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보기

경기도박물관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 8

문인화·왕실백자, 조선의 문화를 이끌다

2020 중부일보 연재 시리즈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은 개관 25주년을 맞이하여 전시실 전면 개편을 진행한 경기도박물관이 중부일보와 함께 2020.06.28부터 2020.09.20까지 총 10회 시리즈로 제작한 콘텐츠입니다. 더 자세한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중부일보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즐기실 수 있습니다.




조선의 문화를 이끌다


조선시대의 문화 중심이었던 경기에는 사대부 문화가 그 중심에 있었다. 사대부 문화는 문학과 예술을 아울렀다.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서화(書畫)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고, 왕실 백자의 고향이자 조선 최고의 도자 생산지로 자리매김했다. 학문과 사상의 중심에도 경기가 있었다. 16세기 화담학파와 율곡학파를 필두로 18세기 실학과 서학 등 진보적인 학문이 경기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학문적인 개방성과 유연성을 갖춘 경기인들은 그들의 삶을 바꾸며 미래를 준비하는 선구자였다.



미수 허목의 글씨와 그림(眉叟筆帖)

연천 출신으로 근기남인의 영수인 허목(1595-1682)의 글씨첩이다. 그는 문신이자 유학자이면서도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특히 미수체(眉叟體)라 불리는 전서에 통달하여 동방의 제일인자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의 중심지 

경기도는 한양의 지적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지역적 특성인 개방성도 갖추어 조선후기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16세기 사상계는 개성을 근거지로 한 서경덕(1489-1546)의 화담학파와 파주를 근거지로 한 이이(1536-1584)의 율곡학파가 이끌었다. 17세기에는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에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박세당(1629-1703)은 주자학의 관점에서 양명학의 정립을 시도했고, 정제두(1649-1736)는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이끌었다.

18세기에 경기도는 실학과 서학 등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허목ㆍ이익ㆍ강세황ㆍ채제공ㆍ정약용ㆍ이승훈 등 학문적 유연성을 갖춘 경기의 지식인들은 조선후기 사회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백성들을 위한 국가 개혁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불평등한 토지제도와 세금제도를 개혁하며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강세황 초상

영ㆍ정조 때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강세황(1713-1791)의 초상이다. 그는 안산에 은거하며 김홍도·심사정·최북 등의 화가, 안산 15학사라고 불리는 문인들과 교류하며 조선 후기 예원의 총수로 불렸다. 이 초상은 그의 71세 때 모습이다.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명기가 그린 초상과 같은 솜씨의 반신상이다.


그림과 글씨로 이름난 사대부와 화원들의 활동지

고려시대에 개성을 비롯한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예술의 전통은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의 전통과 중국에서 전래된 화법을 토대로 새로운 화풍이 형성되었다. 한양의 근교인 경기 지역에 위치한 문인 사대부들의 서화(書畫) 활동과 경기 출신 직업화가인 화원들의 활약은 돋보인다.

시흥에서 활동했던 강희안(1418-1464)과 강희맹(1424-1483) 형제는 진주 강씨 명문가에서 태어난 조선 초기의 문인화가들이다. 포천의 양사언(1517-1584)은 해서와 초서에 능했고, 석봉 한호(1543-1605)는 개성에서 활동하며 조선 고유의 서체인 ‘석봉체(石峰體)’를 창안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만년을 안양에서 보낸 조속(1595-1668)과 연천의 허목(1595-1682), 용인에 연고가 있는 오달제(1609-1673)와 남구만(1629-1711), 그리고 안산 선부동 출신의 홍수주(1642-1704) 등이 문인화가로 활동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강세황(1713-1791)이 안산에 거주하면서 그곳 문사들과의 교유를 통해 회화 창작론을 전개하고 남종문인화의 확대 및 심화에 기여했다. 이 시기 회화의 발흥과 관련해 안산 지역은 한양 다음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이를 이끌던 강세황, 그의 제자인 김홍도(1745-1806), 남종화의 대가 심사정(1707-1769) 등이 그들이다.

조선 말기에는 관악산 자락의 시흥과 과천에서 신위(1769-1845)와 김정희(1786-1856)가 문인화 활동을 했다. 신위는 이정ㆍ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남겼으며, ‘추사체(秋史體)’를 창안한 김정희는 인생의 마지막 5년을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은거하며 서화(書畫) 시대의 절정을 이루었다.



백자 항아리(白磁壺)

달항아리처럼 각이 진 주둥이와 둥근 어깨에서 아래로 흐르는 선이 아름답다. 풍만한 형태와 부드러운 유색을 지녀 백자 항아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위아래를 따로 제작하여 접합한 흔적이 안쪽 면에 남아있고, 바닥에는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있다. 18세기 전반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발생지

경기도의 전통 문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고려ㆍ조선시대의 도자기이다. 고려시대 용인 서리(西里)와 시흥 방산동(芳山洞) 가마 생산품에서 고려청자 발생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리에서 만들어진 고려백자와 방산동의 청자는 고려자기의 가장 이른 시기의 생산품으로 추정된다. 11세기 이후 강진과 부안에서 전성기 청자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용인 보정리 등 지방 가마에서 자기를 생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광주(廣州)의 사옹원 분원(分院) 관요(官窯)에서 최상품 백자가 생산되어 왕실에 공급되었다. 광주 관요 가마터에 대한 지표조사와 도마리ㆍ우산리ㆍ송정리ㆍ분원리 등의 발굴 조사를 통해, 시기에 따라 이동ㆍ변화하며 조선백자의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교의 이상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사회에서는 도자문화에서도 검약과 실용을 강조하였다. 세종은 왕실 그릇으로 백자만 사용하도록 하여 왕실의 관심 아래 백자 제작기술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관요는 15세기 후반부터 민영화되는 1884년까지 운영되어 조선시대 내내 왕실 백자를 생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분원백자는 유교적인 덕목을 구현하려는 왕실의 의도로 기종과 문양, 장식 등이 단순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격조를 중시하는 특유의 미감을 지니고 있다.


박본수(경기도박물관 학예실장)




2020 중부일보 연재 시리즈〈새롭게 만나는 경기도박물관〉이 궁금하다면? [바로가기]


information

  •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박물관〉

    기획 및 발간/ 경기도박물관, 중부일보

    원문 제공/ 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글쓴이
경기도박물관
자기소개
경기도박물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밝히고 계승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박물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