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보기

경기문화재단

근현대사의 현장과 공간, 종교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근현대사의 현장과 공간, 종교 >


-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 목 매달던 돌 앞에서


수원시내 한복판 북수원성당을 찾아갔을 때, 천주교인을 처형하는 도구(돌 형구) 앞에서 한동안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실제 사용방식은 얼른 상상이 되지 않았으나, 이 일대에서 잔인하게 목을 매달아 백성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목숨마저 던질지언정 신앙은 버리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은 대체 무엇인가?

경기도에는 천주교 박해시절의 유적이 여러 곳 있다. 안성의 미리내 성지를 위시해서 북수원성당 수원순교성지처럼, 고을 감영이 있었던 장소 인근마다 처형장이 있다. 한양으로 다 압송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교자가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하남의 구산성지에는 김성우 성인의 두 아우와 아우들의 자녀 등 10여 위의 순교자가 모셔져 있다.

포졸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숨어 살던 천주교 교우촌은 훨씬 많다. 천주교인들은 교통이 편하면서도, 들키지 않을만한 지형지세를 골라 터를 잡았다. 옹색한 농사를 지어 연명하면서, 옹기장수가 되어 다른 교우촌과 연통을 주고받았다.

심지어 1886년 프랑스와 수교가 이루어져 포교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 숨어 살던 천주교인 마을이 적지 않았다. 파주시 법원읍 칠올마을의 경우 1896년에 형성되었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소식이 늦게 전해진 탓인지,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은밀한 신앙공동체를 한동안 유지했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는 단지 한국천주교회사가 일부분이 아니라 한국사의 중요한 한 대목이다. 천주교라는 외래 종교와 함께 근대적 세계관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진통이 박해사 속에 녹아 있다. 조선의 정치체제, 전통 사유와 종교는 변방으로 내몰린 한반도 백성들의 삶을 더 이상 보듬어주지 못했다. 박래(舶來) 종교에 귀의한 경계인들은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신앙을 지키고자 했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일본 역시 혹심하게 가톨릭을 탄압했다. 촌백성들에게 후미에, 즉 십자가 밟기를 강요해서, 거부하는 농민은 가혹하게 처형했다. 해변 모래사장에 파묻어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잔인한 수법도 썼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침묵>의 묘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침묵>의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와 그의 선임이자 스승 페레이라 신부는 고문 끝에 배교한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또한 ‘너희들이 살 수만 있다면 그까짓 십자가야 얼마든지 밟고 지나가라!’고 얘기할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일본과 조선의 상황은 시대배경이 다르고, 탄압 방식도 조금 다르다. 하지만 거대한 시대의 전환기에 조선과 일본의 천주교인들이 처했던 삶의 조건과 딜레마 상황은 다르지 않다. 소설 <침묵>의 주제는 수백 년이 흐른 상황에서 되짚어보는 종교적 질문일 따름이다.




교회사를 넘어 한국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가 되다


칠올마을의 공소(公所·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처소)로 시작한 갈곡리 성당은 그 후예들의 성당이고, 칠올마을은 수많은 사제와 수녀를 배출했다. 미리내 성지, 북수원성당, 하남 구산성당, 의왕 하우현 성당도 공소에서 시작해 성당으로 승격했고, 서양 가톨릭 성당의 의례요소를 갖춘 성당을 지었다. 이들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건축물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성당 건물로 손꼽힌다. (박해기 이후에 지어진 성당 가운데 한국건축사에 남을 건축물도 여러 곳 있다. 안성 구포동성당, 김포성당 등을 예로 들 만하다.)

고양 행주성당의 경우 한옥 양식을 기본으로 서양 성당의 요소를 접목시킨, 국내에 몇 곳 안 남은 사례다. 정면성이 강조되는 한옥의 특징과 측면이 긴 서양 성당의 구조는 모순된다. 한옥 성당은 정면성과 측면을 뒤바꾸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토착화를 위해 고심한 흔적을 보여준다. 내부의 나무기둥들은 서양 성당의 기둥처럼, 내부 공간을 분할하는 기능을 하고, 서까래가 드러나는 방식을 통해 천장이 낮은 한옥에서도 성스러운 공간감을 연출하는 솜씨를 드러낸다. 천주교인이 아니어도 한옥 성당에 들어서면 경건하게 옷깃을 다시 여미게 된다.

영화 <미션>은 기독교가 제국주의 문화의 첨병 역할을 하던 시절의 비극을 다룬다. 남미 원주민(과라니족)에게 선교 목적으로 찾아간 신부들은 막상 무력점령이 시작되자 원주민들을 버린다.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와 멘도자 신부(로버트 드 니로)만이 그들의 편에 서서 조국 군대와 맞선다. 노래에 천부적 재질을 가진 과라니족과 두 신부는 함께 최후를 맞는다.

조선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신부들이 많았다. 의왕 하우현 성당이 교우촌 공소이던 1865년 25살 젊은 프랑스인 신부(베르나르-루이 볼리외)가 파견되어왔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가겠다며 자원해서 조선에 왔던 신부였다. 볼리외 신부는 1866년 하우현 성당 뒤편 산의 바위굴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볼리외 신부는 1984년 시성(諡聖) 때 루드비코 성인이 되었다. 젊은 루드비코 성인의 바위굴 은신은 소설 <침묵>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은신하던 모습과 오버랩 된다.

하우현 성당 본당이나 사제관에 가면 성 루드비코 성인의 행적을 만날 수 있다. 한국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파송되어, 우리말을 배워가며 전교에 나섰던 성인의 생애를 곰곰 되짚어보는 일은 성당 구경 못지않게 의미 깊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등장하는 외국 선교사들이 모두 민족사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가 자신을 던져가며 짓눌린 조선인의 삶을 이해하고 보듬으려 애썼던 게 사실이다. 선교 초기 성당과 예배당들이 해당 종교의 자랑을 넘어 한국 근현대사의 공간이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의 수난을 온 몸으로


1904년 전도사 구연영(具然英)이 이천의 한 교회(현 이천중앙교회) 목회자로 부임했다. 을미년(1895) 봉기 때 경기도 광주 출신 구연영은 의병장이 되어, 이천 광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을미의병 이후 기독교인이 된 구연영은 정미의병(1907)이 봉기하자 다시 행동에 나섰다.

이천에 들이닥친 일본군은 이천의 객사와 인근 민가 480채를 불태우는 만행(‘이천충화사건’)을 저지르는데, 이 때 구연영 전도사와 아들 정서는 함께 체포되어 관아 앞 장터 홰나무에 달려 순국했다. 을미년 의병장이 스스로 서울 상동교회에 찾아가 기독교에 입교하고, 목회자까지 된 사연도 흥미롭고, 12년 만에 다시 의병이 봉기하자 거사에 참가한 의기 또한 놀랍다.

구연영 의병장의 이야기는 그 자신의 굳센 의지도 의지지만, 한국 개신교 역사가 민족운동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개신교의 외국인 선교사들 또한 대부분은 진심으로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기미년 만세운동 당시 전국의 곳곳에서 개신교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회자들은 시위 조직과 행동에 나섰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 들이닥친 일본 육군 보병 79연대는 제암리 교회로 모든 남자 기독교 신자와 천도교 교인을 집합시켰다. 일본군은 모든 문을 봉쇄하고 불을 질렀고, 탈출하려는 사람은 총과 칼로 잔인하게 살해했다. 3월부터 계속된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이었다. 일본군은 이어 이웃 마을인 고주리로 이동해 주민 6명을 참혹하게 살육하고 불을 질렀다. 제암리보다 앞서 불탄 교회도 있다. 일본군은 4월 5일 장안면 수촌리 수촌교회와 마을을 불태웠다.

제암리 사건에서 주목되는 점은 천도교의 희생이 컸다는 사실이다. 수원 일대의 3.1운동은 3월 하순부터 기독교도와 천도교도가 적극적으로 합세해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수촌리와 제암리 학살극은 이에 대한 일본군의 분풀이였다. 제암리 학살은 미 감리교회 선교사들에게 의해 외부로 알려졌는데, 이 과정에서 스코필드 의료선교사의 역할이 컸다.

YMCA나 YWCA처럼 개신교 청년들의 조직이 적극 참여한 농촌계몽운동도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성과라 하겠다. 안산 샘골(당시는 수원군 반월면)에 YWCA 농촌지도원으로 파견된 최용신의 생애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함경남도 덕원 사람인 최용신은 1931년 샘골과 인연을 맺었고, 일본 유학 중 병으로 귀국해 1935년 숨질 때까지 샘골에서 활동했다. 샘골에는 최용신의 묘역이 있다.

군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군포 둔대교회(현 군포케노시스교회)는 샘골교회가 지어질 때 부지를 1,000평 넘게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두 교회는 연합예배나 연합집회를 가진 적이 많았고, 최용신도 둔대교회에 여러 차례 다녀갔다. 농촌지도사로서 최용신은 당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최대 거리까지 다니며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후반으로 가면서 한국 개신교는 흑역사를 맞는다. 식민지가 되기 전부터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을 지원해온 한국 개신교회들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못 이겨 결국 신사참배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극히 일부 교회와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단들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고 공식 선언했다.

1940년을 전후해 외국인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되었고,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전국의 여러 학교가 폐교되었지만, 상당수의 교회는 무릎 꿇고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세속권력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치더라도, 상처 많은 식민지 민중을 보듬어야 한다는 종교의 사명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가톨릭 역시 1930년대부터는 친일적인 행보를 보였고,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말았다.


산업화에 지친 영혼 거두고, 민주화의 거점이 되어


해방 시점에서 한반도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의 1~2%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미군이 들어온 남한 지역에서는 기독교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한국전쟁의 참화가 지나간 뒤 미군은 곳곳에서 교회의 재건을 도왔다. 고양의 신도제일교회, 오산의 오산감리교회, 수원의 수원장로교회 등 여러 곳의 교회가 미군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아 교회를 재건하거나 신축했다. 포천의 포천성당은 한국군이 성당 신축을 지원한 사례다.

이들 공간은 건축자재가 부족한 시절에 자갈이나 석재를 이용해 지어져 현재까지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외양이 견고하고, 이제는 이 같은 건축 양식을 찾아보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오히려 건축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여기에 겪어낸 풍상까지 스토리텔링으로 곁들여지면서 틈을 내서 찾아가 볼만한 근현대사의 공간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한국 기독교의 교세는 무섭게 성장했다. 고속 산업화는 사회규범의 아노미 현상을 초래했고, 마음의 안식처를 찾는 사람들을 한국 개신교회는 빠르게 흡수해 나갔다. 한국 교회들은 앞 다투어 부흥회, 사경회를 열어 교인 확보에 열을 올렸다. 1970년대 초 방한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여의도 집회를 개최했을 때 여의도 광장에 개신교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광경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교회가 해낸 역할도 크다. 예컨대 남양주 용진교회가 그러하다.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용진교회는 1900년대에 세워진 한 세기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3.1운동 당시에는 이 지역 3.1운동의 구심점이기도 했는데, 1973년 예배당 신축 과정에서 철거반원과 격렬하게 대치하는 상황을 맞았다. 당시 류창렬 담임목사가 유신헌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은 교회를 가만두지 않았다.

정보과 형사가 매주 주일예배마다 류 목사의 설교를 체크하고 동태를 감시했다. 류 목사는 당회에 사임의사를 밝혔지만, 교회의 자체 결정으로 사표를 반려했다. 류 목사는 당국의 갖은 압력에도 버티면서 1980년까지 용진교회 목회를 이끌었다. 서울의 대형교회가 당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경우는 잘 알려져 있지만, 시골 교회가 이처럼 강단 있게 버텨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용진교회는 가나안 농군학교의 설립자 김용기 장로의 고향인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봉안교회의 모(母) 교회이기도 하다. 김용기 장로는 일제강점기부터 능내리에서 이상적인 농촌 건설을 모색했다.

수원의 수원장로교회(당시 담임목사 윤기석) 또한 1980년대 신군부 시절 수원 민주화 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기꺼이 감당했다. 크고 작은 시위가 수원장로교회에 청년 학생들이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1987년 ‘유월항쟁’ 때 수원장로교회는 수원 민주화의 중심 공간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종교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 결국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의 현실을 비판한 영화 <쿼바디스>에 등장하는 이 말은 개신교인들로서는 외면하고 싶은 명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성장제일주의를 앞세운 한국의 대형교회들로서는 딱히 부정할 수도 없을 터이다. 규모만 작았지, 행태는 다르지 않는 중소교회에도 저 비판은 뼈아프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문명전환’의 시대에 변방으로 내몰린 영혼들을 위로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근현대사의 모서리에 찢기고 멍든 이들을 보듬어온 수많은 교회의 공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기도 곳곳의 기독교 공간들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수없이 바쳐진 눈물 어린 기도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이 글의 한계를 고백해야 할 시간이다. 지면의 제약과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적 특성 때문에 이 글에서는 불교, 원불교 등 다른 종교의 공간들을 더 소개하지 못했다. 부천의 현대 사찰인 석왕사라든가, 수원의 원불교 교당처럼 다른 종교의 공간들도 소중하다. 이 글에서 언급한 곳 외에도 보석 같은 이야기를 담은 기독교 공간과 장소를 조금 더 알고 있지만, 담아내지 못해 아쉽다.


글 양훈도

경인일보에 24년 간 재직했다. 기자 생활 그만두고 늦깎이로 북한학을 전공했으나, 기자 시절 경기도를 돌아다니며 지역 르포를 쓴 경험 덕분에 경기도 생활사에 관심이 많다. 근대문화 흔적들이 품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더 많은 경기학광장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바로가기]




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