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눈먼 육친에 대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구원

문학-고전-산문 분야 『심청전』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청전』

정출헌 엮음, 배종숙 그림, 전국국어교사모임 기획, 휴머니스트, 2013







눈먼 육친에 대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구원


권순긍 -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심청전』에서 눈먼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행위가 과연 효인가, 불효인가? 아버지를 위해 몸을 바쳤으니 지극한 효(孝)임에는 틀림없지만, 죽음으로써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막대한 불효(不孝)이기도 하다. 효가 무엇인가를 설명한 『효경(孝經)』에 의하면 효의 기본은 부모가 물려준 몸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심청이는 부모가 물려준 그 몸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이야말로 불효막심한 것이다. 그런데 효의 공식대로 심청의 행위를 ‘불효’로 규정짓다 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아니, 심청의 행위가 불효막심하다니!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양미 삼백 석을 몽은사로 보내기로 약속한 아버지를 위해 심청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앞뒤 헤아려 보지도 않고 부처님 앞에 덜컥 약속한 아버지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쏘아 버린 화살이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공양미 3백 석을 바치고 부처님의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한 때 끼니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는 극도의 가난 속에서 심청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일한 재산인 자신의 몸을 팔아 공양미를 마련하는 것뿐이다.


이런 심청의 행위는 봉건적 윤리 규범인 ‘효’가 아니라,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육친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젖동냥을 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키워 준 눈먼 아비에 대한 인간적 보답, 아니 그러기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육친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그 부분을 「심청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심청이 거동 봐라. 바람맞은 사람같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뱃전으로 나가더니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내가 이리 진퇴함은 부친의 정(情) 부족함이라!’ 치마폭 무릅쓰고 두 눈을 딱 감고 뱃전으로 우루루루루루루, 손 한 번 헤치더니 강상으로 몸을 던져, 배 이마에 거꾸러져 물에 가 풍.”(한애순 창본)


심청이가 죽기를 주저하다가 ‘부친의 정’을 생각하고 과감하게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대목은 『심청가』의 ‘눈’이라 일컬어진다. 그만큼 슬프고도 처절하기에 모든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 감동은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지극히 나약하고 인간적인 심청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고귀한 자기희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무수한 작품에서 ‘하늘이 낸 효녀’란 뜻의 ‘출천효녀(出天孝女)’란 표현을 쓰고 있다. 단순히 자기 몸을 보존해서 부모가 물려준 것을 지킨다는 봉건적 윤리규범인 효를 초월하여 자기희생을 극찬한 표현이다.


『심청전』이 여느 판소리계 소설과 구별되는 특징을 찾는다면 주인공인 심청에 맞서는 적대자(Anti-Hero)가 없다는 점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춘향/변학도, 흥부/놀부, 토끼/용왕 등 인물들이 대립 구도를 보이는 데 비해 『심청전』은 심청에 맞설만한 적대자가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세계의 횡포’가 존재한다. 눈먼 아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레 만에 모친을 사별하고 저 냉혹한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어린 심청은 처절하고 가혹한 운명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양반의 후예인 심학규는 운수가 불행하여 이십에 눈이 멀고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다. 게다가 그의 부인 곽 씨는 평생 고생하다 딸 낳은 지 이레 만에 ‘산후별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이것으로 세상의 모든 고난이 끝난 게 아니다. 눈 먼 아비와 어린 딸이 헤쳐나가야 하는 운명은 더 가혹했다. 동네 아낙네들을 찾아 이집 저집 젖동냥을 다녀야 했던 심봉사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보라. 어린 애기를 안고 지팡이로 더듬거려 김매는 데도 가고, 빨래터에도 가고, 우물가에도 찾아가 젖동냥을 하여 심청을 살려냈던 것이다.


심청은 또 어떤가? 나이 예닐곱 살부터 눈먼 아비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세상 버리시고 우리 아버지 눈 어두워 앞 못 보시는 줄 뉘 모르겠어요? 십시일반(十匙一飯)이오니 밥 한술 덜 잡수시고 주시면 눈 어두운 저의 아버지 시장을 면하겠습니다.” 하며 이집 저집 구걸을 다녔으니 그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으면 심봉사조차도 “모진 목숨 구차히 살아서 자식 고생만 시킨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눈 먼 아비와 어린 딸이 벌이는 광포한 세계와의 대결은 처절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모진 운명과의 사투(死鬪) 그 자체다. 얼마나 처절했으면 신소설의 작가 이해조가 『심청전』을 일러 ‘처량 교과서’라고 불렀겠는가.


이런 모진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심청전』은 여느 판소리계 소설과는 달리 많은 환상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선 ‘영웅소설’에서나 보이는 천상계 개입과 ‘적강 모티프(Lost Paradise Motif)’를 지니고 있다. 심청은 원래 서왕모의 딸로 하늘의 선녀인데 죄를 지어 인간 세계에 유배 와서 그 벌로 모진 고난을 겪는다는 것이다. 실상 그 죄라는 것도 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복숭아를 진상하러 가다가 친구를 만나 노닥거리느라 늦은 것에 불과하니 죄랄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심청이 겪는 고난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을 준다. 마치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인 영웅이 절대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듯이 말이다.


두 번째는 용궁 환생이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가 다시 살아나 황후가 되는 얘기다. 『심청전』은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을 중심으로 모진 고난이 이어지는 전반부와 다시 환생하여 영화롭게 되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영광의 후반부는 용궁 환생으로 서막을 연다. 그리하여 심청은 저 깊은 물 속 죽음의 세계에서 화려한 삶의 세계로 환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진 고난은 끝나고 광명의 세계만이 그 앞에 펼쳐진다. 깊은 물에 들어감으로써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씻어버리고 깨끗하게 다시 태어난 것으로 ‘심청(沈淸)’이란 이름 역시 “물에 잠겨 깨끗하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기독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의식에서 물에 잠겨 죄를 씻어내고 깨끗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곧 환생이나 부활과 같은 새로운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맹인들의 개안(開眼)이다. 용궁 환생이 앞으로 펼쳐질 영광된 삶의 서막이라면 심봉사를 비롯한 맹인들의 개안은 그 절정에 해당된다. 그 장면을 보자.


“황후께서 버선발로 뛰어내려 와서 아버지를 안고, ‘아버지, 제가 정녕 인당수에 빠져 죽었던 심청이어요.’ 심봉사가 깜짝 놀라, ‘이게, 웬 말이냐?’ 하더니, 어찌 반갑던지 뜻밖에 두 눈에서 딱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두 눈이 활딱 밝았다. 그 자리에 가득 모여 있던 맹인들이 심봉사 눈뜨는 소리에 일시에 눈들이 뜨이는데, ‘희번덕, 짝짝’ 까치새끼 밥 먹이는 소리 같더니, 뭇소경이 밝은 세상을 보게 되고, 집 안에 있는 소경, 계집 소경도 눈이 다 밝고, 배 안의 소경, 배 밖의 맹인, 반소경, 청맹과니까지 모조리 다 눈이 밝았으니, 맹인에게는 천지개벽 하였더라.”(완판본)


말 그대로 모든 민중의 고통이 한순간 해소되는 새로운 광명의 세상, 곧 ‘천지개벽’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더욱이 심봉사 한 개인만 눈을 뜬 게 아니라 같은 순간 모든 맹인이 눈을 떴다는 것은 새로운 광명의 세계를 꿈꾸는 수많은 민중의 염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심청이 고귀한 희생을 통해 아비인 심봉사뿐만 아니라 모두를 구원한 것이다. 『심청전』은 이처럼 육친에 대한 사랑과 여기서 연유된 고귀한 희생을 통한 구원의 이야기로 매듭지어진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마야』

송영복 지음, 상지사, 2005


『심청』

황석영 지음, 문학동네, 2003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민음사, 2007






권순긍 -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1990년 성균관대학교에서 활자본 고소설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200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엘테 대학교에 한국학과를 창설하고 헝가리 학생들에게 한국문학과 한국문화를 가르친 바 있다. 저서로는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등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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