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동두천 노래

동두천_정용국 작가의 작업실





정용국 시조 시인과 함께 꾸민 노래 정원



대단히 좋다는 의미로 “영판 좋다”는 속담이 있다. “영남 시조가 좋다”는 말에서 비롯된 이 속담에서 옛 시절 시조 창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알 수 있다. 시조는 신라 향가와 고려 별곡 이래 왕에서 평민층에까지 두루 불려온 우리 민족의 고유 시가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3장 6구, 4율박의 정형시로 보통 42자에서 46자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근대를 거치며 배행과 분절이 변용되고 역사와 시대, 일상적 체험을 담는 등 시조는 형식과 내용에서 현대성을 획득해나가고 있다. 그런 실험적 시도를 이끌며 시조 장르의 저변을 확장하는 데 애써온 시조 시인 정용국을 만났다.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한 ‘옆집(에 사는) 예술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가 50년 서울 생활을 끝내고 올해 초 정착한 동두천 송내마을을 찾은 것이다.


        시조 시인의 마을을 찾아서


        홍역 뒤끝 속이 허한

        네 살배기 붙들이가

        툇마루 볕 가장자리에

        졸음을 널고있다

        머리엔 도장부스럼

        야윈 손엔

        봄 한 조각


시조집 『난 네가 참 좋다』(실천문학사, 2015)에 수록된 <쑥개떡>은 시인의 어린 시절 고향 풍경을 담은 시조다. 전란과 가난으로 황폐해진 고향에서 홍역을 치른 아이는 쑥개떡 한 조각을 그러쥐고 봄 햇살이 드리운 툇마루에서 졸고 있다. 비록 야위고 서글프지만 봄날 쑥풀처럼 모질게 목숨을 붙든 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시인은 한 조각 봄 햇살로 은유된 쑥개떡의 이미지로 소박하되 강렬한 생명과 희망을 보여준다. 함께 수록된 시조 한 편을 더 감상해보자.







        황조롱이 한 쌍이

        알을 품는 송전탑에


        땅에서 내버려진 날개 없는 사람들이

        현수막 둥지를 틀고 하늘을 차지했다


        삼십오 년 전 굴뚝에 올라

        쇠공을 쏜 난장이 대신


        국민소득 수만 달러 어안이 벙벙하고 최저임금 오천 원엔 머리에 쥐가 나고

        일조 달러 수출고에도 통상임금 거덜 났다 세계 십위 무역 규모에 불법 파견

        재하청이라 재벌 입김에 설왕설래 선거 공약은 휘청휘청 이 등쌀에 허리 휘어

        키 작은 아들딸들이 아직도 법을 믿고 허공에 매달려 있다


        하늘이 너무 비좁다

        우러러 보기에는


<여기, 사람이 있다> 전문이다. 얼핏 보면 배행 상 자유시와 다르지 않은 듯 보이지만 정형을 따르면서도 사설의 파격이 조화롭게 배치된 절창이다. 나아가 ‘이 시편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호출하여 그 오래전 상황이 이 땅에서 고스란히 반복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해설, 문학평론가 유성호) 시인의 리얼리스트적 면모와 현실인식을 선연히 보여준다. 이처럼 시조 시인 정용국은 시조 시단에서는 드물게 이 땅의 아프고도 가파른 삶을 일관되게 응시하고 묘사해왔다.


“시조 시인의 작업실을 어떻게 보여주죠?”


정용국 시조 시인과 첫 통화를 하며 들은 말씀이다. 멀리만 느껴지는 예술가들을 친근한 이웃으로 소개하는 이번 경기문화재단 주최 ‘옆집(에 사는) 예술가’ 행사의 취지를 전하면서도 내심 고민스러웠던 점을 당신 역시 정확히 짚은 것이다. 더욱이 미술가나, 공연 예술가의 경우처럼 따로 스튜디오나 연습실이 없는 터라 시인의 서재에서 손님을 맞고 프로그램을 꾸리기에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답답함은 김나리 기획자와 함께 동두천 송내마을을 찾는 순간, 시인의 함박웃음과 탁 트인 정원을 보며 조금씩 걷혀갔다. 우리는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두천과 시조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고향과 이웃을 노래한 시인의 작품을 함께 읽으며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이야기는 서재에서 정원 마당으로, 시인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묻힌 동두천의 풍경으로, 노래에 실려 날아올랐다. 시인은 늘 광대무변한 상상의 세계를 거닐지만 가장 구체적이고 적확한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모든 프로그램이 시인의 이야기 속에서 흘러나왔다.




시조는 당대의 대중가요입니다.


9월 19일 3시부터 열린 정용국 시조 시인의 ‘옆집 예술가’ 행사의 열쇳말은 고향 동두천과 노래로서의 시조였다. 올해 세 번째 시조집 『난 네가 참 좋다』를 내며 두드러진 활동을 해온 시인에게 고향 동두천은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 당시 가장 큰 기지촌이었던 동두천은 10킬로미터만 올라가도 남북이 대치하는 휴전선에 닿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공간이었다. 홍일선 시인, 김남일 실천문학사 대표 등 문단 인사와 동료 시조 시인이 참여한 문학 좌담회에서 시인은 3보, 4보로 이어지는 우리말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한 ‘노래’로서 시조의 전통을 역설했다. 시조로 이어진 우리의 고대시가가 ‘시’와 ‘노래’의 형식을 결합한 양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생활양식 안에 노래가 끊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대의 일상과 서정이 표현된다는 점에서 대중가요와 닮았다.






시인 또한 대중가요를 즐겨 부른다고 한다. 자연스레 시인의 시조 작품을 고향 동두천의 이웃 주민이 낭송하고 기타 합주반과 함께 ‘싱얼롱 타임’을 갖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미트볼 스파게티와 매쉬드 포테이토, 샌드위치 등 동두천 미군부대식 뷔페가 미군부대를 출입하는 군속으로 일하는 이웃들과 함께 차려졌다. 노래와 낭송의 흥이 시인의 시적 체험이 비롯된 동두천의 현대사와 겹쳐지는 진풍경이었다. 


“이런 초대라면 언제라도 다시 방문하고 싶어요.”


경기도 교육청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방문객은 일산에서 동두천까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섰다며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옆집에 사는 이웃이 처음에는 멋쩍어하며 시조를 낭송하다가 주위의 환호에 너도 나도 지원자가 빗발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며 이런 행사가 더 자주 열렸으면 한다고 말한다. 경기문화재단의 촬영팀과 가진 인터뷰에서 정용국 시인은 1년 전 이사를 오고 나서 늘 꿈만 꾸던 일이 벌어졌다고 흡족해했다. 파라솔 아래, 잔디밭 곳곳에서 음식을 나누던 문단의 지인과 이웃 주민 등 60여 명의 참여자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송내마을 파란 잔디밭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의 여운이 지금도 가슴을 따스히 데워주는 듯하기에 말이다.









글 강상훈 현 오뉴월 출판사 대표/전 학고재 출판사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