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능묘에 담긴 고려인의 삶과 죽음 (3)

다양한 고려인의 음택(陰宅)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이희인(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Ⅲ. 다양한 고려인의 음택(陰宅)

1.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

왕에서 최하층 천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생전의 삶에서 그랬듯이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과 사후의 안식처는 위계마다 차이가 있었다. 왕과 왕비는 별도의 도감(임시 관청)을 만들어 제례를 지내고 능을 조성했다. 이하 관료에서 최 하층민까지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고려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 기록에 남겨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975년(경종 원년) 관료의 묘지 면적과 봉분의 높이를 1품에서 6품까지의 품계에 따라 제한하는 『고려사』의 기사로 보아 고려시대에 무덤을 만드는데 국가적인 규제가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묘제를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특히 6품 이하의 하급 관료와 일반민의 무덤에 관한 정보는 더욱 그러하다. 다만 신분 또는 경제적 차이에 따라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에 다양한 모습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상위 계층에서는 관과 곽에 금박으로 장식하는 풍습이 성행하여 이를 국가차원에서 금지할 정도로 호화로운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하층민 가운데에서는 분묘를 제대로 만들지 않고 방치하거나 들짐승에 의해 훼손되도록 하는 풍장(風葬) 또는 유기장(遺棄葬)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 기록에 남겨진 내용 이외에 고려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과 사후 공간은 남겨진 무덤을 통해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려인들은 석곽묘[돌덧널무덤]과 토광묘[움무덤]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조선시대 주요 묘제인 회곽묘가 고려 말 주자가례의 도입에 따라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아직 분명치는 않다. 매장 이외에 화장도 많이 이루어졌는데 고려시대 묘지석 260여 점 중 80여 점에서 화장이 확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정길자, 1985) 그러나 화장묘가 유적에서 확인되는 예는 많지 않다.

2. 남겨진 무덤들

 석곽묘는 4벽을 판석이나 깬돌을 이용해 축조하고 내부에 목관을 안치하는 형태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석곽묘는 축조 방식에 따라 다듬어진 판석으로 사방 벽면과 덮개를 구성하는 판석재 석곽묘와 다듬은 깬돌이나 자연석을 이용해 벽체를 축조하는 할석재 석곽묘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할석재 석곽묘가 주로 확인되며 판석재 석곽묘는 조사 예가 많지 않다.

 판석재 석곽묘는 석곽의 규모가 길이 2~3m, 너비 1m 내외 높이, 0.9~1.2m의 장방형 형태로 석실분에 비해 규모가 작고 너비에 비해 길이가 더 길어진 형태다. 잘 다듬어진 板石으로 네 벽면과 바닥, 덮개를 이루고 있고 내부에 벽화가 그려지고 묘역의 구성도 왕릉의 그것과 기본적인 구성이 비슷하다. 때문에 판석재 석곽묘를 소형 석실분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석실의 규모가 석실분에 비해 높이는 절반 이하이며 너비도 좁아 석곽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한편 왕릉에 비교하면 약식이기는 하나 묘역은 여러 단의 돌 기단으로 구분되고 봉분 주위에 곡장을 설치하거나 석인상이 배치되기도 한다.

 판석재 석곽묘의 예로는 파주 서곡리 벽화묘, 밀양 고법리 벽화묘, 거창 둔미라 고분 등이 있는데 이 중 경기도에는 파주 서곡리 벽화묘가 있다. 서곡리 벽화묘에 묻힌 이는 고려 충렬왕~충목왕대 2품 문신인 권준(權準, 1280~1352)으로 밝혀졌는데(국립문화재연구소, 1993) 이를 통해 판석재 석곽묘가 고려의 고위관료 무덤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역은 동서 14.2m, 남북 27m의 규모이며 5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하에 위치하는 석곽은 길이 2.85m, 너비 1.18m, 높이 1.28m의 크기로 동·서벽은 판석 2장, 북벽은 판석 3장으로 축조하였다. 석곽 바닥에는 전돌을 깔아 마감하였다. 4벽면에는 각각 12지신 모자를 쓴 인물상이, 천정에는 성신도가 그려져 있다. 묘역에는 석실분에서 보이는 곡장과 석단이 설치되었다. 석곽 안에서는 동전 43점과 관정 등이 출토되었고 바깥에서 묻힌 이의 이력이 담긴 묘지석 3매가 발견되었다.


파주 서곡리 벽화묘의 구조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편 판석재 석곽묘에서도 규모나 축조 수준이 서곡리 벽화묘와 같은 정연한 형태에 미치지 못하는 유형도 있다. 이 경우 판석 1매나 2매로 벽체와 천정을 구성하는 축조 방식은 같지만 석곽의 크기가 길이 2.0~2.3m, 너비 0.8~1.0m내외로 할석재 석곽묘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일반 석곽묘와 달리 독립된 묘역을 형성하고 석곽 주위에 곡장이 설치하는 등 여타의 무덤과는 차별된다. 강화도 허유전묘가 대표적인 유적이다. 고려 말 문신인 허유전(許有全, 1243~1323)의 무덤으로 길이 2.5m 너비 1.05m, 높이 0.6m의 토광을 판 뒤 토광 벽에 판석을 댄 형태로 피장자의 신분에 비해 축조수준이 조악하다. 석곽 주변에는 곡장을 쌓고 무덤 전면에는 장대석을 이용 2개의 단을 설치하였다.(한국선사문화연구소, 1988) 이와 유사한 수준의 판석재 석곽묘가 강화에서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여차리 고분군과 석릉주변 고분군, 양오리 고분군 등에서 독립 묘역을 갖춘 소형 판석재 석곽묘가 분포한다.

 할석재 석곽묘는 깬돌을 이용해 벽체를 구성하고 그 위를 수매의 판석으로 천정을 덮는 형태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2~3m, 너비 0.4~0.8m정도로 판석재 석곽묘에 비해 작다. 석곽의 내부는 대게 별도의 시설 없이 그대로 흙바닥에 관을 안치한다.

 토광묘는 구덩이를 파고 목관 또는 시신을 직접 안치하는 단순한 구조다. 토광의 규모는 길이 1.8~2.7m, 너비 0.4~0.7m 정도다. 대개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신을 그대로 묻는 경우도 있다. 토광 내부에는 무덤의 특성상 별다른 시설은 없는데 고양 더부골 고분군, 안산 부곡동 유적, 용인 마북리 고분군, 여주 하거리 고분군 등에서처럼 바닥에 유물을 매납하기 위한 요갱(腰坑)이라는 작은 구덩이를 조성하기도 한다.


허유전 무덤과 강화 양오리 판석재 석곽묘 / 이희인

 고려시대에 무덤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 석곽묘와 토광묘는 대개 여러 기의 무덤이 군을 이루는데 적게는 수 기, 많게는 수 백기가 하나의 공동묘지를 형성한다. 경기도에서는 내륙 산간 지대는 물론 화성 우음도와 같은 소규모 도서 지역에도 고려시대 무덤군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 무덤군은 일조 조건이 양호한 구릉의 중턱이나 말단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고려시대 무덤의 조성에는 풍수지리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왕릉은 물론 상위 계층의 무덤을 조성할 경우 풍수적으로 길한 곳을 선택해 자리했다. 고려 관인층은 부모의 묘지가 자손들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좋은 장소를 선택하였다.(박진훈, 2006) 일반민의 무덤을 조성함에도 풍수지리가 감안될 수 있었겠지만 험준한 산지의 급경사나 북사면 등 조건이 좋지 않은 지역에 분포하는 경우도 종종 확인되는 것을 보면 무덤의 위치에 대한 절대적인 입지관념보다는 거주지와의 거리나 경제적 상황, 지형 조건 등을 감안해 무덤 자리를 선택했던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고양 더부골 고분군 / 이희인

 한편 석곽묘와 토광묘에는 상위 묘제에서 확인되는 외부 묘역시설이 약식화 되어 설치되는 사례도 있다. 고양 더부골 고분군과 부곡동유적, 대부도 육곡 고분군에서는 토광묘 전면에 2~3단의 석단이 설치되거나 안산 반월 일리 고분, 여주 매룡리 고분군 등에서는 석단과 함께 곡장을 쌓기도 한다. 이는 하층민이 무덤을 조성하면서 상층 묘제의 형식을 모방한 결과로 여겨지고 있다.(이희인, 2004)

 석곽묘와 토광묘에는 지역이나 시기별로 조합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자기와 토기, 금속기가 주로 부장된다. 자기류는 대접과 접시를 중심으로, 병, 잔, 주자 등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며 토기류는 병, 호, 항아리 등이 주로 출토된다. 금속기로는 청동 합, 동경, 청동 숟가락과 젓가락, 동(은)곳, 철제가위, 동전 등이 주요 부장품이다. 무덤 출토품은 부장을 위해 별도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일상 생활용품들로 사용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많아 석곽묘와 토광묘가 대체로 하위 묘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철제 교구나 청동인장과 같은 특수 유물과 잔탁과 같은 소량 제작된 고급자기 기종도 출토되는 예도 있어 묻힌 이의 계층 폭은 비교적 넓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곽묘와 토광묘 부장품 / 이희인

 끝으로 화장묘로는 앞서 언급한 조립식석관묘 이외에 일상 생활 토기에 유골을 넣은 뒤 이를 구덩이에 묻은 단순한 형태도 확인되어 화장묘에도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특수한 사례로는 석곽 안에 목관이 아닌 옹관을 안치한 형태도 있다. 경기도 안성 매산리에서 조사된 석곽 옹관묘는 방형의 석곽 안에 인골을 넣은 옹관을 안치한 것인데 인골에서는 화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주목된다. 또한 강원도 영월에서는 동굴 안에 시신을 안치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해 고려시대 묘·장제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능묘에 담긴 고려인의 삶과 죽음 (1) : 고려시대 사후의 공간> 바로가기

<능묘에 담긴 고려인의 삶과 죽음 (2) : 최고 권력자가 잠든 공간, 왕릉>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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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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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201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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