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인연 따라 흘러든 정토, 불심과 인심이 샘처럼 솟았다

광주 수도사를 돌아보며



수도사 대웅전(중앙)과 산신각(좌측)


산사 가는 길은 논밭 사이로 굽이굽이

이천과 광주를 잇는 마도로를 달리다가 사찰 이정표를 따라 방도리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달릴 수 있을 만큼 급격히 좁아졌다. 차량 내비게이션은 가정집과 작은 공장들이 드문드문 있는 마을 초입을 지나 논밭만 있는 농로로 안내했다. 밭일하는 동네 사람들 외에 누가 드나들까 싶은 길이다. 다행히 헷갈리는 두 갈래 길 앞에선 방향을 표시한 사찰 팻말과 홀로 남아 우글쭈글해진 연등이 초행자를 이끈다. 산사 가는 길이 죄다 신작로에 외길일 수는 없을 텐데, 인적 드문 시골길을 긴가민가 달리다 보니 주제넘게 절 살림을 걱정하게 된다.

이윽고 언덕빼기 위에 절 만(卍)자를 새긴 한 쌍의 깃대가 보였다. 당간 같기도 하고 일주문 같기도 하다. 직전에 굴다리를 거쳐야 하는데 굴다리 위로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화성-광주)가 지나간다. 7년 전, 이곳의 주지 청호스님은 고속도로 건설로 인한 수행 환경 침해를 호소하며 긴 시간 1인 시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도로는 빠르게 건설되었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는 절집에 이 굴다리가 일종의 사찰 대문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아이러니하다.



수도사 약수터 석조


맑은 물 흐르는 정수산 아래 아늑한 도량

산문 안에 들자 절집을 지키는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었다. 곧 스님 한 분이 산방 밖으로 나와 낯선 객을 반갑게 맞이했다. 수도사 주지 청호스님이다. 스님은 2001년부터 홀로 이곳 암자에서 수행 중이다. 인연이 닿아 머문 자리에서 마음을 닦고 사찰 기반도 닦다 보니 20년 넘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현재의 가람배치는 청호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갖춰졌다. 정면에 보이는 대웅전은 2010년에, 산신각은 2023년에 지었다. 그 외에는 요사채가 전부인 단출한 절집이다. 새로 대웅전을 짓기 전까진 우거진 수풀 속, 오직 한 채의 법당뿐인 비구의 수행도량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적막하진 않다. 다람쥐, 산새, 멧돼지 등 야생동물이 수시로 절 안팎을 드나들기 때문이다.



수도사 주지 청호스님이 경내에서 구조한 솔부엉이. 사진=청호스님


몇 해 전 여름에는 경내에서 천연기념물인 솔부엉이가 발견되어 야생동물 구조치료소로 보내졌다. 이들의 보금자리이자 절을 감싼 정수산(定水山)에서는 시종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물줄기가 절 마당의 약수터를 지난다. ‘약수’답게 달고 시원하다. 스님의 포행길인 산길을 따라 절에서 200m쯤 오르면 석간수가 흐르는 큰 바위가 있다. 이 석간수가 약수터까지 흘러든다. 스님에 따르면 정수산에 있는 유일한 바위라고 한다. 절을 감싸는 포근한 기운이 육산(肉山) 덕분인가 싶다.




정수산 맑은 물이 흐르는 수도사 약수터


누이의 극락왕생을 위해 중창 후 수도자들의 수행처로

소박한 시골 절집, 수도사의 역사는 1859년(철종 10),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순원왕후의 동생 김좌근이 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도사를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전의 역사는 전해진 기록이 없고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구전만 전한다. 김좌근은 잘 알려졌듯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주도한 핵심인물이다. 당시 안동 김씨가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사찰을 세우고 대규모 불사를 후원했는데 이곳 수도사에서 직선거리로 15km쯤 떨어진 이천의 영원사 또한 김좌근의 아버지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후원으로 중창되었다. 여주 신륵사는 김좌근의 아들인 김병기가 후원해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가가 나서서 중창한 왕비의 원찰은 그 입지가 좁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진허대사가 1943년에 중수했고 규모는 작아도 수도승들이 내내 자리를 보전하며 오늘날까지 명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비록 저명한 고승을 배출했거나 이름난 국가유산을 보유한 절은 아니지만 수도사(修道寺)는 이름에 걸맞게 도를 닦는 수행도량으로, 관세음보살과 산신이 중생을 살피는 기도도량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도사 목조보살좌상


목마른 중생 두루 살피는 인자한 수도사 목조보살좌상

수도사가 전통사찰로서 입지를 다진 데에는 대웅전에 봉안한 수도사 목조보살좌상의 역할이 컸다. 2016년 7월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목조보살좌상은 삼존불의 우협시로 모셔져 있다. 본존불과 좌협시는 현대에 와서 조성된 불상이다. 얼굴에 비해 신체가 약간 작은 편이나 머리와 상체가 곧고 가부좌한 자세에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 살짝 미소 지은 작은 입은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지만 꽃과 덩굴무늬를 새긴 보관이 나름의 화려함을 더한 듯하다. 이밖에 통통한 얼굴과 짧은 목, 세부 표현이 생략된 보발(머리카락), U자형 옷 주름 등에서 임진왜란 직후 중부지방 불상들의 과도기적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수도사 목조보살좌상은 1610년에 조각승 인일스님이 만든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형태적 유사성을 갖는데, 아마도 같은 유파의 조각승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살상의 수인은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정병(淨甁, 목이 긴 형태의 물병)을 쥐었다. 정병에는 중생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 줄 정수(淨水)가 들어있다. 대웅전 바로 앞 약수터의 존재감이 큰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수도사 산신각에 봉안된 독성도, 산신도, 대호도


호랑이는 산신각에, 청산이는 절마당에

대웅전의 왼편에는 산신각이 있다. 이곳에서 새벽마다 참선하고 기도한다는 주지스님은 산신각이 자리한 2평짜리 작은 땅이 산중 가장 명당이라고 덧붙였다. 전각 내부 좌우에는 독성도와 산신도를 봉안했고 측면에는 커다란 호랑이 수묵화가 걸렸다. 호랑이도 엄연한 산신이다. 수도사는 호랑이와도 나름의 관련이 있다. 수도사를 일으킨 김좌근 대감도 호랑이가 나오는 선몽(先夢)을 꾸고 절을 중건했다고 전하고, 오랜 옛날 이 일대에서는 실제로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불교에서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영물이며 산악신앙에서는 산신의 신체이자 신성한 동물로 숭배받는다. 주지스님은 수도사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동물로 호랑이가 되어도 좋겠다는 말을 전하는데, 아무래도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마당을 뛰어다니는 여덟 살 백구 ‘청산이’가 수도사의 마스코트가 아닌가 싶다.



수도사를 지키는 청호스님의 도반 청산이


불심도 인심도 계절 따라 무르익고

인연 따라 흘러든 절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는 주지스님은 그러나 아직 갖춰나가야 할 것이 많은 절이라고 말한다. 홀로 밥을 짓고 사무를 보며 절 살림을 도맡다 보니 공부할 시간도 빠듯한데 그간 부침도 적잖았다. 전술한 고속도로 건설뿐 아니라 사찰 바로 뒤에 지나가는 고압 송전탑과 송전선 건설 문제로 몸살을 앓았고 주변 문중 땅의 토지주들과 갈등도 있었다. 의도치 않게 수행하기에 적절치 않은 상황이 자꾸 발생하다 보니 불사에 앞서 도량 환경의 보전이 우선이었다.



포행길에 오른 수도사 주지 청호스님


비록 도로는 뚫렸고 전선은 걸렸으나 스님의 고군분투로 2016년에는 목조보살좌상이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2020년에는 수도사가 역사·문화적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한때는 주민들만 알았던 시골 암자가 이제는 광주시를 대표하는 사찰로 거듭난 셈이다. 오는 10월 27일에는 수도사 목조보살좌상 보수공사 및 개금불사를 마무리하며 삼존불 점안법회를 봉행한다. 또한 내년에는 전통문화 특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수도사 순원왕후 효 위령문화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스님의 장기적인 목표는 도량에 명상 선센터를 세우는 것이다. 하여 수행자들과 탁마(琢磨)하며 인연 따라 흘러가고 싶다. 산문을 나서는 길, 스님이 떠나는 객을 급히 불러 잡더니 갓 딴 방울토마토를 두 손 가득 채워 줬다. 스님의 텃밭은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방울토마토, 가지, 오이가 풍년이었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출처 중부일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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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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