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간적인 리얼리스트,

김래환 작가를 만나다.

김래환 작가는 최근 몇 년간 동탄 아트마켓 총감독, 두 도시의 기억 총감독 등 다양한 예술 행사 혹은 축제들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하느라 누구보다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혹자는 예술가란 모름지기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 특히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수작업에나 몰두하는 것이 미덕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래환 작가에게 이 모든 활동들은 그의 작업세계와 무관하지 않은 창조적 영역임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관객들이 모여서 만들어낼 시간과 공간에 대한 밑그림을 구상하고 실현해내는 일련의 과정은 일종의 창작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탓이다.

그리고 여기 그의 또 다른 작업이 있다. 경기도 용인에 터를 잡고 수년에 걸쳐 정성을 다해 그가 다듬어낸 작업실 또한 그의 또 다른 창작품이다. 가족들과 함께 지낼 공간과 실제로 작품구상에 집중하면서도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구상하며 구석구석 직접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는 그의 작업실에는 여태껏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축제현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김래환 특유의 에너지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다만, 본격적으로 작업실을 공개하기에 앞서, 우선 김래환 작가가 누구인지 소개부터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기실 그는 20대의 이른 나이에 사업가로 활동하며 충분히 안정적인 인생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랬던 그가 돌연 예술가의 길을 걷겠노라 선포하고서는 90년대 중후반 당시만 해도 여전히 유학생이 드물었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유학생활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녹록지 않았고,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그의 이마에 늘어난 주름과 빈 주머니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저 작업장에 틀어박혀서 자신의 작업을 누군가 알아주기만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어디든 나가서 스스로를 알려야 했다. 그러나 조급해하면 할수록 어디서부터 어떻게 작가로서 데뷔를 해야 하는 건지, 어떤 전시에 참여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더 막막해져 갔다. 벼랑 끝에 선 그의 머릿속에 불현 듯 떠오른 것은 ‘직접 전시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자신만큼이나 답답함을 호소하는 다른 작가들의 심정을 헤아려 함께 전시를 하고 나만의 예술계를 나름대로 만들어보겠다는 패기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패기에 그의 열정이 더해져 10여 년째 그는 전시기획자이자 작가로서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남들은 하나도 벅차다는 기획자와 작가라는 두 가지 역할을 그는 어떻게 동시에 소화해내고 있을까? 작가는 한시도 가만히 쉬는 법이 없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로 낮잠이란 걸 자본적이 없다고 하니 그제야 이 남자가 사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 쉬는 시간이 오히려 불편하고 불안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 한적한 시골마을에 가로놓인 그의 작업실에조차도 그의 특유의 바지런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꽃밭과 텃밭은 모두 직접 관리한다고 한다. 그곳에는 누가 봐도 정성스럽게 기른 것임에 틀림없는 제철 꽃들과 야채들이 풍성했다. 어떻게 이걸 다 관리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이내 그는 쑥스러워하며 털어놓는다.

“사실 어머니가 꽃을 엄청 좋아하세요. 철마다 꽃밭 매만지는 게 보통일은 아니죠. 그래도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절로 힘이 나서 할 수 밖에 없어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작품활동과 기획활동을 모두 이어갈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배려와 애정으로 무장한 지극히 인간적인 감성이었다.

언젠가 나는 작가에게 왜 하필 유학지로 중국을 선택했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가 중국으로 떠났을 때는 중국의 문화개방이 이루어진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가 미술 전공자들이 주로 유학지로 택하는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중국으로 떠난 것은 다름 아닌 ‘리얼리즘’에 매료된 탓이 컸다고 한다. 이때 그가 매료되었다던 그 리얼리즘이란 것은 ‘자연충실’이라는 의미에서의 기법적인 리얼리즘이었다. 문화개방을 선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에는 여전히 선전적 선동적 예술형식들이 추구했던 리얼리즘 기법의 흔적들이 남아있었고, 그 흔적들을 김래환 작가는 온전히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흔적들은 작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리얼리즘’ 양식을 형성하는 단초가 되었다.

유학시절 그의 작업들은 형식적 리얼리즘에 충실한 경향을 보인다. 그의 손을 거친 인물 조각상들은 나무라는 질료를 중심으로 지극히 사실적인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초창기 실험작들은 여전히 그의 작업실 구석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외관상 자연의 모방에 충실하다는 것만으로는 그의 이러한 리얼리즘적 실험들을 온전히 설명해내기 힘들다. 차라리 그의 리얼리즘적 실험들은 정신적으로 세계를 올바르게 포착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성 싶다. 예술작품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역사기술이다. 그 작품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기술된 역사를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래환 작가는 사실적인 두상 하나, 흉상 하나, 전신상 하나를 만들면서, 그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워내고 싶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쉬운 언어로 대중들과 소통할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가 오랜 유학생활을 끝내고 국내에 정착하면서 시작한 고양이 시리즈에서는 김래환 작가 특유의 리얼리즘 양식이 본격적으로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인물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도 지속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모색하는 현실과 예술의 접점은 그의 최근작, 고양이 시리즈에서 한층 더 구체화되었다. 세상만사에 대한 간접적인 풍자를 담아낸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남녀노소 누구 할 것 없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제재로 고양이를 택했던 것이다. 고양이 조각들은 흡사 작가의 너털웃음을 닮았다. 사랑스러운 고양이 조각들은 생각만 해도 분통터지는 숱한 사회적 결함들을 유쾌한 조형언어로 무장한 채 보는 이의 가슴 깊숙한 한편을 조용히 울려댄다.

본격적인 가을을 알리는 10월의 첫 번째 토요일, 수많은 인파가 고양이들의 근거지를 기습해 그 울림을 경험했다. 김래환 작가의 용인 작업실 앞마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방문객들은 고양이 조각들과 마주했다. 그의 고양이 조각들은 모두 한결같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다. 우리는 고양이들이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무엇을 응시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그 제스처에서만큼은 늘 유쾌함을 느낄 수 있다. 그 덕분에 그 조각들을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는 미소가 걸리지만 어느새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한 울림이 서리고 만다. 그리고 이날, 작가는 각자의 마음속에 번져가는 그 불안정한 울림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이고 다 함께 치유해보는 시간까지 마련했다. 가슴이 먹먹한 현대인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가는 허수아비 만들기와 퍼포먼스 공연을 준비했다.

기실 작가의 작업실은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벌써 이곳에 터를 잡은지 몇 년이 지나도록 작가는 여전히 그 주인들과 일면식도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부재하는 이웃과 소원한 현실이 서글펐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인간세계의 문제들을 실타래 풀어나가듯 하나씩 풀어나가려는 의도로 그는 허수아비 만들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작업실을 방문한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다함께 헌옷가지들로 어느새 수많은 허수아비들이 뚝딱 완성되었다. 그저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며 풍년을 염원하는 그 허수아비는 마치 더 나은 내일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더불어, 이날만큼은 나와 타자 간의 소통을 이루어내는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참여자들은 다 같이 인근의 논밭에 다가가 그 허수아비들을 꽂아두었고, 그것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논밭의 주인들과 그날의 손님들이 나누는 첫 인사가 되었다.

또한, 특별한 손님이 축하 무대를 선사해 주었다. 한국의 퍼포먼스 예술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있는 신용구 작가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이날 그가 선보인 작품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는 꿈과 희망을 잃은 현대인들의 상실감을 위로하는 설치와 퍼포먼스가 결합된 장소 특정적 작품이다. 그는 주로 인간과 자연의 교감 속에서 떠오르는 생명과 관련된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의 날개를 통해 욕망에 의해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꿈과 희망을 형상화하였다. 태양을 향하던 이카루스의 날개가 바다로 추락하는 절망의 순간을 퍼포먼스로 풀어낸 그의 퍼포먼스를 통해 이번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의 참여자들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가능한 세계를 다시 꿈꾸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울림과 치유를 경험하고 먹먹함을 품은 채 떠나는 방문객들에게 김래환 작가는 풍성한 국화꽃 한 다발씩을 가득 안겨주었다. 무엇이든 타인에게 베풀고 주는 데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그는 일 년 내 애지중지 길러온 보라색 국화꽃밭을 통째로 선물했다. 아깝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두 손을 휘저으며 이 국화꽃 한 다발이 단 한 사람의 단 1초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기꺼이 모두 주겠노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애정 어린 시선과 손길로 인간을 바라보고 이웃을 보듬느라 분주한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이유이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기대어 사는 방식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는 가장 리얼한 리얼리스트의 모범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글 김나리 독립기획자/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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