그렇게 동천동에는 새로운 도시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경기도 양평에 작가는 새로운 작업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이 꿈틀대는 도시의 불안정한 꿈틀거림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그리고 더 이상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그 불안정한 사태에 익숙해진 만큼 어쩌면 그 상황을 그저 무심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건 아닐까? 도시의 외피 아래 켜켜이 쌓인 채 무질서하게 뒤엉켜 있는 기억, 욕망, 기호들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들여다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슬픔, 분노, 기쁨 등의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기억들도 함께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동천동의 하루 저녁을 물들였던 리본 파티는 동천동이라는 공간의 한 결이 되어 우리의 기억 한편에 어떤 뭉클한 감정을 심어주었고, 언젠가 문득 화려한 동천동 아파트 단지를 지나가면서 그 기억을 끄집어내어 볼 때 그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나리라 믿는다.


글 김나리 독립기획자/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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