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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경기천년과 고려 (1)

경기 정명(定名) 천년 & 경기천년의 의미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박종기(국민대학교 명예교수)


2018년은 고려왕조(918-1392년) 건국 1,100주년이다. 또한 경기도가 1018년(현종9) 처음 자기 이름을 가진 지 천 년이 되는 「경기 천년」의 뜻깊은 해이다. 백년 만에 찾아온 고려 건국 1,100주년과 경기 정명(定名) 천년의 해를 맞이해 그 역사적 의의를 성찰하는 일은 매우 의미가 있다.



1. 경기 정명(定名) 천년


고려왕조가 건국된 지 백년이 지난 1018년(현종9)은 왕조 최대의 위기였던 30년간의 고려 거란 전쟁이 종식되어, 왕조가 새로운 출발을 한 중흥(中興)의 해이다. 이해 수도 개경에 주변 12개 군현을 소속시켜 경기(京畿)라는 특별 행정구역을 설치했다. 경기라는 이름이 1018년에 처음 정해진 것이다. 왜 수도 개경과 여기에 소속된 군현지역을 묶어 경기라는 행정명칭으로 불렀을까?



1) 경기(京畿)의 개념


‘경기’는 이미 중국사에서 일찍부터 사용된 용어이다. 경기는 천자가 거주하는 도성(궁성)이 있는 ‘서울[京]’과 ‘서울의 주변 지역[畿]’으로, 천자가 직접 관할한 도성 주위 천리의 땅을 기(畿)라 했다. 또한 왕기(王畿)·기전(畿甸)·기내(畿內) 등으로 불렸다(경상도는 경주와 상주의 줄임말과 다른 命名 원리). 중국의 고대 봉건사회로부터 유래한 경기는 군주가 거주하는 도읍을 보호하고 그 기능을 돕기 위해 설정한 군주(천자)의 직할지였다. 또한 경기지역을 통치 운영하는 방식을 경기제(京畿制)라 한다. 중국 당(唐)나라의 경우 도성 안쪽 지역 혹은 경도(京都)가 다스리는 곳을 경현(京縣, 赤縣), 도성 밖 주변 지역은 기현(畿縣)으로 구분하여 통치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제도화 했다.


(2) 경기제의 이념적 기초는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주례(周禮) 등의 문헌에 보인다. 󰡔서경󰡕 우공(禹貢) 편에서는 천하를 제도(帝都)의 땅이라 할 왕기(王畿) 및 기주(冀州)와 주변 사방을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 등 5백리 단위로 나누는 오복제(五服制)로 구분하여 영역 개념을 세우기도 했다.


(3) 『주례』에 따르면, 왕[천자]이 다스리는 천하 사방의 영토를 9기(畿)라 하고 9기(畿)의 중심에는 왕이 거주하는 왕성(王城)이 있으며, 왕성 주위 사방 1천리의 땅을 왕기(王畿), 방기(邦畿) 또는 국기(國畿)라 하여 왕의 직할지로 설정했다. 나머지 영역은 왕의 직할지 바깥 사방으로 봉작(封爵)의 순서에 따라 제후들의 분할 봉토지를 5백리 단위로 9기(九畿 혹은 九服)로 서열화하여 구분했다(5백리 단위/후기(侯畿), 전기(甸畿), 남기(男畿), 채기(采畿), 위기(衛畿), 만기(蠻畿), 이기(夷畿), 진기(鎭畿), 번기(蕃畿)). 9기(畿)의 바깥 사방에는 오랑캐 나라인 번국(蕃國)을 설정했다.


(4) 왕기를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확대되는 영역 설정 관념은 대내적으로는 작위(爵位)제도에 따른 군신 및 천자제후 관계의 질서체계를, 대외적으로 천자국과 제후국 사이의 조공책봉(朝貢冊封) 관계라고 하는 신분질서 의식을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2) 고려시기 경기제 시행 과정


경기제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고려 때였다. 고려인들은 경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경기는 사방(천하)의 근본지역이다. 수도인 왕경(경기지역)과 왕실을 지키고 보호하는 관료들을 위해 과전(전시과)을 지급하여 그들을 우대해야 한다 [京畿 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고려사 권78 食貨1 祿科田 공양왕 3년 5월조


경기는 전략적으로 왕실을 지키는 지역이며, 경제적으로 왕조에 봉사하는 댓가로 관료 등 지배층에게 지급된 토지(*과전)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때문에 국왕과 왕실, 핵심 지배층이 살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된 지역인 점에서 경기를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라 했다. 경기는 고려 초기부터 그 기초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태조 2년)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세웠다[定都于松 嶽之陽 爲開州 創宮闕].”

-고려사 지리지 왕경 개성부조

(1)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태조 2년(919년) 통일신라기 송악군(영현 강음현과 송림현 포함)과 개성군(영현 덕수현과 임진현 포함)을 묶어 개주라고 이름을 고치고, 고려의 수도로 삼았다. 이해 철원에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 개경의 영역을 왕조 수도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영역을 확장했다.


“(성종 14년) 개주를 개성부로 이름이 고쳐졌다. (개성부는) 적현(赤縣) 6개 군현과 기현(畿縣) 7개 군현을 관장하게 했다[改開州爲開城府 管赤縣六 畿縣七成宗十四年].” 󰡔고려사󰡕 지리지 왕경 개성부조

(2) 성종 14년(995년) 개성부를 설치하고, 그 아래 6개의 적현과 7개의 기현을 관할하게 했다. 이로서 개성부는 적현과 기현의 13개 현으로 구성되어, 수도 개경의 영역과 기능이 확대되었다. 즉, 개성부가 설치되고 특별구역인 적현과 기현을 관리 통제하는 경기제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수도 개경의 영역을 알려주는 적현과 기현의 개념과 범위는 다음과 같다.





“현종 9년(1018년) 개성부가 폐지되고, 개성 현령관(縣令官)이 설치되었다. 그 아래 정주· 덕수·강음현의 3개현을 관할하게 했다. 또 장단 현령관이 설치되었다. 그 아래 송림· 임진·토산·임강·적성·파평·마전의 7개현을 관할하게 했다. 개성 장단 현령관은 모두 상서도성에 직속시키고, 이 지역을 경기라 했다[顯宗九年 罷府置縣令 管貞州 德水 江陰 三縣 又長湍縣令 管松林 臨津 兔山 臨江 積城 坡平 麻田 七縣 俱直隷尙書都省 謂之京畿].”

-고려사 지리지 왕경 개성부조

(3) 수도 개경은 지방 행정단위에서 중앙이 직접 관할하는 경기라는 특별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었다. 경기라는 명칭이 이때 처음 사용되었다.


● 한편 송악군은 해체되고, 경중(京中) 5부(部)로 편제된다. 이 때 경기의 범위는 성종 14년 적현, 기현의 범위와 거의 일치한다. 결국 성종 14년의 개성부는 송악군을 포함한 경중 5부와 개성과 장단 현령관이 관할하는 10현으로 나눠진다. 두 현령관은 중앙의 상서도성에 직속되는데, 개성 장단의 두 현령관이 관할한 12현(개성과 장단의 2현 포함) 지역이 「경기(京畿)」가 되었다.


 ●  또한 이해(1018년) 경기제 실시는 물론 고려시대 지방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4개의 주요 군사 거점지역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8개 대도시를 목으로 지정했다. 그 하부에 군과 현 및 진 등 군사와 행정의 거점 단위를 신설했다. 이를 거점으로 이후 점차적으로 개경 이남에 5도(서해·교주·양광·전라·경상)와 국경지대에 북계와 동계의 양계(兩界)가 설치된다. 전국을 크게 경기, 5도, 양계라는 광역의 세 권역으로 구성된 지방제도의 골격이 완성되었다. 3원적인 행정체제는 조선 전기에 8도체제로 재편된다.


 ● 천 년 전 1018년(현종9)은 고려왕조가 건국된 지 백년이 되는 해이며, 고려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난 해이다. 이해 20만 군사를 거느린 고려군 사령관 강감찬이 소손녕의 10만 거란 대군을 패퇴시켜, 993년(성종12) 거란의 첫 침입 이후 약 30년 간 지속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종결된다. 건국 후 닥친 왕조 최대의 위기가 마침내 해소되었다.


 ● 사학(私學)을 일으켜 문치(文治)주의를 부활시켜 해동의 공자(孔子)라 칭송받은 고려전기 최고의 학자 최충(崔沖, 984-1068년)은 현종의 치세를 직접 체험한 인물이다. 그는 거란전을 수습해 위기의 왕조를 바로 잡은 국왕 현종을 중흥(中興)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문종 16년(1062년) 개성부가 다시 설치되었다. 상서도성에서 관장한 11개현이 개성부에 다시 소속되었다. 또 서해도 평주 소속의 우봉군을 떼어 내어 개성부에 편입시켰다 [文宗十六年 復知開城府事 都省所掌十一縣 皆屬焉 又割西海道平州任內牛峯郡 以隷之].”

-고려사 지리지 왕경 개성부조


(4) 문종 16년(1062년) 개성부가 다시 설치된다. 개성현과 장단현에 속했던 10현과 함께 새로 서해도의 우봉군이 편입된다.


● 개성과 장단이 각각 3개 현과 7개 현을 관할하던 지역에다가 우봉군을 추가시켜, 개성부가 직접 관리하는 광역의 경기 지역으로 재편되었다.


● 이는 경기 통치기구의 일원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된 것은 서경에 별도의 경기, 즉 서경기(西京畿)가 설치되면서 경기 지배기구를 일원화하기 위한 것이다.


● 또한 개성부는 경기지역을 왕실의 경제기반으로 하는 한편 관료들에게 과전 및 시지(柴地)를 지급해 이를 직접 관리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 문종 23년(1069년) 경기지역이 대폭 확대된다. 양광도·교주도·서해도의 39개 주현이 경기로 소속이 변경되어 경기는 모두 52개 현이 된다. 현재 학계는 이 기록을 사실로 보지 않고 있지만, 문종 30년의 양반전시과의 시지(柴地)가 지급된 46개 군현과 같은 규모여서 쉽게 부정할 수 는 없다.



“공양왕 2년(1390년) 경기를 좌도와 우도로 나눈다. 그리고 좌도와 우도에 각각 도관 찰출척사가 파견되고, 수령관(首領官)이 그를 보좌하게 했다[恭讓王二年 分京畿左右道 ... 各置都觀察黜陟使 以首領官 佐之].”

-고려사 지리지 왕경 개성부조

(5) 공양왕 2년(1390년) 경기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각 도의 책임자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하고, 그 보좌관으로 수령관(首領官)을 두었다.


● 수령관은 도관찰출척사 보좌하는 관원이다.


● 기존의 경기를 구성했던 13현에 31개 현이 추가된 44개 현이 되어 경기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 과전경기(科田京畿)의 원칙이다. 즉 과전법 시행과 함께 관리들의 과전은 경기지역에만 지급한다는 원칙에 필요한 토지 확보를 위해 경기지역이 확대 개편되었다.


●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되면서, 경기는 왕실과 수도 개경의 보장처이자 경제적 직할지라는 개념에서 지방 행정구획의 하나인 도(道)의 개념으로 그 개념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 1414년(조선 태종14) 경기 좌, 우도를 다시 ‘경기’로 통합한다. 경국대전(1485)에 수록된 ‘경기’를 구성한 군현의 숫자는 모두 38개 군현이다.


3) 경기제 실시 배경과 의의


경기는 신분 질서를 지역(영역)질서로 구분하고 편성하는 과정에서 적용된 개념이다. 중국 역대 왕조는 이러한 차등적인 질서론의 명분에 따라 경기를 설치하고 해당 지역을 특별하게 대우하여 왕실과 왕권의 권위를 확보하려 했다. 그런 사실은 당(唐)나라 육지(陸贄)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언급하고 있다.


“(경읍 주변지역인) 왕기(王畿)는 사방의 근본이다. (황제가 거주한) 경읍(京邑)은 또한 왕기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다. 그 형세는 마땅히 경읍은 몸과 같이, 왕기는 어깨와 같이, 사방은 손가락과 같이 부리는 것이다. (중략) 부역은 가까운 곳을 가볍게 부과 하고 먼 곳은 무겁게 부과한다. 은혜와 교화[惠化]는 가까운 데를 기쁘게 함으로써 먼 곳에 있는 자를 오게 한다[王畿者 四方之本也 京邑者 又王畿之本也 其勢當令京邑 如身 王畿如臂 四方如指 (中略) 其賦役 則輕近而重遠 其惠化 則悅近以來遠也].”

(1) 중국 역대 왕조에서 운영된 경기제의 취지, 즉 수도 왕경과 왕실을 도우는 직할지 성격의 경기제라는 그 원래 취지를 한국사에서 가장 충실하게 수용하여 시행한 왕조는 고려왕조였다. 경기는 고려왕실과 왕조를 방어하는 전략 요충지이며, 경제적으로는 직할지로서 이곳의 생산과 노동력은 핵심 지배층을 유지하는 경제 기반이 되었다. 또한 왕실의 팔과 다리로서, 지방과 왕실 및 중앙정부의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2) 고려왕조가 경기제를 시행한 이유는 중국의 경기제를 도입하여 국왕의 거주 공간인 수도 개경을 방어하고 그 위상을 강화해 왕권 강화와 왕실 권위를 높이려는데 있다.


(3) 한편 경기제 도입의 또 다른 배경은 고려왕조의 국가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고려왕조는 한국사의 역대 왕조 가운데 천자국(황제국) 체제를 수용해 운영했다.


고려왕조는 대외적으로 중국을 천자국(황제국)으로 인정하고 국왕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등 제후국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대내적으로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제도와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같이 대내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갖추고 국왕이 황제(천자)로서 처신한 점이 조선과 다른 고려왕조의 특성이다. 그것은 관청 용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 고려가 천자국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강렬한 문화적 자존의식(自尊意識)            2) 삼한(三韓) 일통의식(一統意識) 


(4) 고려 말 조선왕조 이후 행해진 경기제는 고려와는 다른 성격이다. 조선시대 경기는 수도 한양과 구분되는 지방 행정구역의 하나로서, 8도 체제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조선왕조 이후 경기의 의미는 크게 변화되었다.




2. 경기 천년의 의미


경기 천년의 의미를 어떻게 새겨야 할까?


첫째, 고려왕조는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어 국왕 현종(1009-1031년 재위)은 공주, 전주, 나주로 피난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거란전이 끝난 후 국왕 왕실 관료 등 핵심 지배층이 거주하는 수도 개경에 대한 방어와 핵심 지배층에 대한 경제적 보장, 즉 군사, 경제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이 같이 경기는 왕실과 조정의 보장처로써 설치되었다. 1018년 경기 설치에 이어, 1020년(현종11)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 축조가 시작되어 1029년(현종20)에 완성된다. 전쟁의 위기가 이같이 수도 개경을 새롭게 변화시켰고, 왕실과 조정의 보장처로써 경기라는 특별 행정구역이 새롭게 편성된 것이다. 또한 경기 설치는 건국 후 백년 만에 맞이한 왕조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왕조를 중흥(中興)한 상징성을 갖는다.


둘째, 경기는 고려전기 정치 주도세력을 배출한 중심지였다. 왕경과 경기지역 일대를 ‘근기(近畿)’지역이라 한다. 근기는 왕도 및 경기와 가까운 지역을 뜻한다. 혹은 그보다 넓은 지역을 뜻하기도 한다. 고려 전기 지배세력을 본관을 기준으로 분류할 때 전체 60% 정도가 근기지방 출신이었다. 삼남지방(지금의 경상·충청·전라도) 출신이 과거합격자의 70~80%를 차지해 지배세력의 대대적인 변동과 교체가 이루어지는 고려 후기 이전에는 근기지방 출신이 정치를 주도했다.
















서희 영정(표준영정 95호)


거란과의 전쟁을 계기로 근기 출신 인물들이 정치의 주도층으로 등장한다. 건국 초기 정치 주도세력은 과거제와 관료제도 등 선진의 중국 문물제도[華風]를 수용해 왕조체제를 정비한 최승로, 최량, 이몽유, 김심언, 최지몽 등 6두품 출신 신라 및 후백제계 출신 유교 관료층이다. 거란이 침입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당시 민심은 성종의 화풍 중심 정책에 등을 돌린다. 이를 계기로 박양유, 서희, 이지백, 한언공 등 근기출신 정치세력이 정국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거란에 땅을 떼어주고 항복하자는 할지(割地)론자들을 제치고, 팔관회 등 전통행사를 부활하여 민심을 결집시켜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하는 등 거란전과 왕조 중흥을 주도했다. 경기가 설치된 것도 이 무렵이며, 이들이 경기 설치를 주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고려 중기에는 문벌귀족층이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고려전기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특히 안산 김씨 김은부는 두 딸이 현종의 비가 되어 처음으로 왕족 간의 근친혼 관례를 깨고 이성(異姓)이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두 비는 고려 전성기를 열은 각각 덕종과 정종, 문종을 낳았다. 문종은 인주 이씨 이자연의 세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이자연의 첫째 딸 인예태후는 순종, 선종, 숙종의 세 국왕과 유명한 학승 대각국사 의천을 낳았다. 인주 이씨 일문은 이자겸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일곱 국왕을 배출하는 고려전기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지위를 유지했다.


셋째, 근기출신 인물들의 정치 주도권 장악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물론 이들의 등장이 유교 관료층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교 정치이념은 중국의 선진문물 수용을 촉진하여 왕권강화와 왕조를 새롭게 하는 여전히 중요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근기세력의 등장은 민심의 호응을 받은, 건국 전후 성행한 불교, 도교, 낭가사상과 풍수지리 등의 전통사상인 국풍(國風 혹은 土風)이 새로운 주목을 받아 사상과 문화의 다양화와 다원성을 열어 놓았다. 이는 하나의 사상과 문화가 독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고려 문화와 사상의 지형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제일



청자음각국화문잔과 잔탁



특히, 고려전기 문화를 대표하는 청자, 나전칠기, 대장경, 인쇄기술, 고려지 등은 고려 문벌귀족층의 문화적 욕구와 수요에 따라 생산되었다. 이들 제품은 송, 거란, 여진 등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호평을 받았을 정도로 기술 수준이 높은, 오늘의 첨단 신소재 제품이라 할 수 있다. 경기지역은 대장경, 나전칠기는 물론 초기 청자와 고려지 생산의 중심지였다. 특히 대장경은 불교에 대한 깊은 지식과 인쇄기술이 없이는 불가능한, 지식과 기술이 결합된 문화재이다. 높은 수준의 문화제품은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의 취향과 수요가 없다면 생산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고려 전기 문화는 근기호족과 그 후신인 문벌귀족의 후원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려시기 경기지역이 갖는 역사적 위상은 이같이 매우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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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일/ 201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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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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