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능묘에 담긴 고려인의 삶과 죽음 (2)

최고 권력자가 잠든 공간, 왕릉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이희인(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Ⅱ. 최고 권력자가 잠든 공간, 왕릉

1. 개성의 왕릉

전근대 국가에서 왕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왕과 비(妃)의 무덤은 보통 사람의 것과 구별해 능(陵)이라 부른다. 최고 권력자의 무덤인 만큼 왕릉은 도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500여 년 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주변에는 현재 약 60여기의 왕릉이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능의 이름, 즉 능호(陵號)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름 대신 7릉떼 1릉, 2릉 처럼 번호로 불리는 능이 그것이다. 이렇게 왕릉을 잃어버린 것은 고려 후기 몽골과의 전쟁 그리고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관리가 부실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그 실태를 살폈으나 이미 많은 왕릉의 위치가 분명치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고려 왕릉은 고려시대부터 도굴로 파헤쳐 졌고, 이후 보수로 인해 옛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개경 7릉떼 中 3릉 / 장경희, 2018

 개성 일대의 왕릉은 옛 도성(都城) 주변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서쪽 만수산 일대에 가장 많은 능이 있어 태조 현릉과 공민왕 정릉을 비롯한 23기의 능이 자리한다. 만수산 일대의 왕릉 가운데 태조 현릉과 공민왕 현릉, 충목왕 명릉, 7릉떼 왕릉 군이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 가운데 포함되었다.

 고려 왕릉은 외형적인 면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제도를 계승 발전시킨 모습이다. 능역에 석인상과 돌짐승을 배치하고 12지신을 새긴 호석을 봉분 주위에 설치하는 방식은 중국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부 구조는 고려만의 독특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계승과 창조가 공존한다.


고려왕릉 구조 모식도 / 이승준, 2012

고려의 왕릉은 산 중턱 경사면에 터를 잡았다. 능 좌우로 산줄기가 감싸고 그 사이에 천(川)이 흘러가는 지형을 선호하였다. 평지 또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는 통일신라시대 왕릉과 능선 끝자락에 조성된 조선 왕릉과 다른 점이다. 능역은 남북 길이 3∼40m, 동서너비 20∼25m 내외로 조성되었고 산의 경사면을 따라 3~4단의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계단식 구조는 산지의 지형 훼손을 최소화 하면서 능의 위엄을 높일 수 있었다.

능역의 가장 윗 단에는 석실이 자리한다. 석실 위에는 봉분을 쌓고 주위에 호석을 두르고 돌짐승을 배치한다. 봉분의 뒷면과 측면에는 곡장(曲墻)을 설치하기도 한다. 그 아랫단에는 석인상과 장명등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제례를 지내기 위한 전각을 배치했다. 이러한 고려의 능제(陵制)는 공민왕릉에서 완성되었고 이는 조선 왕릉의 원형이 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중국처럼 왕의 사후에 묘호(廟號)와 함께 현릉, 장릉 등 우리가 익숙한 능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개경 일대의 왕릉 가운데 20여기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석실[무덤방]의 구조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왕릉은 대개 남쪽을 바라보고 조성되는데 무덤방도 이에 맞춰 남북 길이가 동서 너비보다 넓은 장방형 형태를 띠고 있다. 무덤방의 크기는 능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략 남북 3~3.5m, 동서 2.5~3m이며 높이 2m 내외로 사람이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다. 벽체는 넓고 평평하게 다듬은 판돌을 세우거나 눕혀 여러 매를 이어 구성하기도 하며 긴 벽돌 형태로 다듬은 장대석을 층층히 올리거나 작은 크기로 깬 돌로 불규칙하게 쌓기도 한다. 그러나 무덤방의 천정은 대개 판석 3~4매를 이어 붙여 평천장을 이룬다. 남쪽으로 나 있는 무덤방의 입구에는 동서 벽체에 기둥 돌을 세우고 바닥에 문지방석을 놓은 뒤 그 사이를 대형 판석으로 마감한다.

무덤방 바닥에는 전돌이나 박석을 까는 경우가 많지만 흙바닥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한다. 석실 중앙에는 관을 안치하기 위한 관대가 설치되고 옆으로 부장품을 놓는 부장대가 배치되기도 한다. 관대는 하나의 통돌로 제작되는 경우와 여러 개의 석재를 이어 붙이는 형태, 테두리 부분만 장대석으로 두르고 내부는 흙으로 채워 놓는 방식 등 왕릉마다 차이가 있다. 무덤방 내부에는 벽화가 그려지는데 천정에는 공통적으로 별자리가 그려지며 벽면에는 사신도나 소나무, 대나무 등의 식물을 그려 넣는다. 일부 왕릉에서는 그림을 그려 넣은 휘장으로 벽화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왕릉(강화 곤릉) 무덤방의 구조 / 이희인
(傳) 인종 장릉 출토유물 / 국립중앙박물관

왕릉에는 고급 자기와 도기, 청동제품이 부장된다. 목관의 겉을 장식했던 금동장식이나 못 등도 확인되어 왕릉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왕릉은 도굴의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아 온전한 부장품의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傳)인종 장릉 출토 청자 참외모양 병(국보 제94호)과 청자 합, 잔, 청동도장, 은제 수저 등을 통해 당시 왕릉의 위상과 부장품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한편 장릉 출토품으로 전하는 유물 가운데 시호를 올리고 그 내력을 대리석에 새겨 넣은 시책(諡冊)이 있어 눈길을 끈다.

개성 일대의 왕릉 가운데 상징적인 유적으로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顯陵)을 들 수 있겠다. 왕조 창업주의 능이면서 이장과 파괴, 도굴, 복원 등 왕조의 굴곡진 역사가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왕건은 67세에 세상을 떠난 뒤 궁궐의 서쪽에 만수산 기슭에 묻혔다. 그 후로 70여년이 흐른 1016년(현종 7)거란의 침입으로 왕건의 관[재궁]은 부아산(負兒山) 향림사(香林寺)로 잠시 옮겨졌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에 묻었다. 1217년(고종 4)에는 몽골군에 쫒긴 거란의 잔적이 국경을 넘어오자 다시 그의 재궁을 개경 봉은사로 옮겼고, 1232년(고종19)에는 도읍을 옮기면서 세조의 재궁과 함께 강화로 이장하였다. 1270년(원종11) 개경 환도한 뒤 임시로 개경 이판동으로 옮겼다가 1276년(충렬왕 2)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다. 왕건은 죽은 뒤에도 그가 세웠던 왕조와 명운을 같이 했던 것이다.

왕건릉과 왕건상 / 정학수

현릉은 1992년 발굴되면서 구조가 확인되었다. 구릉 경사면의 반 지하에 조성된 무덤방은 남북 3.43m, 동서 3.1m 높이 2.16m의 크기다. 남벽을 제외한 무덤방의 벽체는 화강암 판돌을 3~4개씩 세워 조성했고, 입구에 해당하는 남벽은 동·서벽 양쪽에 잇대어 판돌을 각각 1매씩 놓고 그 가운데에 나무문을 설치한 뒤 바깥을 판돌로 막았다. 천정은 고임돌을 놓고 그 위를 판돌로 덮은 형태다. 무덤방 가운데에 관대를 두고 동쪽과 서쪽에 부장품대를 각각 배치했다. 벽면과 천정에는 벽화가 남아있는데 천정에는 성신도(星辰圖)를 동벽에는 매화, 대나무와 청룡, 서벽에는 소나무와 매화, 백호, 북벽에는 현무를 그렸다. 현릉의 현재 모습은 발굴을 마치고 새로 단장한 결과다. 그러나 현은 고려~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수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굴 이전의 모습도 조성 당시 그대로는 아니었다. 무덤방에서 왕건이 이곳에 묻힌 뒤 한 참 뒤인 12~13세기 청자가 발굴된 점이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 해준다. 왕건릉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도굴로 파헤쳐 졌고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파괴된 것을 1954년 복구했다.

 한편 현릉에서 주목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2년 10월 왕릉을 고치는 과정에 봉분 북쪽의 구덩이 속에서 왕건상이라 불리는 높이 약 1.4m의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태조 왕건을 형상화 한 것으로 알려진 이 상(像)은 좌상(坐像)으로 머리에는 황제의 관인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나신(裸身)위에 비단옷을 입고 금동과 옥(玉) 장식의 허리띠를 패용했다. 이 왕건상은 광종 연간(949~975)에 만들어져 오랫동안 태조의 진전사원인 개경 봉은사에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왕조가 명운을 다한 뒤에 더 이상 개경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연천으로 옮겨졌다가 세종 때 이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이 왕건상에도 왕조의 흥망(興亡)과 굴곡이 담겨 있다.

2. 강도의 왕릉

 고려 왕릉은 개성뿐만 아니라 강화에도 있다. 강화는 임시 피난처가 아니라 여몽전쟁기간 동안 개경을 공식적으로 대체한 도읍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람들은 강화를 강도(江都)라 했고 황제의 도읍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오늘날 강화는 남한에서 고려 왕릉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된다. 경기도 고양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릉이 있지만 이는 고려가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 조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좀 다르다고 하겠다.


강화 고려왕릉(좌 : 석릉, 우 : 홍릉) / 이희인


강화 고려왕릉(좌 : 곤릉, 우 : 가릉) / 이희인

천도 당시 강화로 옮겨진 태조의 재궁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강화에는 강도시기에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의 능은 그대로 남았다.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 후 사망한 희종의 석릉,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태후의 곤릉, 고종의 며느리이자 훗날 충렬왕의 어머니인 순경태후 가릉 등 4기의 왕릉이 그것이다. 이 밖에 인산리 석실분과 능내리 석실분, 연리 석실분 등 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실 3기가 있다. 현재 주인은 알 수 없지만 당시 강화에서 사망한 왕실 인물의 능으로 추정된다.

개성의 왕릉은 도읍의 사방에 고루 분포하지만 강화도의 왕릉은 섬 남쪽에 자리한 진강산 일대에 주로 자리한다. 4기의 왕릉 가운데 고종 홍릉을 제외한 나머지가 진강산 자락에 있으며 인산리 석실분도 이곳에 있다. 진강산은 왕릉뿐만 아니라 강도시기 무인 정권의 수장인 최항과 김취려, 유경현등의 고위 관료의 매장지이기도 했다. 고종의 홍릉은 다른 능과 달리 강도 서쪽의 고려산 자락에 홀로 자리한다. 홍릉만 따로 떨어져 있는 까닭은 고종이 다른 능주와 달리 현직 국왕 신분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신분상 위계를 구분하기 위해 별도의 장소에 능을 설치했다고 여겨지고 있다.(이상준, 2016)

곤릉 석실 / 이희인

지금까지 강화에 있는 고려 왕릉 4기 가운데 홍릉을 제외한 나머지 3기가 발굴되었고 석실분 중에는 능내리 석실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강화 왕릉은 70년대에 학술조사 없이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본래의 모습에서 일부 변형되었지만 전반적인 능의 형태와 구조, 축조 수준은 개성의 왕릉과 차이가 없다.

무덤방은 석릉과 곤릉은 깬 돌을 이용해 쌓은 반면, 가릉과 능내리 석실분은 장대석으로 구성해 벽체의 축조 방식이 능마다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러나 무덤방 바닥에 설치된 관대는 모두 장대석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흙을 채우거나 전돌을 놓았다. 이러한 강화 왕릉의 무덤방 구조는 명종 지릉 등 12세기 후반부터의 나타나는 개성 왕릉의 구조와 궤를 같이 한다. 능역 시설도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개경의 왕릉과 큰 차이는 없다. 한편 강화 왕릉에서는 벽화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무덤방 내부에 걸개 못이 있어 그림을 그린 휘장을 무덤방에 걸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강화 왕릉은 대부분 여러 차례 도굴 당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그럼에도 질 좋은 자기와 구슬, 석간(石簡), 금동제 봉황문 장식 등 수준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 강도시기 왕릉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강화 왕릉에는 개성에서 보이지 않은 특징이 있다. 봉분과 석실 규모가 개경 왕릉보다 작고, 봉분 호석이 12각과 함께 8각이 존재하다는 점 그리고 지상식 석실이 그것이다. 강화 왕릉의 봉분 지름은 대략 4m 이하로 개경 왕릉과 비교할 때 절반 정도이며 석실의 면적은 60% 정도에 불과하다. 봉분과 석실의 규모가 축소된 것은 당시 왕릉이 전시 상황에서 조성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희인, 2016)

강화 고려왕릉 출토 유물(좌 : 곤릉, 우 : 가릉)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려 왕릉의 봉분 지대석이 12각이 일반적인 것과 달리 석릉과 가릉에서는 8각 구조가 확인된다. 그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은데 능주의 신분 차이에 따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이상준, 2016) 석릉에 묻힌 희종은 폐위된 왕이었고 가릉의 주인인 순경태후는 사망 당시 태자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현직 왕과 왕비의 능과는 위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 / 국립문화재연구소

강화 가릉(좌)과 능내리 석실분(우)의 봉분 지대석 /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상식 석실은 가릉에서 나타난다. 고려 왕릉의 무덤방은 보통 지하 또는 반 지하에 조성되지만 가릉은 지상에 석실을 만든 뒤 주변에 석실을 보호하기 위해 깬 돌을 쌓아 올렸다. 봉분은 무덤방 위에 올리고 둘레에 지대석을 설치했다. 이처럼 지상에 석실을 설치한 이유는 능이 위치한 지형 특성 때문으로 파악된다. 가릉이 자리한 곳은 다른 왕릉과 달리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한 구릉 지대로 계단식 석단을 조성해 왕릉의 위엄을 내기 어려운 곳이다. 따라서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석실을 지상에 설치해 인위적인 언덕을 형성하고 그 위에 봉분의 형태를 조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희인, 2007)

인산리 석실분 / 이희인

한편 묻힌 이를 알 수 없는 3기의 석실분의 주인은 아직 분명히 밝혀진 바 없으나 능내리 석실분은 희종의 비인 성평왕후(成平王后)의 소릉(紹陵)으로, 인산리 석실분과 연리 석실분은 천도 당시 개경에서 옮겨진 세조와 태조의 관[梓宮]을 강화에 모셨던 장소였다는 주장에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순경태후의 무덤으로 알려진 가릉이 실제로는 소릉이며 가릉 위쪽에 자리한 능내리 석실분은 규모와 격식이 가릉보다 정연한 것으로 볼 때 고종의 며느리로 충렬왕을 낳고 사망한 순경태후의 능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상준, 2016) 물론 이는 향후 검토가 필요한 문제다.

강화에 고려 왕릉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어찌 알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왕릉이라 하기에 작고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렇다고 무안해할 필요는 없다. 강화에 남아있는 고려 왕릉은 전쟁을 피해 도읍을 옮겨야만 했던 불안과 공포의 시간을 보내던 고려인의 삶과 죽음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분단의 현실에서 남과 북을 잇을 수 있는 하나의 기제가 될 수 있는 살아있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능묘에 담긴 고려인의 삶과 죽음 (1) : 고려시대 사후의 공간> 바로가기  

<능묘에 담긴 고려인의 삶과 죽음 (3) : 다양한 고려인의 음택(陰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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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인

    • 2018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일/ 2018.8.13

      기획/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편집/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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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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