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아직은 음성인,

<예술가의 코로나 처방전>9_작가 한수희

<예술가의 코로나 처방전>은 유례없는 팬데믹(pandemic) 시대, 어려움에 처한 문화예술계를 묵묵히 지켜온 작가들의 눈으로 코로나19를 이야기하는 프로젝트입니다. 17명의 예술가가 바라본 코로나19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술가의 코로나 처방전>을 통해 일상 속에 새겨진 코로나19의 아픈 흔적을 함께 나누고 치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나아가 상처를 회복하고 포스트코로나를 향해 한 발짝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예술가의 코로나 처방전>은 7월 24일(금)부터 8월 28일(금)까지 매주 월,수,금요일 지지씨(ggc.ggcf.kr)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아직은 음성인,



한수희(작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중국의 한 도시가 봉쇄되었다는 믿어지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들과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봤다. 브래드 피트가 주인공인 <월드워Z>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자 전직 UN 조사관인 브래드 피트가 이 바이러스에 대항할 방법을 찾기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는 이야기로, 내가 좋아하는 좀비 영화와 재난 영화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때만 해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마음이었지.

바이러스가 퍼진 후부터 외출을 자제하게 되었다. 여행도 한 번 못 갔다. 하필이면 이때 이사를 해야 했고, 새집과 사무실을 구해 수리하러 오가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어딜 돌아다닐 여력도 없었다. 나가봤자 돈이나 쓰고 허튼짓이나 하니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전부터 나는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는 1미터 이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가끔 그 1미터의 선을 함부로 넘어서는 사람이 나타나면 뒷걸음질을 쳤다. 이거 이거, 좀 떨어지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2미터의 거리가 권장된다.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누군가가 나타나면 불량배라도 만난 것처럼 슬슬 피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장면을 볼 때면 움찔하고 놀란다. “떨어져!” 외치고 싶다. 타인의 타액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 되었다.

병에 걸린다는 것, 치명적인 병에 걸린다는 것, 일상이 올스톱한다는 것, 세상과 격리되어야 한다는 것, 나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나는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고 걷는 수많은 타인들을 바라본다. 진정한 재난이란 이런 것이었군요.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재난이 나의 삶에 끼친 영향은 그 정도다. 어차피 나는 집과 사무실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걸어서 10분 이내,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가족과 친구 겸 직원 한 명 정도다. 인간관계가 좁고 집단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 이럴 때는 꽤 괜찮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 좀 당혹스럽지만 사람은 어떤 상황에건 결국 적응하기 마련이라서, 이제는 아이들이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학교는 필요한 곳 같기도 하고 불필요한 곳 같기도 하다. (근대식 교육이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서서히 막을 내릴 것인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을 ‘아니, 어쩌면 당연하지 않은 건가?’ 하고 의심하게 되는 데는 이만큼이나 극적인 계기가 필요하다.

아아, 기약 없어진 해외여행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지금껏 내가 다닌 모든 장소들을 생각하는 동시에 가본 적 없는 모든 장소들을 생각한다. 인생의 큰 즐거움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이지. 비행기 타는 것이 무서워진 후부터 여행은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왜 비행기 타는 걸 무서워할까?


돌이켜 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재난 영화를 좋아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 <타워링>, <딥 임팩트>, <데이라잇>, <투모로우> 같은 영화들을 눈물을 흘리며 보곤 했다. 위험이 닥쳐오고, 사람들이 달아나고, 서로를 챙기고, 서로를 내팽개치고, 결국 구조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끝내 주인공들이 살아남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우리 집이 불에 타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전쟁이 나거나 지구 멸망이 도래하면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도 생각했다(일단 이웃집 아저씨 오토바이를 훔쳐서…). 나도 재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살아남고 싶었다. 생존자가 되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는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다가 순간의 실수, 방심, 부주의, 아니면 불운에 의해 물살이나 불길에 휩쓸리거나, 무너진 건물에 깔리거나, 괴수에게 잡아먹히거나, 좀비에게 물어뜯겨 곧 남들을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불쌍한 단역은 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강렬한 열망이 자라면서 강박이 되었는지 모른다. 비행공포증이 생긴 것, 건강염려증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남들의 고통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해서 병에 걸린 사람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볼 수가 없는 것,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죽을까 무서워 다리가 떨리는 것, 그런 것들.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서 나는 뒤꿈치를 들고 팔을 뻗어 행운의 밧줄을 끌어당기려 안간힘을 쓴다. 생존자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삶은 크고 작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처럼 그것들은 숨어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루아침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지도 모른다. 알거지가 될 수도 있다.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지도 모른다. 창문을 닦다가 과욕에 발을 헛디뎌 추락할 수도 있다. 길을 걷다가 과속하던 자동차가 덮칠지도 모르고, 강도를 만나거나 사기를 당할지도 모르며,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전동차에 치일지도 모른다.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직 나는 감염되지 않았다. 나는 (아마도) 음성이다. 코로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위험에서 나는 아직 생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자연재해도, 전쟁도, 사고도, 병도, 아직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직, 아직이다.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선반 위에 해골을 올려둔 옛 사람의 기분으로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도 고통, 공포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한다. 내 소중한 이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생존자의 무리에 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창 너머로 오늘의 하늘이 보인다. 인생의 모든 운을 다 당겨 쓴 것처럼 아름다운 하늘이다.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나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 생각한다. 내가 더는 생존자가 아닐 때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생각한다. 그렇게 어느 정치학자가 쓴 대로 나는 아침이면, 아니 아침과 점심과 저녁마다, 죽음을 생각한다.



[작가 소개] _ 한수희



작가 소개 _ 한수희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온전히 나답게》,《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를 썼습니다. 《AROUND》 매거진에 책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은 많이, 글은 조금 쓰고, 끼니를 거르지 않으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더 많은 <예술가의 코로나 처방전>이 궁금하다면? [바로가기]

세부정보

  • 2020 ggc special feature <예술가의 코로나 처방전>

    기간/ 2020.07.24(금) ~ 2020.08.28(금)

    참여필진/ 박준, 이억배, 안대근, 사이다, 스튜디오 김가든, 이소영, 김정헌, 계수정, 안상수. 한수희, 원일, 장석, 강은일, 허남웅, 김영화, 김도균, 유열

    책임기획/ 노채린(경기문화재단), 김채은(어라운드)

    기획총괄/ 황록주(경기문화재단 통합홍보팀장)

    제공/ 경기문화재단 지지씨, <예술백신 프로젝트>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
경기 문화예술의 모든 것, 경기문화재단
누리집
https://www.ggcf.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