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에 사는 예술가] 씨앗을 키우고 나물을 가꾸어 우주를 만나는 곳

안성_정정엽 작가의 작업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실에 대해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는 공간’이라 정의한다. 머뭇거리고 서성거린다는 그 잉여로움에 대해 혹자는 게으름이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정엽 작가에게 그 시간은 작업을 위한 상상력과 창조력의 원천이다. 그녀가 말한 잉여로움은 분명 정신적 여유를 의미했던 것이리라. 사실 시골에서의 생활은 도시에서의 그것보다 정신적으로는 여유로울지언정 물리적으로는 훨씬 더 분주한 곳이다. 작가의 집앞에는 비록 손바닥만한 작은 텃밭과 잔디밭 정도만 놓여있지만, 이마저도 사계절을 돌보려면 여간 번거로운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사계절을 몸소 받아들이는 생활을 꿈꾸었던 그녀에게 이 작은 텃밭과 마당을 가꾸는 일은 우주를 돌보는 만큼이나 위대하고 숭고한 일상이다.





나물과 우주


전원에서의 숭고한 일상에 대한 그녀의 꿈은 초창기 곡식작업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 그녀는 주로 팥, 콩, 녹두 등의 곡식들이 각각 모여들어 강렬하게 쏟아져내리는 장면을 그리는 데에 몰두해왔다. 그리고 이 곡식 시리즈는 명실공히 그녀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런데 그녀는 이 곡식들이 생명의 씨앗으로서 지니는 에너지를 표현함에 있어서 최근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최근작품에서는 그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생명의 순환고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각종 나물과 풀벌레들을 클로즈업하여 우주적인 배경과 함께 구성하는 그녀의 신작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이 ‘지구의 한 마을’에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지구는 우주의 한 마을이기에 이곳은 우주의 한 마을이며, 이 마을에, 이 작업실에 존재하는 모든 미물들은 결국 이 우주를 지탱하는 에너지를 지닌 생명체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 이곳 안성 작업실에 들어서면서 그녀의 씨앗들은 이제 그 싹을 틔워 우주를 지탱하는 에너지를 본격적으로 뽐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작업실 변천사


사실 정정엽 작가는 1980년대부터 여성으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 이 두 가지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장본인이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는 데에 단 한번도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30여년간 15번이나 작업실을 옮겨다니면서 묵묵히 그림그리기를 계속했다. 작업실을 옮겨다닌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들에 따른 것일 뿐이지, 창작에 어떤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이라거나, 계기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은 환경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그녀의 사유방식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창작방식에도 자연히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나의 작업실 변천사> 드로잉 연작은 1985년에 마련한 그녀의 첫 번째 작업실부터 2015년 지금의 작업실에 이르기까지의 이동경로를 1년 단위로 각각 한 장의 트레이싱지에 압축적으로 기록한 작업이다. 이 드로잉 연작에 사용된 트레이싱지는, 작업실이라는 사적인 공간이 단순히 폐쇄된 영역에 머물지 않고 한국 현대사의, 혹은 현대미술사의 한 부분으로서 공적인 영역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은유해주는 영리한 매체이다. 대학졸업 직후 마련한 첫 작업실에 경찰이 들이닥쳐 일종의 검열을 당했던 이야기부터, 캔버스를 깃발삼아 사회적 문제에 촉을 곤두세워 토론을 이어가던 작업실을 아지트로 삼았던 이야기, 치솟는 월세에 밀려 작업실을 옮겨다닌 그간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정정엽이라는 한 예술가가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를 버텨온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이로써 작업실은 단순히 개인의 조형언어가 창출되는 유토피아적 공간이 아니라, 바깥의 언어와 교류하고 충돌하면서 삶의 언어가 형성되는 현장으로 정의된다.



함께 한다는 것


9월 12일 토요일 오후, 바로 그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서의 작업실이 이웃들에게 개방되었다. 작가의 취향과 취미를 엿볼 수 있는 일상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개인의 공간을 대중에게 오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생명과 우주라는 어쩌면 거창한 주제를 가장 하찮은 미물들을 묘사하는 작업으로써 다루어내는 그녀에게, 물론 일정한 고독과 혼자만의 시간은 필수일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을 놓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들은 창작을 위한 특별한 에너지원이 되기도 하거니와 그녀가 다루는 작업 주제와도 긴밀하게 맞닿아있는 탓이다. 어떤 생명체도 우주에 홀로 지낼 수는 없거니와, 이 세상 혹은 우주는 나와 너, 우리가 만들어가는 공간이기에 더더욱 인간관계는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이다. 관계 속에 형성되는 적절한 긴장감과 개방성은 다양한 소통 양식을 사유하게 하며, 그것은 그녀의 화폭 속에 자리잡은 나물과 벌레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산책코스와 생각쪽지


삶과 예술의 경계가 흐려지는 가장 명징한 영역인 작업실에서 정정엽 작가는 자신의 일상과 예술을 이웃들과 나누기로 했다. 작가가 공유하고자 한 일상은, 자신이 매일 산책하는 코스를 함께 걸어보는 것. 매일 보는 같은 길, 같은 하늘, 같은 논밭이더라도 매일매일 작가의 심상에 따라 다르게 보이겠지만, 그에 대한 타인들의 시선들을 공유하는 시간이 더해져, 더욱 풍성한감성들이 도출되었다. 그리고 그 감성들은 작가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인 낱말카드 연작을 실제로 체험해보는 시간을 통해 창작을 위한 재료로서 남겨졌다. 낱말, 즉 언어라는 기호 속에 충만한 우주를 드러내는 일. 처음에는 다들 머뭇거리다가 이내 각자의 느낌들을 술술 풀어냈다. 그 순간, 참여자들은 우주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 통해 작가의 낱말카드가 ‘생각쪽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정정엽 작가는 9월 12일, 이날을 이렇게 기억하려 했다.



‘인연, 연습없이 주어진 행운’




이렇게 참여자들이 반나절을 정정엽 작가의 작업실에서 지내면서 떠오른 각자의 고민을, 생각을 털어놓는 소박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부디 그들이 남긴 감성의 흔적들이 정정엽 작가가 우주를 그려내는 일에 작게나마 양분을 더해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타자와 나누는 공간이기도 한 작업실이라는 신비한 공간에서 타인의 시선과 사유에 귀기울여보는 시간. 혹자는 무의미하다고 비난할지 몰라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따스함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글_김나리(독립기획자,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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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옆집에 사는 예술가

    자기소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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