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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나라를 위해 금강산에서 온 승려, 김성숙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온 승려 김성숙과 봉선사 승려의 3‧1운동


손병희, 한용운 등과 교류, 승려 신분으로 3‧1운동 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 책 『운암 김성숙』 표지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난 운암 김성숙 선생은 1916년, 18세에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불가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2년 뒤 그는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로 거취를 옮기며 불교 경전을 정식으로 공부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봉선사에서 손병희, 한용운, 김법린 등 당시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들과 교류하며 애국 의식을 고취해갔습니다. 사실 김성숙 선생은 승려가 되기 전에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군이 되겠다는 계획을 했을 만큼 애국심이 남달랐던 인물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성숙 선생은 승려의 신분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3‧1운동을 기폭제로 봉선사 승려인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과 함께 항일 의지를 담은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을 제작해 배포했습니다. 격문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했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선생은 격문 제작 및 배포뿐만 아니라 같은 해 3월 29일에는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에서 만세시위를 했습니다.


결국 항일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선생은 1920년 출소해 다시 봉선사로 돌아갔으나 곧 전국 곳곳을 돌며 강연을 했고 이를 통해 대중에게 독립정신을 설파했습니다. 또한 조선무산자동맹, 조선노동공제회 등에 참석해 소작쟁의의 진상을 여러 곳에 알리는 등 적극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이후 김성숙 선생은 중국 베이징으로 이동해 불교 유학생으로 학업을 잇는 한편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해 한인의 결속력을 다지고 항일운동을 진행했습니다. 1930년 이후로는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시작으로 남은 생의 대부분을 정치인으로 살았습니다. 1982년, 김성숙 선생에게는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 운암 김성숙의 일대기를 다룬 책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김성숙 선생이 적을 두었던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는 세조가 묻힌 광릉의 능침사찰로 잘 알려진 사찰입니다. 후일, 세조와 함께 광릉에 묻힌 정희왕후가 세조가 죽자 선왕을 추모하기 위해 대규모로 중창했습니다.


능침사찰로서 절이 부각되다 보니 일반인들에게 봉선사 승려들의 3‧1운동과 항일운동은 크게 알려진 편이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봉선사의 상황을 짚을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김성숙 선생에게 성숙이란 법명을 내린 월초스님입니다. 그는 1906년부터 봉선사의 교종판사로 머물며 1926년까지 꾸준히 가람을 중수한, 사찰의 실질적 중창주였습니다. 1906년 불교연구회 대표를 맡으며 대구에서 벌어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제자인 운허스님 역시 봉선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운허스님은 평생 동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인물입니다. 그의 영향으로 봉선사 일주문과 큰법당(대웅전)의 현판은 다른 절과 달리 한글로 쓰였습니다. 운허스님 또한 승려 신분으로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3·1운동 직후 독립군정기관지인 한족신보의 사장에 취임해 신문을 간행했고, 1920년 2월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단을 조직해서 활동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감시망을 조이자 강원도 봉일사에 은신하기도 했습니다.


▲ 봉선사 대웅전의 한글 현판


이렇듯 봉선사는 김성숙 선생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의 합심으로 독립운동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찰 내에는 이를 알리는 알림판이나 기념비가 없어 아쉬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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