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과 공간구성 (1)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이승연 (경기문화재연구원)



1. 머리말

 고려 건국과 동시에 개경에는 10개의 사원(법왕사, 자은사, 왕륜사, 내제석원, 사나사, 천선원, 문수사, 원통사, 지장사, 신흥사)이 창건되었고, 개경을 중심으로 대규모 願刹(흥왕사, 불일사, 귀법사, 현화사, 안화사, 국청사)이 건립되었다. 風水圖讖說(산천·수로의 모양을 인간생활의 吉凶禍福과 연결시켜 설명하면서 각종 예언을 만들어냄)과 裨補寺塔說(기가 부족한 곳에 절이나 탑을 세워 보강해야 한다는 설)은 전국 각지에 사찰들이 세워지는 지리학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11~12세기에 불교는 왕실이나 귀족은 물론 일반 서민에게도 절대적인 신앙이 되면서, 기존 사원들의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지거나 새로운 원찰(현화사, 불일사, 안화사, 국청사)들이 속속 건립되었다. 많은 사원들이 왕실이나 개인의 기복을 비는 원찰로 화함에 따라 많은 불교행사(팔관회, 연등회, 무차대회, 인왕도장, 나한재 등 80여 종)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사찰에는 수많은 인원을 수용하여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넓은 내․외부 공간이 필요했다. 중심영역을 둘러싸던 고대가람의 회랑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건물이 건립되는 방식으로 바뀌어갔다. 또한 선사상의 영향과 지방호족의 지원에 힘입어 고대 규범에서 벗어나 지역문화의 특성을 반영하는 모습으로 조영되었고, 다양한 교리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원화된 구성을 이루어나갔다.
 13~14세기는 무신집권 후 종파와 산문에 국한되지 않고 지방의 결사불교가 유행한 시기다. 무신집권 초기에 귀법사, 영통사, 흥왕사, 부석사, 부인사 등 전통적인 대찰은 무신세력에 저항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좌절되었고, 선종을 종지로 한 수선사와 천태종을 이은 백련사를 중심으로 수행과 절제를 강조하는 결사운동이 전개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현재 순천 송광사(수선사)와 강진 백련사는 조선후기 모습이지만 다원식 가람 속에 수많은 승방과 수행공간이 발달한 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비슷한 가람구성을 보이는 곡성 태안사의 13세기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에 보면 사원은 예불 공간(금당, 나한전, 대장전), 수행공간(승당), 독립된 승방공간(유나방ㆍ상원주청ㆍ장주방채ㆍ입실방채ㆍ별감방채 등), 기타 생활건물(목욕방채ㆍ곳간채ㆍ수가 등) 등 수많은 전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 글은 이제까지 연구성과와 발굴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고려시대 사원의 다양한 기능과 공간구성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고대 불교사원이 중세 불교사원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2.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

고려시대 들어서 불교는 왕실이나 지배층은 물론 서민에게도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고려 태조가 943년(태조 26)에 내린 ‘訓要’ 와 의종이 1168년(의종 22)에 내린 교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불교가 고려 개국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종교적 기능 외에 부가적 기능을 통해 국가통치ㆍ운영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훈요의 첫 번째 내용인 ‘우리나라의 大業은 반드시 여러 부처님의 護衛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禪敎寺院을 창건하고 住持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음으로써 각각 그 業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는 내용으로 보아 ‘왕이 불교를 보호하면[外護], 부처님의 힘에 도움을 받아 국토를 수호[護國]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선종과 교종사원을 지어 주지를 파견함으로써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원 운용과 통제를 통해 개경과 지방의 통치에 힘을 기울이게 하였다. 두 번째 내용인 ‘모든 사원들은 모두 道詵의 의견에 의하여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開創한 것이다. 도선의 말에 의하여 자기가 선정한 이 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다면 地德을 훼손시켜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 공후, 왕비, 대관들이 각기 願堂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은 사원들을 증축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근심되는 바이다.’는 기록을 통해 裨補寺와 願堂의 목적으로 사원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의종이 나라를 교화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대책으로 내린 교서에는 조상 때 開創한 裨補寺社와 예부터 상례로 의식을 거행해온 사원, 특별히 복을 기원하는 사원[祈恩寺社]를 수리하게 하였는데, 이를 통해 裨補寺社와 祈恩寺社, 불교행사를 거행한 사원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종교적 기능

7세기 후반~8세기는 원효와 의상에 의해 불교 교리가 확대되고 다변화하는 시기로 종파가 형성되기 전이다. 7세기 후반에 들어 신라는 통일 직후 당나라와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추진함에 따라 가람배치부터 공포를 구성하는 부재의 세부 처리까지 당나라의 제도와 기법을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변화는 일본에서도 나타났다. 경주(사천왕사, 망덕사, 감은사)에서는 금당 앞 좌우에 2기의 탑을 나란히 세운 ‘쌍탑식 가람배치’가 나타났다. 가람의 중심이 불사리를 봉안하여 부처님을 상징하던 탑에서 불상을 모신 금당이 된 것이다. 이는 󰡔法華經󰡕에 등장하는 釋迦如來와 多寶如來가 나란히 존재하는 ‘二佛竝坐 형식’의 건축적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쌍탑식 가람은 중국에서 그 실례가 남아있지 않지만 唐代에 작성된 문헌과 7세기 후반 이후 신라와 일본 절터에 많이 확인된다. 8세기 중반이 되면 두 탑이 서로 다른 형태(경주 불국사․남산동사지)로 건립되기도 하다가, 9세기에 들어 선종이 도입되면서 쌍탑의 규모가 축소(장흥 보림사지, 남원 실상사지)되거나, 두 탑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독자적으로 세워지는 변화(울주 간월사지)가 일어난다.
이밖에 선종도입 전부터 신라에는 전국의 명산에 山寺가 지어져 山號가 寺名으로 통용되었다. 그 예로 迦耶山寺․小伯山寺․浮石山寺․深源山寺․桐裏山寺․普賢山寺․五冠山寺가 있다. 이제 불교는 도성 주변에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실을 호위하는 호국사찰만이 아니고, 신라 귀족층을 위시한 폭넓은 계층의 신앙대상으로 퍼져 갔다. 불교교리의 확대와 다변화는 사원건축에도 영향을 미쳐 다양한 교리를 담는 구성으로 변하였고, 산간에 조성된 사원은 정형성 있는 도시사원과는 달리 자연지세를 살려 불규칙하게 배치되었다. 기존에 도시의 교종사원이 예불을 위한 불전 중심의 가람이었던 데 비해, 산속 선종사원은 승방과 수행용 공간을 위주로 한 수도원으로 건립되었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엄격한 가람 형식의 틀이 해체되고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란으로 사회가 혼란하던 신라말에 중국에서 흥기한 禪宗은 중국 유학승을 통해 도입되어 하나의 종파로 자리잡아갔다. 이들은 中國禪宗寺院制度를 눈으로 보고 경험하였으나 시대상황상 이를 그대로 적용하여 사원을 창건하기는 어려웠으므로 대부분 기존 사원(터)에 건물을 부분적으로 해체․수리해 가면서 선종사원을 開創해 나갔다. 선종은 直指人心․心印 등으로 표현되는 바와 같이 師弟間의 佛法傳授를 통한 철저한 계승관계를 유지하려 하였고, 이러한 계승관계의 중요성은 선종사원의 구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法堂과 方丈․影堂’으로 구성된 ‘上院’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이끌어 냈다. 곧, 선종에서 가장 위계가 높고 상징적인 건물인 法堂을 고대사원의 講堂에 이입하고, 그 좌우건물에 方丈․影堂을 배치하는 上院領域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원영역의 형성과 분화는 한국선종사원배치의 주요한 특색으로, 기존 질서가 남아있는 고대 사원의 배치 위에 선종을 대표하는 중심건물이 移入되어 變化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선종사원건축과 차별성을 갖는다. 

2) 願刹

고려시대 王室과 佛敎 세력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왕이 건립한 사원 대부분이 원찰이었으며, 여기에 王이나 王妃의 眞影을 모신 眞殿[願堂, 眞堂]이 세워졌다. 왕실원찰은 도성 내에 주로 분포하며, 도성 외곽의 경우 능 주변에 건립되었다. 많은 사찰들이 왕실이나 개인의 기복을 비는 원찰로 화함에 따라 팔관회나 연등회 외에도 무차대회, 인왕도장, 나한재 등 대규모 불교법회나 행사가 사찰 내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이루어졌다.
 願堂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원에 대해 창건ㆍ중수ㆍ시납 등으로 관련을 맺게 된 개인이나 친족 혹은 집단이 그 사원에서 발원을 위한 불사를 열 뿐만 아니라, 그 운영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원으로 규정될 수 있다. 왕실원당은 父王과 母后의 원당을 중심으로 경영되었으며, 광종대에 원당(奉恩寺ㆍ佛日寺ㆍ崇善寺)이 창건되기 시작하였고, 현종대부터 인종대까지는 부왕과 모후를 위한 원당을 새로이 창건하여 지정하였다. 인종 이후 원종까지는 새로운 원당이 창건되지 않았고, 기존의 사원이 이용되었다. 고려후기에는 신효사, 묘련사, 민천사, 운암사 등을 중창한 외에는 새로운 사원이 창건된 적 없이 기존사원이 원당으로 지정되었다. 원의 압제 하에 들어간 충렬왕대에는 鮒馬國이 된 만큼 元 公主 출신의 父王을 위한 원당이 함께 지정되었다. 태조-봉은사, 목종-숭교사(유가종), 현종-현화사(유가종), 문종-흥왕사(화엄종), 순종-홍원사(화엄종), 숙종-천수사(천태종), 예종-안화사(선종)로 이어지는 원당 건립은 조상숭배시설이자 교단 통제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3) 裨補寺社, 資福寺

태조는 도선의 山水順逆에 기준을 둔 ‘裨補寺社’를 건립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개경에 10寺를 포함하여 25寺를 창건하였는데, 이들 사원 중 개경의 水德을 비보하가 위한 사원로 상류에 廣明寺, 日月寺, 歸山寺, 法王寺를, 합류 또는 중류에는 興國寺와 普濟寺, 內水口 방면에는 開國寺를 건립하였다. 도선의 裨補寺塔說은 지방 각지에 새로 절이나 탑을 세우는 이론적 방편이 되었다. 특히 한반도의 형세를 배와 저울에 비유하여 배가 균형을 잡아야 안전하고 저울이 수평을 이루어야 하듯이 한반도도 지역적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전라도 지역을 배의 키로 보아 이곳에 절과 탑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변두리에 치우쳐 있는 경주 대신 개성이나 평양 등 반도 중심부가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을 말했다고 전한다. 이런 주장에는 이미 절이 들어차 있는 경상도 일대와 견주어서 아직 사찰 건립이 미약한 전라도 일대의 사찰 건립을 부추기는 의도가 담겨있다.
 裨補寺社는 定期 佛敎儀禮를 행하였는데, 국가차원의 정기 불교의례는 대부분 개경 일대 사원에서 이루어졌으며. 國王祝壽ㆍ燃燈會ㆍ經行ㆍ仁王般若道場ㆍ飯僧 등은 지방의 중심사원에서도 정기적으로 행해졌는데 이 사원을 資福寺라고 하였다. 공양왕대에 국가이념으로서의 비보사사에 대한 회의론이 나타났고, 조선 태종 5년과 6년 사원의 경제기반을 박탈하는 제반 조처에 따라 자복사는 철폐되어갔다. 자복사는 불교를 통한 국가의례를 수행함은 물론 숙박, 시장의 기능도 갖추어 읍민을 결집하고 구휼하였으며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4) 院館寺院

고려의 중앙집권적인 역로망은 대체로 성종(981~997)~현종대(1009~1031)에 걸쳐 정비되었는데, 당시에 정비된 역로망은 傳令이나 사신 영송 등 공적 역할이 중심이었으므로 모든 여행자들에게 실질적 여행 편의를 제공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에 국가의 부담을 줄이면서 여행자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제시된 정책이 객관을 갖춘 사원을 건립하고 불교계의 재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객관의 운영을 담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원관사찰들은 현종대에 처음 출현하여 13세기 초까지 활발히 건립ㆍ운영되었는데, 특히 수도 개경 주위 및 남부지방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몽골항전기 및 원 지배기에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으나, 공민왕은 육상교통의 발전을 도모하였고, 이 과정에서 역관을 다시 정비, 발전시키려 하였다. 공민왕대 이후의 원관은 이전의 원관사찰과는 달리 佛事의 기능은 없는 순수한 객관의 성격을 띠었다 원관사원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만, 길이 험하고 별다른 시설이 없어 인적이 드물어 도적과 호랑이의 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에 건립하였다. 개경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개경-장단-적성-양주-남경, 개경-파주-고양-남경)이 주요 교통로에는 원관사원이 여럿 설치되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원관사원은 일반 사원과는 달리 별도의 객관영역을 구성하였다. 여기에는 사원영역과는 별도로 여행자들이 머무는 客室과 馬廏, 부속시설들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유구를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다.

5) 군대주둔지ㆍ훈련장소, 정치회합의 장소

군대 주둔지나 훈련장소로 활용된 사원은 開國寺ㆍ國淸寺ㆍ興王寺 등으로 대부분 開京 나성 밖에 위치하여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이 공간이 군대의 수용에 용이하게 이용되었다. 개경성 밖의 사원들은 城이나 망루ㆍ식수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개경의 보호시설로서 기능하였다. 또 지방과 연결되는 관문적 시설로서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점은 이들 사원이 개경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과 연관된다. 이렇게 사원이 군사적으로 이용된 것은 수도 근처에 존재했기 때문이지만 국가의 공공기관과 같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정치회합의 장소로 이용된 사원으로는 왕궁 및 兵部에 가깝게 위치한 興國寺를 들 수 있다. 흥왕사는 충렬왕 때 원에 대한 모반사건을 국문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후에는 우왕에 대항하는 모임을 가질 경우 사원이 이용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국왕에 반대하는 모임을 가질 때에도 사원을 이용하였다.

2018년 10월 17일에 진행된 <경기문화유산학교> 4강 강연 모습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과 공간구성 (2) : 고려시대 사원의 공간구성> 바로가기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과 공간구성 (3) :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맺음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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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

    • 2018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일/ 2018.8.13

      기획/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편집/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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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 경기문화예술의 모든 것,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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