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과 공간구성 (2)

고려시대 사원의 공간구성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이승연 (경기문화재연구원)


3. 고려시대 사원의 공간구성

최근까지 발굴조사된 고려시대 사원 건물지의 성격은 영역 내 위치, 배치상 주변 건물지와 관계(위계, 기능), 규모, 평면구성(칸수와 주칸 구성), 유구의 가공 정도, 내부시설, 배치의 변화정도 등을 근거로 추정하고 있다.

1) 上院領域

사제간의 직접적인 불법 전수를 통해 철저한 계승관계를 유지했던 선종사원에서 法堂과 方丈, 影堂으로 이루어진 上院領域은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다. 몇몇 사료의 내용과 유구의 구성을 종합해 볼 때, 10~11세기가 되면 이러한 방장과 영당은 상호 연관관계를 맺으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강당 좌우에 있던 건물에 이입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방장과 영당이 법당과 동일한 영역 내에 나란히 위치하게 되자, 선종사원에는 ‘上院’이라는 독특한 영역이 형성되었다.

(1) 法堂[禪堂, 禪法堂, 選法堂, 善法堂, 說法殿], 講堂

法堂은 선종사원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주지가 부처를 대신하여 說法하거나 入寂하는 장소로 불상을 안치하는 불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새로 사원을 개창한 禪僧들은 가장 위계가 높고 상징적인 법당을 갖추려고 노력하였는데, 중국에서 경험한 선종사원 제도를 바탕으로 한국 고대사원 講堂에 이입하였다. 이는 강경을 위주로 하는 강당과 설법을 위주로 하는 법당의 성격과 불전 뒤에 위치하는 배치의 유사성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법당이 이입되기전 고대사원의 강당은 講說 외에 대규모 법회나 제사와 같은 공적인 기능도 겸행했던 곳이다.
9~10세기에 법당은 불전 뒤에 놓였던 기존 강당 자리에 들어서되(강설과 대규모 법회가 이루어지던 강당과 달리) 설법 위주의 법당으로 바뀌면서 규모도 축소되고 점차 장방형에서 방형평면으로 변해간다. 선종사원에서는 소재도량이나 기우제를 지내거나 왕의 축수를 기원하는 법회를 연 경우는 매우 드물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 오히려 개경의 사원이나 궁궐 내에 선사를 초청하여 법회를 여는 경우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즉 선종사원의 법당에서는 더 이상 강당에서 이루어지던 다양한 공적 기능이 행해지지 않았으며, 선승들을 위한 설법 공간으로만 기능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개경 주변의 사원에서는 대규모 불교의례를 수용할 만한 공간이 필요했던 것과는 달리, 선종사원에서는 승려들이 수행하고, 생활하는 공간에 대한 고민이 더 컸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능의 축소는 기능을 담는 건물 규모 축소를 가져왔다.

(2) 方丈[上房, 上方]

方丈은 주지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주지가 거처하는 곳으로 說法ㆍ接客ㆍ入寂ㆍ喪禮 공간으로도 등장한다. 중국이나 일본 선종사원의 일반적인 구성은 法堂 뒤쪽으로 중심축선상에 內方丈과 方丈을 배치하고, 법당 좌우에 祖師堂과 土地堂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선종사원은 건립배경이 달라 가람배치면에서도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방장은 중국선종사원과 달리 법당 옆에 위치하며, 9~10세기에는 ‘上房(方)’ 또는 ‘上院’이란 용어 속에 종종 내포되어 있다. 無着道忠(1653~1744)이 편찬한 󰡔禪林象器箋󰡕에는 ‘上房은 본디 山上佛寺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住持를 일컫는 말로 上方이라고도 하며, 사원 내 가장 높고 깊은 처소를 上方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한국의 금석문에 등장하는 ‘上房’과 ‘上方’도 용례상 ‘주지’ 또는 ‘주지가 기거하는 공간’을 가리키고 있으며, 사원 내 법당과 더불어 방장이 위치한 가장 높은 위계의 영역을 ‘上院’이라 지칭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보조선사는 880년에 장흥 보림사 上房에서, 통효대사는 889년 강릉 굴산사 上房에서 입적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동진대사는 947년에 입적하기 전 옥룡사의 房前에 대중들을 모아놓고 마당에 나아가 유훈을 남긴 뒤, 房으로 들어가 입멸하였는데, 이곳이 ‘上院’이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房’은 ‘繩床’이 놓여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方丈’임을 짐작할 수 있고, ‘上院’은 ‘方丈이 위치한 가장 높은 위계의 院’으로 추정된다. 고려 광종은 원종대사가 왕성을 떠나 고달사로 돌아가자(949~958년 사이 기록) 송덕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구 속에도 원종대사 또는 그가 머무르는 곳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上房’이 등장한다. 또한 도선국사는 태안사의 上方에 머무를 때 도적이 침입했으나 禪座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선좌는 대개 법당에 놓이는 가구이므로, 상방은 ‘法堂과 方丈이 포함된 上院’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의 내용들을 통해 유추해 보면 법당과 방장은 한 영역에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1390년 대지국사 입적시 방장의 서쪽 남은 땅에 자신의 壽堂을 짓도록 하여 준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말 기록이지만 ‘壽堂’이 ‘影堂’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영당이 방장의 서쪽에 위치하였음을 보여준다.

(3) 影堂[祖堂, 眞堂, 壽堂]과 塔碑 (碑의 위치 또는 관련 전각에 관한 기록이 없음)

‘影堂’은 9~12세기에 선종사원 내 六祖慧能이나 開山祖, 입적한 高僧의 眞影을 모신 祠堂을 말하며, 14세기 후반에는 ‘眞堂’․‘壽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나말려초의 유학승들은 선사의 유적을 순례하면서 그들을 모신 影堂을 참배하였으며, 국내 선사들은 고승의 유허를 답사하며 眞影을 추모하며 弟子之禮를 펴거나 사원 내 조사를 숭배하기 위해 影堂을 건립하여 그 권위를 인정받으려 하였다.
 당나라로 유학 갔다 돌아와 신라에 선종을 전한 신행선사(704~779)가 斷俗寺에서 입적하자, 이름난 장인을 불러서 影幀을 그리고 浮圖를 만들어 사리를 모신 것으로 기록 되어 있어, 단속사에 신행선사의 영당을 건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진감선사가 9세기 중반(840년 이후~850년)에 창건한 玉泉寺[雙溪寺]에는 六祖影堂을 건립하였고, 聖住寺에는 像殿과 影堂을 개창했다는 기록 이 있다. 성주사 영당도 성주산문의 개산조인 낭혜화상이 건립하였으니, 옥천사와 마찬가지로 육조 혜능의 영당일 가능성이 높다. 진공대사는 874년 이후에 陳田寺에 들러 도의선사의 유허를 답사하고 선사의 진영에 추모하며 제자의식을 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陳田寺에도 도의선사의 영당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림사홍각선사비」(886) 말미에 실린 시구를 보면 홍각선사 입적(880) 후 碑를 세우고 그의 眞影을 모신 전각이 건립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억정사대지국사지감원명탑비」(1393)에는 대지국사가 1390년에 문인에게 입적할 때가 되었음을 말하며 方丈 西隙地[서쪽 남은 땅]에 자신의 壽堂[죽기 전 살아있을 때 자기의 影閣을 짓는 것]을 짓도록 하여 준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말의 기록이지만 영당이 방장의 서쪽에 위치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회암사 영당지(14세기 후반~16세기)는 설법전지의 좌측에 온돌방 2칸과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서쪽에 대응되게 위치한 조사전지는 내부에 마루를 깔고 수좌료지와 구분되는 벽체를 축조하였다. 영당지에는 온돌이 깔려 있는데, 이는 이후 용도변경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법상종 사원인 법천사의 부도전지는 지광국사현묘탑지와 지광국사현묘탑비를 둘러싸고 전면에 문지를 포함한 회랑 및 이를 둘러싼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건물지의 용도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고승의 탑비와 부도와 함께 독립된 영역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 고승의 영정을 모시고 기리는 영당과 부속전각으로 추정된다. 이와 유사한 배치는 삼각산 삼천사 대지암지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림 1. 회암사 설법전지․방장지․조사전지․영당지 (경기도박물관․기전문화재연구원 2003)
그림 2. 법천사 부도전지(강원문화재연구소 2009)

(4) 浮圖[層冢]

고려시대 선종사원에서는 주지의 입적에 따른 상례 공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료를 통해볼 때 이러한 기능은 禪室에서 수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禪室’은 9~10세기 비문 속 용례를 통해 볼 때 法堂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되며, 󰡔禪院淸規󰡕 제7권 「尊宿遷化」에 존숙의 장례에 관한 내용을 참고해 보면 상례 공간이 더욱 법당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주사 낭혜대사는 888년 11월 22일에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는데, 3일 후에 유체를 받들어 임시로 禪室에 빈소를 정하였다. 이때가 수행 정진하는 결재 중이어서 해제할 때까지는 선실에서 假葬禮를 행하였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나서 돌을 다듬어 層冢을 봉하였는데(越二年攻石封層冢), 僧俗이 함께 시호를 내려줄 것과 塔銘을 지어줄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의 경우 건립위치와 건립과정이 기록되어 있고, 이를 ‘像法’이라 규정하고 있다. 부도는 서북쪽에 산기슭에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알려진 승탑의 위치는 중심사역에서 벗어나 (서)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또한 國工이 돌을 다듬었다하니, 부도양식을 통해 사원이나 법맥, 장인집단 등 상호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주장은 좀더 검토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여러 비문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승이 方丈(또는 法堂)에서 입적하면 3일 후 화장하여 수습한 사리와 유골을 龕室에 넣어 빈소인 禪室(法堂)에 안치하고, 부도를 세울 북쪽 산기슭로 옮겨서는 石戶를 설치하여 遺骨을 封閉한 후 부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 中院領域

(1) 佛殿[像殿]

불전의 평면은 구조적 해결 속에 교리 및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성됨에 따라 불단의 위치나 후불벽의 구성, 수용 인원 등을 고려하여 계획된다.
 영암사 금당지(9세기 중엽~고려후기, 3×3칸)는 3차에 걸쳐 증개축되었다. 영암사지 금당지는 위계면에서는 여전히 불전지가 법당지보다 높은 상황에서 창건된 사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선종의 초기정신인 법당이 중시되어 불전영역을 아우르는 구성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전은 상단 깊숙이 앉히되 다채로운 석조장식으로 그 장엄을 표현해 주고, 초기법당은 동일 영역 내에 석탑을 건립하고 부속건축물들과 하나의 마당을 둘러싸는 적극적인 공간으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 나-1건물지(불전지)는 정면 5칸(2.3m-3.7m), 측면 3칸(2.4m-4.4m-2.4m)의 남향 건물지로 고달사지의 나-1건물지는 어칸 중앙에 불대좌가 안치된 불전지로, 건물지 밖 남쪽 중앙에는 나-1추정탑지가, 건물지 밖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서는 나-2탑지가 발굴되었다. 이 건물지의 기단은 가구식 기단과 그 주변으로 약 160∼170cm 너비가 되게 박석을 깔아주고 면을 맞춘 기단이 조합된 이중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정된 층위에서 출토된 유물이 없으나, 기단이나 초석형태, 석조불대좌의 조각수법 등을 볼 때 고려초기 건물지로 추정된다. 


그림 3. 영암사 금당지 (동아대학교 박물관 1985)
그림 4. 고달사 불전지 (기전문화재연구원 2007)



(2) 탑

 사원 배치의 특징 중 고대로 갈수록 사상적 중심이 되는 건축물을 중심으로 뚜렷한 중심축을 보이고 주변의 건축물들이 이 특성이 잘 살아나도록 집중적인 질서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 질서는 집중, 장축, 직교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탑은 시대별 가람배치 변천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가람의 질서체계를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왕사(1067년 창건)는 2,800여 칸의 대규모 가람으로, 절 주위에 성곽을 쌓고 국왕의 모친을 위한 삼층원당과 금탑을 조성하였다. 이 사지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3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원에는 한 쌍의 팔각목탑지가 있는 쌍탑식 가람으로, ‘고구려탑의 전통과 신라의 쌍탑식 가람배치’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안양 안양사지는 2008~201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安養寺’명 기와와 塼塔址가 발굴되면서 고려 태조가 전탑을 세운 안양사임이 밝혀졌다. 그 하부에서 통일신라후기 문화층이 일부 확인됨에 따라 中初寺址 위에 安養寺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안양사지 중심사역의 배치는 중문-전탑-금당-강당-승방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남측과 좌우측에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안양사지 창건과 관련된 층위는 고려전기에 해당하며, 안양사의 사세가 확장된 것은 11세기 이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3) 僧堂, 僧房

안양 안양사 승방지(건물지2)는 강당지(건물지1) 북쪽에 위치한다. 초석간 위치와 간격으로 볼 때 정면 9칸, 측면 1칸 이상의 세방형 건물로 추정되나 북쪽기단의 장대석렬이 동쪽으로 이어지다가 북쪽 방향으로 직각에 가깝게 꺾여 ‘凵’자형일 가능성도 있다. 자연석 초석으로 주칸거리는 정면 4.1~4.3m, 측면은 5.1m이다. 승당은 선승들이 모여 좌선정진하며 공양하는 곳이다. 집단적 수도생활을 중시하는 선종사원에서는 승당과 고원의 발전을 가져왔다. 송대 선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五山十刹圖󰡕의 그림을 보면 僧堂과 庫院이 불전의 오른쪽과 왼쪽 전면에 배치된 것을 볼 수 있다.
 고달사 가-1건물지(10~13세기)는 가-2건물지(법당지)․3건물지와 함께 하나의 院을 이루고 있는 장방형 건물지로, 그 위치나 규모(최대 규모일때 정면 기단길이 약 61m, 측면 기단길이 약 16.3m) 및 여러 차례의 중창 및 증개축을 거쳐온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승당지로 추정된다. 이는 승려의 수나 사세의 변화에 따라 중수되어 오다가 사세가 급격히 줄어든 조선시대에 이르면 더이상 유지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회암사 서승당지(14세기 후반~16세기)는 보광전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지의 규모는 정면 8칸(3.12∼4.33m), 측면 4칸(2.8∼3.11m)이며, 내부에 ‘ㅌ’자 형태로 마주보는 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아궁이는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2개소씩 확인되었는데, 모두 난방이 주목적인 함실 아궁이다. 고래는 건물 내벽을 따라 만든 ‘ㅌ’자의 외곽 ‘ㄷ’자 부분은 2골씩 두고, 중앙 ‘一’자 부분은 벽체를 중심으로 총 4골을 두었다. 굴뚝은 서쪽 기단 밖의 외곽 석축단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그림 5. 안양사지 강당지ㆍ승방지 전경 (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그림 6. 고달사 가-1건물지, 가-12건물지 (경기문화재연구원 2014)


그림 7. 회암사 서승당지 (경기도박물관․경기문화재연구원 2009)


3) 下院領域

(1) 庫院

승려들의 식사와 의례에 사용되는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을 중심으로, 사원 경영을 담당하는 지사들의 요사, 의례 및 창고 등의 기능이 복합된 건축군이다. 선종사원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구로 최근 庫院 추정되는 유구가 몇몇 선종사원지에서 발굴되고 있다. 굴산사 건물지3(12세기)은 정면 6칸(4.1m), 측면 4칸(2.6m-3.5m-3.5m-2.6m) 건물로 초석 21기가 남아있다. 건물 동쪽에는 별다른 시설을 두지 않은 반면, 서쪽에는 난방시설이 있다. 서쪽 세 번째 칸에는 2m 내외의 장대석을 방형으로 두른 공간(길이 2.9m, 너비 4.1m, 기단상면보다 50cm 낮음)이 있고, 그 뒤에는 부뚜막 없이 자연석으로 축조한 아궁이와 고래, 구들장, 연도가 남아있다. 아궁이는 전면에서 취사용기나 도구가 확인되지 않아 난방시설로 추정된다. 고래는 4줄로 조성하였으나 각 2줄이 1줄로 합쳐져 ‘S’자형으로 이어지다가 하나로 연결되어 북서쪽 외곽연도로 이어지는 형태다. 연도는 건물의 북서쪽 모서리 외곽으로 4.2m 가량 돌출된 형태로 폭은 1.4m이다. 배연구는 방형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북단은 1매의 장대석으로 마감하였다. 이 굴산사 건물지3(12세기)은 1棟의 짝수칸 건물로 ‘일동이실형’ 평면을 가졌으며, 실상사 부여-8호 건물지(통일신라→고려)와 유사한 구들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실상사 부여-8호 건물지(고려)는 ‘ㅗ’자형 평면으로, 정면 6칸(3.75m), 측면 5칸(3.02m-4.0m-4.0m-3.02m-4.65m)이다. 구들은 외줄고래로 내부에 개축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북쪽 첫 번째 칸에서(우측면칸에는) 3개 영역으로 구분된 6기의 아궁이가 확인됨에 따라 난방은 물론 조리를 위한 부엌이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사자는 이 건물의 성격에 대해 6기의 아궁이와 고래시설 및 주변 건물지 등을 고려하여 선종사원 庫院의 중심건물인 부엌[廚]과 승려의 침식공간[僧房址]이 결합된 특수용도의 건물지로 판단하였다. 유구 중복 양상으로 볼 때 이 건물지 축조 후 그 서쪽으로 醬庫址로 추정한 불교-7호 건물지(고려)가 건립되어 있다. 정면 3칸(5.4m) 이상, 측면 3칸(2.4m-5.4m-2.4m) 규모로, 대형옹 수혈시설 43기(옹 26기, 수혈 17기)가 확인되었다. 건물지 성토층에서는 중판선문ㆍ어골문 기와편 등이 확인되었으며, 폐기층에서는 ‘實相’명 기와편, 연화문 수막새, 포도당초문 암막새, 청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199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할 당시 고래 내부에서 청동향로편이, 내부에서 귀면와(총 13점)는 물론 박공막새, 연화문 수막새ㆍ포도당초문 암막새편이 집중 출토되었다. 이상의 출토유물을 고려할 때, 부여-8호 건물지의 성격이 승당지일 가능성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불교-8호 건물지의 경우 내부에 대형 옹이 출토되었으나, 대개의 ‘醬庫’가 담장으로 둘러싸인 장독대인 점을 감안할 때 유구명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8. 굴산사 건물지3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5)


그림 9. 실상사 불교-7호 건물지, 대형옹 노출상황 (불교문화재연구소 2015, 2016)

(2) 廚庫+浴室 / 製茶室

고달사 가-4건물지(11~12세기)는 마루+구들+욕실+-구들로 구성된 정면 4칸(4.3~4.6m), 측면 1칸(5.5m) 규모의 건물지이다. 실의 구성은 오른쪽(남쪽)에서부터 순으로 되어 있다. 우어칸과 좌협칸에는 방형으로 구획된 아궁이와 외줄고래가 남아있으며, 좌어칸에는 石槽(장변길이 3.21m, 단변길이는 1.49m, 높이 0.98m)가 놓여져 있고, 우협칸에는 우물마루흔적인 탄화판재가 남아있다. 탄화판재[우물마루] 상부 소토층에서는 상당량의 기와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다수의 청자와 도기, 흑유완 등도 복원 가능한 형태로 출토되었고, 철정, 배목, 고리, 국화쇠 등 다량의 철물이 출토되어 廚庫+浴室 용도의 건물로 추정된다.


그림 10. 고달사 가-4건물지 유물 출토상태 (기전문화재연구원 2007)
 
(3) 방아간

굴산사 방아시설(12세기)은 정면 2칸(3.2m-1.6m), 측면 1칸(2.6m)으로 사역중심공간과 생활공간을 경계 짓는 담장3의 밖에 위치하고 있다. 별도의 기단 없이 장방형 벽체를 둘러 공간을 마련하였는데, 정면에는 벽체가 시설되어 있지 않아 출입공간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방형초석(60cm) 3기가 높여 있고 나머지 3기는 벽체 내부에 있다. 중앙에는 약 40cm 내외의 장방형 석재 2매를 평행하도록 수직으로 박아 디딜방아 거치대(볼씨)를 놓았으며, 그 동쪽으로 1.5m 떨어진 지점에는 방아확(내부공 지름 25cm)이 있다.


그림 11. 굴산사 방아시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5)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과 공간구성 (1) :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 바로가기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과 공간구성 (3) : 고려시대 사원의 기능/맺음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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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

    • 2018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일/ 2018.8.13

      기획/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편집/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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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 경기문화예술의 모든 것,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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