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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태조왕건의 고려건국 이야기 (3)

황제국체제와 북방정책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노명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3. 황제국체제와 북방정책


남방에 위치한 후백제나 신라와 달리, 고려는 북방의 대륙과 연결된 정세에 바로 대처해야 하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고려의 인접한 북변에 해당하는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 일대는 발해멸망을 전후하여 힘의 공백 지대로 남겨져 있었다. 발해 멸망 후 거란의 지배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만주(滿洲) 동부와 한반도 북변에는 자치 상태의 발해 유민집단들과 생여진 집단들이 분산된 정치적 집단들로 존재하였다. 또한 남쪽으로 계속 세력을 확대하는 동아시아의 초강대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거란(契丹)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고려는 근본적인 안보 대책을 마련해야 하였다. 왕건은 평양 일대 등 북변지역이나 자치 상태의 발해 유민집단 및 생여진 집단에 진취적인 북방 정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거란의 군사적 위협에 공동 대처하는 동맹적 세력권을 결집하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과 직결된 것이 황제국제도와 고려 중심의 소천하였다.


1) 고구려계승의식 ‧ 대발해유민정책 ‧ 북방경영


견훤과 궁예도 난세의 평정과 후삼국통일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과 정책은 통일신라의 판도 내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계승의식을 바탕으로 한 왕건의 후삼국통일은 단지 통일신라의 회복이 아니었다. 왕건은 즉위한지 네 달 만에 황폐된 채 방치되었던 평양을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곧 서경(西京)으로 격상시켰다. 남방의 백성들을 사민(徙民)시켜 충실하게 하고, 성을 쌓아, 당제(堂弟) 왕식렴(王式廉)에게 지키게 하였다. 왕건은 서경에 자주 순행하였으며, 태조 15년(932년)에는 군신(群臣)에게 서경 경영에 대해 이르기를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이곳에 도읍(都邑)을 정하려 한다.”고 하였다. 왕건은 적극적인 북방경영의 뜻을 분명히 천명하고 그것을 실행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북변의 진성(鎭城)을 설치하며 개척해 나갔다. 왕건의 적극적인 북방경영의식은 “고려”라는 국호에서도 나타나는 국초 이래의 고구려 계승의식과도 연관되었다. 궁예가 초기에 국호를 잠시 고구려의 이칭인 “고려”라 한 것은 지역주민의 고구려 유민의식에 편승한 정략적인 면이 강하고, 본인의 고구려계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곧 마진(摩震), 태봉(泰封) 등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착의형 나체상으로 제작된 태조 왕건의 동상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그가 자라난 지역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송악군이 포함된 한반도 서북부 옛 고구려지역에는 동명신앙(東明信仰) 등 고구려계의 토속문화가 민간에 뿌리박고 고려 말기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동명 신상(神像)과 지모신(地母神) 성격의 유화(柳花) 신상이 사당에 안치되어 숭배되고 있었다. 동명신앙은 민간에 널리 분포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국가적 제례 대상이기도 했다. 이규보의 진술에 의하면, 동명신앙이 민간에 뿌리박은 가운데 동명신화는 어리숙한 사람들이나 어린아이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사회 하층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동명신상 등 고구려계통의 신상은 옷을 입히는 나체상 양식으로, 동아시아일대에서 제례용 신상으로는 특이한 것이었다. 왕건의 아들인 광종대에 제작된 태조 왕건동상이 고구려 신상양식인 것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연결된 주목할 사실이다. 그 왕건동상은 고려 말까지 국가적 최고의 신성한 상징물로서 숭배되었다.


역시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발해가 망하고 오랜 후에도 발해유민 중에 동명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도 주목할 사실이다. 그 발해를 왕건은 “친척의 나라”라 하여 일종의 동족의식을 나타낸 바 있다. 태조 17년에 발해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유민을 대규모로 이끌고 내투하였을 때, 왕건은 그에게 왕실의 성인 왕씨를 사성(賜姓)하고, 발해의 종묘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신라왕 김부와 후백제왕 견훤에 준하는 최고의 예우를 하였다. 대광현이 이끈 집단 외에도 대단히 많은 발해 유민집단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고려에 내투해 들어 왔는바, 여진족이나 거란족 등의 다른 종족과 달리 그들은 무제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것은 후대의 왕들에게도 계승되었다.


2) 황제제도의 시행과 고려 중심의 천하


고려태조 왕건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황제제도나 그 후 점차 형성된 고려 중심의 천하와 관련된 사실들은 근래에 밝혀지고 있는 고려 역사의 왜곡되지 않은 모습이다. 고려 역사의 중요한 모습이 뒤늦게 밝혀진 것은 조선 초의 주자학 이념의 사대명분론(事大名分論)에 따른 역사편찬의 영향이 컸다. 사대명분론은 경직성을 띠는 주자학이념 외에도 동아시아의 새로운 유일 최강대세력인 명(明) 나라가 조선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꼬투리를 잡아 압박하는 국제적 형세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편찬된 『고려국사(高麗國史)』의 편찬에서 정도전 등은 사대명분론에 어긋나는 고려의 황제제도를 제후국의 제도로 바꾸어 황제‧천자를 왕으로 바꾸어 서술하는 등의 ‘개서(改書)’ 방식을 취하였다. 그것을 보완하여 다시 편찬한 변계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황제제도를 바탕으로 진행된 사실들이 제대로 서술될 수 없었고, 역사적 사실들의 왜곡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역사서술 방식의 구조적인 큰 문제로서 당시의 관료들 속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사대명분론적 이념을 완강하게 고집하는 변계량 등은 끝까지 개서를 관철하려 하였다. 이에 치열한 논쟁과 함께 고려 역사를 거듭 다시 편찬하며 반세기가 흘렀다.


그 논쟁을 종결시킨 세종은 고려의 황제제도를 비판하더라도 사실은 그대로 서술하는 ‘직서(直書)’를 지시하였는바, 그 결실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이다. 그러나 그 ‘직서’ 원칙은 황제‧천자 등의 위호나 고려가 중심이 되는 천하 등 황제제도의 핵심적 사실에는 적용되지 않고, 황제제도의 관제 등 부수적인 사실에만 적용되는 제한적 직서였다. 그 결과 고려의 황제‧ 천하 등이 삭제되거나 왕 등으로 개서됨으로써 태조 왕건대 이래로 시행된 고려의 황제제도는 『고려사』 등에는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최근까지 역사학계에서는 『고려사』 등에 적용된 ‘직서’가 온전한 직서라고 잘못 파악함으로써 고려 황제제도가 제대로 밝혀질 수 없었다.


태조 왕건은 즉위한 첫 날,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황제제도에 따라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으며, 즉위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그가 황제제도를 시행한 주요 동기는 무엇보다도 고려가 중심이 된 천하를 결집시켜 거란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고, 북방경영의 제도적 틀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 황제제도는 성종대 이후 잠시 중단되지만 대체로 후대의 왕들에 계승되어 13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926년에 세운 동단국(東丹國)이 928년 요양(遼陽)으로 철수하자, 동만주 일대에는 거란에 항거하며 자치 상태에 들어간 발해유민이나 생여진(生女眞) 집단들이 많이 존재하게 되었다. 왕건은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갔다. 정복팽창을 멈추지 않는 거란에 대한 방비는 고려에게도 국가의 흥망이 걸린 중요 현안이었다. 이러한 공동의 군사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고려가 중심이 되어 생여진・발해유민 집단들을 규합하는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갔다.


발해가 망하기 전에도 고려의 북변에는 발해의 지배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여진집단들이 존재하였다. 그들이 태조 왕건대 초기부터 고려의 ‘번(蕃)’으로 지칭되는 여진집단들이 었다. 왕건은 이들과의 관계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었다. 즉위 두 달 뒤에는 궁예를 피해 북변으로 들어가 골암성주가 되어 흑수번중(黑水蕃衆)을 이끌던 윤선(尹瑄)이 귀부하였다.


재위 3년(921년)에는 여진의 사정을 잘 아는 유금필과 군대를 파견하여 북변 골암진(鶻巖鎭) 일대를 침입하는 여진 추장 300명을 복종시키고 포로로 잡아간 고려인 3천여 명을 귀환시켰다. 발해멸망 후 특히 928년 동단국이 요양으로 옮겨 간 후, 동만주에는 자치 상태에 들어간 생여진 집단들이나 발해 유민집단들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이들에 대한 고려의 선무(宣撫)는 계속되어 고려에 귀부하는 집단들이 확대되었다. 태조 19년(936년)의 후백제를 정벌한 통일전쟁에는 유금필의 통솔하에 흑수‧달고‧철륵 등, ‘제번(諸蕃)의 기병’이 9,500명이나 동원되고 있었다.


당시 황제제도가 시행되었는바, 생여진 집단 등은 고려에 찾아와 방물을 바치는 형태의 교역을 하기도 하고, 그 수장은 고려의 관작을 받기도 하였다. 이 고려를 중심으로 한 생여진・발해유민 집단의 규합은 군사적으로는 대거란 동맹의 성격을 띠었다. 그들은 실제로 성종대와 현종대에 거란의 고려 침입 전쟁이 일어났을 때, 거란군의 움직임에 대한 사전 첩보를 알려 오기도 하였고, 거란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거란은 이미 태조 왕건대부터 이러한 대거란 동맹에 대처하고 와해시키려는 계책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태조 왕건은 넓은 안목으로 그 계책을 간파하고 잘 대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은 927년 고려와 대결을 벌이는 후백제와 바다를 통해 연결하고 있었다. 이 밀회는 사신이 탄 선박이 풍랑을 만나 중국 후당(後唐)에 표류함으로써 후당의 통보로 고려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고려가 의표를 찌르는 공격을 꾀하는 거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개성지도의 낙타교


고려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후, 거란은 937년, 939년, 942년에 걸쳐 자주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는 전에 없던 일이며, 특히 942년에는 30명에 달하는 많은 사신 일행과 낙타 50필을 보내왔다. 왕건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친을 약속하고, 갑자기 배반하여 멸망시킨 무도(無道)한 나라이어서 교린(交隣)할 수 없다고 하고 사신은 모두 바다의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개경 외곽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놓아 굶어 죽게 하였다.


친선 사절을 유배 보내고 살생이 죄악시되는 불교신앙을 가진 왕건이 죄 없는 낙타를 오랜 시간에 걸쳐 죽게 만든 이 사건은 만주의 발해 유민과 여진 집단들을 놓고 거란의 계략에 맞서는 상황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동국통감』에서는 당시의 정세에 대한 언급 없이, 이 사건을 태조의 발해를 위한 복수라고 보고, 결맹을 요청하러 온 사신을 죄준 것은 국익에 반하는 것으로 비난하였다. 당시의 정세와 연관하여 성호(星湖)는 이 사건이 발해 때문이 아니라, 의(義)를 들어 장차 강토를 다투려 한 것이라고 하고, 발해의 유민들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무렵 고려를 중심으로 결집되고 있던 동맹세력들은 거란의 사절 파견 공세에 의해 양국이 가까워지는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동맹세력들이 더 이상 고려를 믿고 대거란 동맹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거란의 사절공세가 있었던 기간 동안 『요사』 본기의 기록에는 여진 집단의 거란에 대한 조공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940년과 941년에는 고려의 북변에 인접한 압록강여진까지 거란에 조공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려가 중심이 된 대거란 동맹에 발생한 이완현상 내지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진 팽창을 계속하는 거란의 동맹 요청을 신뢰할 수 없다고 확고히 말하고 있는 왕건이 여진의 동향과 관련하여 거란의 사절 파견에 담긴 계략을 간파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언젠가 있을 피할 수 없는 거란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동맹의 유지를 위해 동맹세력들에게 고려의 대거란 대결의지를 공개적으로 뚜렷하게 보여 주어야만 되었다. 거란 사절의 유배도 세간의 주목을 끌었지만, 개경을 오간 내외국인들을 통해 만부교 아래에 묶여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죽어간 거란 사절의 낙타떼 이야기는 세간의 화제가 되어 널리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만부교는 이름이 바뀌어 조선 후기 고지도에까지 “낙타교”로 표시될 정도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확실하게 세간에 알려지는 것이 왕건이 의도한 바였던 것이다. 이 사건 후 여진이 거란에 조공한 기록은 급감하며, 여진이 거란의 변경을 공격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고려가 중심이 된 대거란 동맹이 다시 힘을 찾게 된 것이다.


왕건이 시작한 황제제도는 이러한 대거란 동맹에서 고려가 맹주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성종대에 송(宋) 나라만이 진정한 천자국이라고 본 화이론자(華夷論者)들이 집권한 후 별다른 외압도 없는 상태에서 이념에 따라 송과의 사대관계만을 중시하여 고려의 황제제도를 제후제도로 바꾸는바, 고려를 중심으로 한 대거란 동맹 역시 해체되고 만다. 고려의 황제제도는 현종의 즉위 후 복구되어 가는 바, 현종 3년(1012년)에는 여진 모일라(毛逸羅) 등이 30 성(姓) 부락을 이끌고 와서 결맹(結盟)을 요청하므로, 고려가 중심이 되는 광범한 여진 집단들과의 동맹이 복원된다.


 당시 황제국인 고려는 생여진 집단들을 제후 또는 그 제후의 강역이라는 의미의 “번(蕃)”・“북번(北蕃)” 등으로 불렀다. 황제국인 고려와 그 주변의 북번 등을 아우르는 범위는 고려가 중심이 된 천하로 관념되기도 하였다. 『제왕운기』에서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며, “요하(遼河) 이동에 별도의 천지(즉 천하)가 있다”는 것도 그러한 천하의 관념을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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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일/ 201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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