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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조선의 개혁안을 제시한 경세가 유형원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성호 이익 인정(仁政)과 안민(安民)의 경세론



좌절한 청년, 실학의 길을 열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부친 이하진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이익의 선대는 서울 경기지역에서 현달한 가문으로 활동했지만, 18세기이후 치열했던 중앙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부친과 친형이 화를 당하면서 세상에 나아갈 꿈을 접어야 했다. 세상에 좌절했던 청년 이익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였다. 이 방랑길에서 그는 백성이 당면한 현실을 직접 보고 들으며 훗날 개혁론을 구상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현실 비판, 개혁론의 출발

이익은 자신의 집안이 겪은 정치적 참화의 원인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붕당론(朋黨論)으로 정리했다. 정쟁과 관련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밥그릇은 하나뿐인데 굶주린 사람이 열이라면 싸움이 일어난다. 과거 급제자는 늘어나지만 관직은 제한돼 있으니 벼슬을 놓고 무리지어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단이 이러했으니 대책도 달랐다. 우선 과거제와 관료제를 개혁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양반에게 다른 호구책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후일 실용과 실천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의 학문을 수립해 나간 출발점이었다.


성호 이익 초상





인정(仁政)과 안민(安民)의 경세론


이익은 주자학이외에 양명학, 고증학 등 다양한 사조에 대한 연구와 함께 서양의 지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새로운 학문세계로 나가기 위해 제자들에게 사설(師說)을 따르지 말고 스스로 터득하는 자득(自得)과 회의의 학문 태도를 중시했다. 특히 성호 이후의 학자들은 대개 서양의 문화적 자극으로 학문적 사유를 더욱 진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지구설을 받아들여 중화를 중심으로 한 위계적 세계관을 극복해 나갔다.


18세기이후 사회경제적으로 중앙 벌열과 결탁한 독점상인에게 부가 집중되고, 농촌에서는 소수의 부농이 대규모 농사를 지음으로서 대다수 농민은 작은 경작지마저 얻기 힘들었다. 분배의 불균등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민생을 위해 국가 경영의 틀을 새로 짜는 경세학이 지극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익은 국가의 인정(仁政)과 안민(安民)과 균(均)의 정책 이념을 발전시켜 노비제와 특권신분층을 부정했고, 균등한 과거 시행 그리고 전체 농민의 생업 안정을 주장하였다. 그의 경세론은 ‘바다의 파도가 만리에 미친다[海波萬里]’로 언급될 정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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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학박물관 / 뉴스레터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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