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디아스포라 국제 학술 컨퍼런스]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산에서 플랫폼으로 : 경기도의 이점과 역할 2

2019.04.12 /

이 글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코리안 디아스포라 국제 학술 컨퍼런스」 자료집에서 발췌되었습니다.  

윤인진(고려대학교 교수)


3.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

재외한인의 이산은 유대인, 중국인,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등 세계의 여러 민족들과 비교해서 짧지만 전 세계 어느 곳에도 한인이 없는 곳은 없을 정도로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주와 정착의 경험을 해 왔다. 재외한인의 해외 이주의 역사를 시기적으로 대별하면 19세기 중엽부터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한 구이민, 해방 이후부터 1990년 한소 수교(한국과 구소련의 국교 수립) 이전까지 북미, 중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주한 신이민, 1990년 한소수교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재외동포들이 모국으로 귀환하는 귀환이민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구별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한일합방이 일어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이 기근, 빈곤, 지배층의 압제를 피해서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이주하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들의 생활고가 심했고, 서구 열강이 조선에서 이권 경쟁을 벌이면서 전쟁과 정변이 잦아지면서 사회의 혼란은 극심해졌다. 여기에 일본이 조선에서 쌀과 곡물을 대량으로 반출하면서 식량난이 가중되었다. 조선 후기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경제유민(流民)으로서 당시 입국이 금지되었던 지역에서 농지를 개간하면서 신분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갔다. 처음에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적 이주였으나 일본의 조선 침략이 가속화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정치적 이주를 단행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한인의 이주는 190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하와이 거주 일본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이 1905년에 한인이주를 금지하였다. 1903년 1월부터 1905년 8월까지 7,291명의 이주자들이 64회에 걸쳐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20대의 독신 남성이었다. 이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사진결혼의 형태로 1,000여 명 가량의 한인 여성들이 1924년까지 하와이로 건너가서 이민 가정을 형성하였다(윤인진, 2003). 중남미로의 이주는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재배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1,033명이 떠난 것이 효시이며, 이들 중 300여 명이 1921년에 경제난을 피해 쿠바로 재이주하였다(이자경, 2007). 이들과 후손들은 모국과의 연계가 끊어지자 아주 작은 공동체를 유지하다 현지 사회문화에 급속히 동화되었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인데, 이 시기에는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정치적 난민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만주지역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인들의 대규모 집단이주를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대 후반 만주지역의 한인인구는 약 50만 명 정도 증가했는데, 이중 약 25만 명 정도가 집단이주자인 것으로 알려졌다(권태환, 1996).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경제호황을 맞아 한인들이 노동자의 신분으로 도일하여 1920년대 말에는 재일한인의 규모가 약 30만 명에 이르렀다.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규모의 한인들이 광산, 전쟁터로 끌려갔다. 이런 식으로 재일한인의 규모는 급속히 증가해서 일본이 미국에게 패한 1945년 8월까지 약 230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가 패전 후 많은 한인들이 조국으로 귀환하자 급속히 감소하여 1947년에는 598 507명으로 급감하였다(이문웅 1996).


일제강점기 후반인 1939~1945년에 한인들은 강제징용에 의해 당시 일본령이었던 남사할린으로 이주했는데, 이들과 이들 후손들의 일부가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으로 영주귀국하게 되었다. 한인들은 일찍이 1860년대에 사할린으로 자발적으로 농업이주를 했으나 그 규모는 1897년에 실시된 러시아 인구조사에 따르면 불과 67명에 불과했다(조재순, 2009). 일제 식민통치 기간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사할린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한인 인구는 증가했으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정책으로 연해주의 고려인들과 함께 북위 50도 이북의 북사할린 한인 천여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 이후로 사할린에는 일본령인 남사할린에만 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한인들을 남사할린으로 이주시켜 30여 개 탄광과 벌목장, 비행장, 도로, 철도 등 건설현장에서 강제로 노동하게 하였다.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한인 수는 약 6만~1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조재순, 2009). 1945년 8월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남사할린을 점령하자 한인들은 귀국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소련은 당시 일본국적을 갖고 있던 한인 약 43,000여 명의 출국을 금지했다. 일본이 패전 이후 사할린 한인과 재일한인을 포함한 모든 한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면서 사할린에 남게 된 한인들을 무국적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생존 차원에서 소련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종전 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할린 한인들은 한국으로 귀국할 수 없다가 1988년 소련정부가 사할린 한인의 모국방문과 영주귀국을 허용하면서 1990년부터 한인 1세들의 영주귀국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한국정부가 이민정책을 처음으로 수립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해방을 맞이해서 중국과 일본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귀국해서 일시적으로 재외동포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해방 직후 만주로부터 조선으로 귀환한 사람은 중국 거주 한인의 40%에 해당하는 7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으로부터는 1945년 8월부터 1950년까지 104만 명이 귀국한 것으로 일본 정부의 공식통계에 집계되었는데, 이 통계에는 자비 귀국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실질적인 귀국자 수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윤인진, 2003).


이 시기에도 해외로 이주하는 한인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들이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또한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간 학생들 중에 상당수가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 앉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활짝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윤인진, 2003).


냉전체제에서 재일한인사회는 총련과 민단으로 양분되어 대립했고, 북한은 재일한인을 포함해서 전체 재외동포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재외동포정책을 전개했다. 북한은 한국전쟁 종전 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재일한인을 받아들이고자 했고, 일본은 당시 국내 생활보호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재일한인을 북한에 내보내고자 했다. 이러한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서 재일한인 북송사업이 시작됐는데,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총 93,000여 명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믿고 갔지만 대다수가 불순계층으로 차별받았고 상당수는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사망하거나 비참한 생활을 보냈다(오일환, 2010). 


네 번째 시기는 1962년부터 1990년 한소 수교 이전까지인데 이때부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중국, 일본, 독립국가연합을 제외한 대부분의 재외한인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은 이 시기에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이다. 1962년에 한국정부는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로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민정책의 목적은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냄으로서 인구압력을 줄이고 재외동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었다 최초의 집단이민은 1963년 브라질로 103명의 농업 이민자들이 출발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농장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중남미 국가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이민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농업 경험이 없었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어서 곧바로 대도시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하였다(손정수, 2007). 또한 1963년부터는 서독으로 광부들과 여성 간호사들이 계약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했다. 1963년에 247명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총 5,323명의 광부들이 파견됐고, 1966년에 128명의 여성 간호사들을 시작으로 1976년까지 총 10032명의 여성 간호사들이 독일로 건너갔다(한·유럽 연구회 2003).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는 북·서유럽 이민자들만을 선호하던 이민법이 1960년대 중반에 개정되어 이민 문호가 한인에게도 열리게 되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화이트 칼라직에 종사했던 중산층이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윤인진, 2003). 한인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는 연 35,000명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한국이 미국의 3대 이민국이 되었다. 하지만 한인이민자 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정점으로 해서 감소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이주를 포기하거나 역이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1965년 이민법 개정이 정주형 가족이민의 물꼬를 열었다고 한다면 1955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된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으로 기술자들이 파견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종전 이후 이들이 중동, 동남아시아, 호주 등지로 재이주해서 동남아시아 한인사회 형성의 토대를 마련했다. 한국은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미국과 베트남 간 휴전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총 312,853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총 24,000여 명 정도의 한국인 기술자들이 군사지원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베트남에 취업했다. 이들은 한진, 현대, 삼환기업 등 한국기업들과 Vinnell, PA&E 등 미국기업들에 취업해서 준군사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개인의 경제적 이득을 취했고 동시에 한국의 경제발전에도 기여했다.


베트남 전쟁의 종료와 맞물려 1973년에는 제1차 오일쇼크로 한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이 경제위기를 맞이했다. 한국정부는 파독광부들과 여성 간호사들의 계약노동이주 경험을 살려서 국내의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중동에서 일기 시작한 건설업 시장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들을 중동으로 송출했다. 중동 특수가 한창이던 1985년에는 120,245명이 주로 건설노동자로 중동에서 일을 했다. 이후 건설업 붐이 꺾이자 한국인 노동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다른 국가들로 재이주를 선택했다.


호주로의 한인이주는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독일, 베트남, 중동 등지로 계약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했던 한인들의 재이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60~1970년대에 호주에서 일기 시한 광산 개발붐으로 생겨난 고용기회를 찾아서 한인들이 호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1975년 사이에 500여 명에 이르는 파월 기술자, 현역 제대 취업자들이 대거 호주로 이주했다. 이들은 단기 관광비자로 입국해서 불법취업을 하다가 호주정부의 사면령으로 영주권을 취득했고 한국에 남겨둔 가족들을 초청했다. 이런 소식은 이란,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남미 국가로 이민 갔던 한인들과 파독광부와 간호여성 등을 호주로 끌어 들이게 되었다.


이후 호주정부가 1980년 6월에 불법체류자에 대한 제2차 사면령을 내리면서 한인 불법체류자들은 합법적인 정착이 가능해졌고 이들이 가족들과 재결합하면서 호주의 한인사회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6년부터 시작된 투자이민으로 호주에 들어온 새로운 한인 이민자들은 기존의 한인사회 구성원들과 성격이 달랐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본을 갖고 정착을 시작했고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생활을 했다. 이렇게 구이민자와 신이민자 간의 이주배경과 이주방식, 그리고 정착 과정의 차이는 두 집단 간의 거리감을 넓히고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재외한인 이주사의 다섯 번째 시기는 1990년 한소수교와 1992년 한중수교를 통해 그 이전에는 잊혔던 구소련(1992년 이후 독립국가연합으로 재편)과 중국의 동포들이 재외동포로 재편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즉 냉전 체제에서는 공산권 동포들이 한국인의 관심 밖에 있다가 구소련과 중국과 국교 수립이 되고 나서 재외동포 통계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외교통상부의 재외동포현황통계에 따르면 1990년 재외동포의 수는 232만 명에서 1995년에는 554만 명으로 급증하게 됐다. 특히 이 시기에 중국동포들이 한국으로 취업, 결혼, 유학, 방문 등의 목적으로 입국이 증가하면서 국내에서 중국동포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1997년 말에는 당시 아시아를 강타했던 외환위기로 인해 국내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고용에 불안감을 느낀 30대들이 해외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1999년에 5,267명이 취업이민으로 떠났고 2000년에는 그 수가 8,369명으로 증가했다(윤인진, 2013). 이렇게 취업을 목적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은 30대가 주류였으며, 고학력·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캐나다가 고학력, 전문기술직 종사자를 우대하는 이민정책을 실행하자 미국 대신 캐나다가 한인 이주의 새로운 목적지가 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 한인 이주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한 곳이 베트남, 필리핀, 태국과 같은 동남아시아이다. 외교통상부의 재외동포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들어 한인 인구 증가폭이 가장 큰 곳이 동남아시아이어서 이 지역의 한인과 한인사회 연구와 지원정책 개발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로의 이주는 일찍이 일제강점기부터 강제징용의 형태로 나타났으나 본격적인 이주는 196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국내기업 등이 목재, 석유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 베트남, 필리핀, 태국에 거주하고 있는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베트남의 경우에는 1992년 이후 한국-베트남 공식 수교로 이민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2014년에 한국의 외국인직접투자 1위 국가로 성장할 만큼 중국을 대신할 생산 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과 은퇴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이민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1860년대 초부터 시작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지금까지 150년을 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공과 침체의 상반된 기억과 경험을 축적해왔다.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시작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그 이후의 연속적 이주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모국-경유국-거주국 간에 초국가적 연결망을 형성했다. 현대의 재외동포는 교통·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 초국가적 공간에서 과거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그리고 유연한 다중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는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를 한 단계 진화하여 플랫폼으로서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발전시켜 재외동포와 모국이 상생 발전하는 한민족 공영체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4. 경기도의 이점과 역할


인류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지리의 중요성은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이 분명하다. 재레드 다이아몬드(2005)는 그의 명저 『총, 균, 쇠』에서 인류 문명은 대규모 식량 생산이 가능하고, 지역간 이동과 교류가 원활하고, 지역의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곳에서 고등문명이 발생하기 쉽고 이것이 늦게 발전한 지역과 국가를 정복한 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일본정치를 연구하는 서승원(2019: 11)은 그의 신서 『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에서 지정학적 상상력을 “지정학적 전제나 표현, 인식 등으로 구성되며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해석과 인식을 틀”이라고 정의한다. 일본 아베 총리의 문제점은 21세기적 현상에 대해 19세기 내지 20세기의 복고적이고 또한 지리결정론적인 개념과 발상에 의거하여 대응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중간에 끼인 반도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지리결정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강대국 결정론의 노예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권의 책은 한 편으로는 한 국가와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지리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지리는 관점에 따라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지리는 어디까지나 잠재적(potential)이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인류 문명의 발전과 관련해서 지적할 것은 새로운 문화는 두 개의 문화가 교차하고 교류하는 ‘접촉지대’(contact zone)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다라 미술은 알렉산더 대왕의 간다라 침략으로 불교 미술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이렇듯 문화는 기본적으로 혼종적이며 혼종성은 문화의 경계 지역에서 발생하기 쉽다.


이런 점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쉽게 넘나들고 교류하고 섞일 수 있는 가교적인 장소에 위치한 도시와 국가는 중계무역이 융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재력과 군사력을 키우고 문화를 융성하게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베니스 공화국은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베네치아에 있던 도시국가로서 8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지중해의 해양 강국으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유럽과 중동을 연결하는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키우고 그 재력으로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해서 르네상스 문명을 꽃피운 것이다. 


가교적 위치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경기도는 21세기 아시아 중심의 시대를 열어가는 우리나라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인천은 바다와 하늘로 한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게이트웨이로서, 특히, 중국, 베트남, 인도 등 급속하게 성장하는 아시아의 국가들로 진출하는 도약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경기도는 남북한을 연결하고 교류협력하는 가장 현실적으로 중요한 가교이다. 육로, 해로, 항공로를 통해서 가장 빠르게 남북한을 연결할 수 있는 곳이 경기도이다. 특히 최근 들어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교류협력의 가능성이 재개되는 상황에서 경기도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한강하류공동개발사업은 남북한의 상호이익을 증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다.


경기도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플랫폼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건들을 갖춰야 할 것이다.


첫째, 경기도지사를 포함해서 경기도의 정책 지도자들이 플랫폼으로서의 경기도의 비전과 역할에 대한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경기도가 한국의 일개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때에 따라서는 한국을 선도하는 글로벌 허브와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고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실천 전략을 개발하고 경기도민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별히 플랫폼으로서 경기도의 역할과 관련해서 경기도의 정책 지도자들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하고 경기도민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


둘째, 재외동포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할 수 있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생태계를 갖춰야 한다. 구체적으로 재외동포 기업가들이 경기도에서 자유롭고 원활한 기업활동을 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정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세계한상센터와 같은 비즈니스 센터를 건립해서 전 세계 한인 기업가들이 비즈니스 정보를 교환하고, 상거래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재외동포교육원과 같은 교육시설을 건립해서 재외동포 차세대들이 모국을 방문해서 모국의 전통과 문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 한민족 정체성과 자긍심을 배우고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재외동포들이 플랫폼에 참여해서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지향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플랫폼은 수익을 창출하는 상업적 모델만이 아니라 공익을 추구하는 사회적 경제 모델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 최대 숙박공유업체인 에어비앤비는 숙박을 예약하려는 손님과 숙소를 빌려주는 주인을 연결해주고 주인으로부터 중개수수료를 받는다. 이 모델을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연관시키면 세계한인민박사이트를 생각할 수 있고(실제로 한인텔(www.hanintel.com)이 영업 중임), 그 외에도 재외동포 간에 수요와 공급을 연결해주어 상호간에 실질적인 혜택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넷째, 경기도에서 개인의 배경과 특성과 상관없이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평등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기 위해서는 경기도민의 다문화 인식과 수용성이 제고되어야 한다. 인종과 민족, 종교와 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부여받고,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공간이 될 때 경기도는 더 많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참여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경기도는 중앙정부도 하지 못하고 다른 지자체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영역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다문화사회의 기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이 아직까지 제정되지 못했는데 경기도가 이를 선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와 관련해서 경기도민과 더 나아가 한국인의 다문화 인식과 수용성을 제고하는 방안으로 인천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을 단지 한민족의 해외이주와 정착의 역사만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 이민족의 한국으로의 이주와 정착의 역사를 함께 다루는 공간으로 변모할 것을 권고한다. 경기도의 구성원들이 나가고 들어오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통해 타산지석과 역지사지의 지혜를 배우고 글로벌, 다문화사회의 주역이 될 때 경기도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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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senmann, Thomas R.,Geoffrey Parker., and Marshall W, Van Alstyne, “Opening Platforms: How, When and Why?”, Havard Business School Entrepreneurial Management Working Paper No.09-030, 2008.


Niesbett, Richard.(최인철 역), The Geography of Thought(「생각의 지도: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2003(2004), 김영사.


① 이 부분은 필자의 논문 “재외동포와 재외동포정책”(「이민정책론」(박영사, 2016), 12장)의 일부 내용을 재인용헀다.

#정책사업팀 #코리안 디아스포라 #학술대회 #컨퍼런스

@조병택 @윤지원 @최진호 @윤인진 @송창주 @임영상 @허명철 @박본수 @신은미 @이석인 @김성하 @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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