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중화주의를 비판한 실학자, 홍대용

중화주의를 비판한 실학자, 홍대용


조선후기 실학자 중에서는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들이 많다. 박제가나 이덕무, 유득공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조선사회에서는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이른바 서자 출신이다. 물론,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처럼 서자가 아니라 해도 정치적으로 비주류인 남인계 출신들이 많다. 반면에 드물지만 담헌 홍대용처럼 금수저 출신의 실학자도 있다.




구도자적 삶을 지향한 선비


홍대용은 조선사회의 중심에서 출발한 인물이다. 그가 속한 남양 홍씨 가문은 누대로 정계에 진출한 노론의 핵심 문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는 보장받은 혈통인 셈이다. 그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홍대용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필자는 홍대용이란 인물을 말할 때 “주류에서 태어났지만, 비주류의 삶을 지향했던 실학자”라고 평가한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을 포기하고 비주류의 삶을 지향하기란 너무도 어렵기 때문에서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어쩌면 남다른 삶의 지향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론의 명망가 출신이다보니 스승을 정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홍대용은 어린 나이에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소재했던 석실서원이란 곳에 들어갔다. 석실서원은 안동김씨 세거지에 있었던 서원으로 북벌론의 이념적 표상이었던 김상헌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홍대용이 석실서원에서 수학한 기간은 12세부터 35세까지 23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엄격한 학풍을 내면화하면서 철저한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아울러 이 무렵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과 교유하였고, 부친이 나주목사를 하던 시기에는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청년시절에 이룩한 구도자적 삶과 과학적 탐구정신은 연행을 통하여 빛을 발하게 되었다.


 홍대용은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형적인 선비 타입의 인물이다. 세속적인 선비가 아닌 진실한 선비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그가 동시대를 살았던 선비들과 다른 점이라면, ‘명나라’여야만 된다는 아집에만 젖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뒤 조선사회는 북벌과 함께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올랐다. 전통적인 화이관에 젖은 조선 유학자들은 청을 중화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중국 연행을 다녀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홍대용이다.



실옹과 허자의 오디세이, 「의산문답」


 1765년 겨울, 홍대용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머나먼 중국 땅에 가게 된다. 그에게서 중국 여행은 세계관을 변화시킨 큰 경험이었다.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혹자는 그가 실학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모든 것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인식은 분명 근대적이고 실학적인 세계관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다녀 온 뒤 홍대용은 「의산문답」이란 글을 썼다.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소설 『의산문답』은 실제로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醫巫麗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산문답」은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풍자한 과학소설이라는 점에서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비견되는 글이다. 「의산문답」은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세속적인 허례허식과 공리공담만을 일삼는 허자의 물음에 실학적인 인물인 실옹이 답하는 대화체의 글로, 30년간 성리학을 익힌 허자가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다가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 자신이 그동안 배운 학문이 헛된 것이었음을 풍자한 놀라운 작품이다.


그렇다면 홍대용은 왜 의무려산에서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했을까? 북경 방문길에 들렸던 소설 속 배경인 의무려산은 화이(華夷)의 구분을 짓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가 의무려산에서 무한우주관을 제시한 것은 최종적으로 중국과 오랑캐, 즉 화와 이의 구분을 부정하는데 있었다. 북경 방문을 계기로 홍대용은 기존의 우주관에 회의를 품으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중요한 이론인 지전설과 무한우주관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홍대용의 우주관은 사실 금성, 수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행성은 태양 둘레를 돌고 태양과 달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우주 체계에다가 지전설만을 덧붙인 것이었다. 따라서 홍대용의 우주체계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는 “지전설은 송나라 학자 장횡거가 그 원리를 조금 밝혀냈으며, 서양 사람도 배에 타고 있으면 배가 나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론으로 추정해냈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추론은 지전설에서 멈추지 않고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우주관을 완성해 냈다.





중심주의를 해체한 조선의 지성


1636년 병자호란 이후 한 세기 이상이 지났지만, 조선사회는 여전히 중화주의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청나라는 여전히 야만국이었고 명나라의 제도를 보존하고 있는 조선은 사라진 중화의 적통이었다. 홍대용의 북경 여행은 조선 유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명분론이 비현실적인 것임을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되었다. 30년간 성리학 공부만 하던 허자가 세상에 나와 야심차게 내뱉은 말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고 허자는 곧 홍대용 자신이었다.

홍대용의 “지구는 우주의 한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우주관은 실로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식론적 대전환을 제기했다는 측면과 함께 과학적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폄하되는 면도 없지 않다. 과학자로서의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동양의 지성으로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지도를 그린 선각자였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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