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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고려시대 경기지역 사원의 성격 ⑤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시대 경기지역 사원의 성격


이승연 | 경기문화재연구원



|목차|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 開京과 京畿지역의 변화

  Ⅲ. 고려시대 開京과 京畿지역 사원의 종파와 기능

  Ⅳ. 맺음말


Ⅲ. 고려시대 開京과 京畿지역 사원의 종파와 기능


3. 裨補寺社, 資福寺


태조는 고려 建國의 정당성을 ‘부처의 護衛’에 두고, 그에 따른 사원의 개창을 도선의 山水順逆에 기준을 둔 ‘裨補寺社’1*를 건립하려 하였다. 태조는 개경에 10寺를 포함하여 25寺를 창건하였다. 이들 사원 중 개경의 水德을 비보하기 위한 것으로 상류에 廣明寺, 日月寺, 歸山寺, 法王寺가 있고, 합류 또는 중류에는 興國寺와 普濟寺, 內水口 방면에는 開國寺가 있다(李丙燾 1980: 97). 裨補寺社는 定期 佛敎儀禮를 행하였는데, 국가차원의 정기 불교의례는 대부분 개경 일대 사원에서 이루어졌으며. 國王祝壽ㆍ燃燈會ㆍ經行ㆍ仁王般若道場ㆍ飯僧 등은 지방의 중심사원에서도 정기적으로 행해졌는데 이 사원을 資福寺라고 하였다. 공양왕대에 국가이념으로서의 비보사사에 대한 회의론이 나타났고, 조선 태종 5년과 6년 사원의 경제기반을 박탈하는 제반 조처에 따라 자복사는 철폐되어갔다. 자복사는 불교를 통한 국가의례를 수행함은 물론 숙박, 시장의 기능도 갖추어 읍민을 결집하고 구휼하였으며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계수관 단위 자복사 중 楊州는 문종대 南京留守官이 된다.(고려사 지리지) 여기의 자복사는 태종 7년 명찰로 대체되는데 삼각산의 자은종 神穴寺이다. 고려시기에는 읍치 지역에 자복사가 있었다면 신증 역원조에 나오는 흥인문외 3리 지역의 普濟院이 자복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외에도 홍제원이나 이태원도 가능성이 있다. (한기문 2011: 300) 고고자료로 양주 자복사의 흔적은 없는가?


① 양주 官衙址


양주 관아는 조선시대 양주목의 치소로서 본래 견주의 옛터(현 양주시 고읍동)에 위치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일시적으로 폐목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복구되었고, 1511년(중종 6)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4~5시기 가량 중복된 유구를 확인하였는데, 이중 2~3차 조사에서 ‘大資福寺ㆍ卍’명 기와와 귀목문ㆍ범자문 막새, 불상대좌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에 양주 관아지가 들어서기 이전에 사원 관련 유적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나, 이 유물들은 조선 전~후기 유물들과 같이 출토되고 있어 증개축시 인근에서 부재를 조달하면서 반입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2009, 217~218)


그림 7. 양주 관아지 출토 기와 (기전문화재연구원, 2003)


② 안양 安養寺址【◀9세기 中初寺】 - 慈恩宗 惠謙大師[節州統 皇龍寺 恒昌和上]


- 위치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12-1 일원


안양사지는 조사 전 中初寺址 幢竿支柱(보물 제4호, 826~827년)와 공장부지에서 이전된 中初寺址 三層石塔(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 고려)이 위치하고 있어 中初寺址로 추정되어 왔다. 2008~2010년에 걸친 발굴조사로 ‘安養寺’명 기와와 塼塔址가 발굴되면서 고려 태조가 전탑을 세운 안양사의 위치와 가람배치가 밝혀졌고, 그 하부에서 통일신라후기 문화층이 일부 확인됨에 따라 中初寺址 위에 安養寺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235, 267).


중초사지 당간지주에는 보력 2년(826) 中初寺 동쪽 僧岳에서 돌을 떼어내 정미년(827)에 당간지주를 완성한 사실과 寺職이 새겨져 있어2* 당시 황룡사의 승려가 공사에 관여한 사실과 9세기 전반의 僧官制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安養寺와 관련해서는 李崇仁이 지은 『衿州安養寺塔重新記』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高麗 太祖와 能正에 의해 창건된 절로 태조가 이곳을 지나면서 裨補說에 따라 塔과 廟를 많이 세웠는데 안양사탑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 이후 신유년(1376)에 慈恩宗師 林公의 제자인 惠謙大師가 鐵原府院君 崔塋의 도움을 받아 安養寺塼塔을 중수하였다.3*


안양사지 중심사역의 배치는 중문-전탑-금당-강당-승방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남측과 좌우측에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유물의 제작시기는 토층과 자기를 고려할 때 통일신라후기~고려전기(9세기 중엽~10세기), 고려중기(11~13세기), 고려후기(14세기), 조선전기로 대별할 수 있다. 이 중 안양사지 창건과 관련된 층위는 고려전기에 해당하며, 안양사의 사세가 확장된 것은 11세기 이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4*

 

그림 8. 안양 안양사지 전경, 전탑 근경 (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1.『高麗史』 卷第2, 世家, 테조 26년(943) 4월.

2. 「中初寺址幢竿支柱銘」(827),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3.李崇仁, 「衿州安養寺塔重新記」, 『東文選』 卷76.

4.한울문화재연구원ㆍ안양시, 위의 보고서, 2013, p.315,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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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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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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