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여행의 서막: 이별한 나를 다시 만난다는 것

고양_보수하는 잡화점(강숙진, 김용관, 신지현, 진선희 작가)의 작업실





강숙진, 김용관, 신지현, 진선희 작가는 미술학도로 처음 만나 교류하다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상 가운데 쉽게 버려지는 것들을 지나치지 않고 그 안에 의미를 발견해나가자는 의미에서 '보수하는 잡화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예술적 이상과 창작의 욕구 사이를 오가며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자 했던 이들은 작업을 넘어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흔히 작가하면 함께 떠오르는 것이 ‘에고(ego)’다. 그것도 그저 그런 에고가 아니라, 강한 에고, 강한 자아. 편견을 보태자면 작가에게 에고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보인다. 에고를 중심으로 세상이 회전하고 에고가 있기에 세상이 존재하는 식이다. 에고를 거스르는 것은 없어져야 마땅하고 에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버림받는다. 그야말로 에고로부터 시작해 에고로 끝나야 한다. 이 ‘에고게임’의 룰을 벗어난다면 그/녀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그만큼 예술작업에서 나라는 에고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언뜻 에고를 중시하는 예술가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게다. 자기만 안다, 자신이 제일 잘난 줄 안다, 남을 생각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다 등등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살을 덧붙이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비난(?)이 예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의 길이란 종국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요 작가의 정체성이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둘도 셋도 아닌 하나뿐인 나라는 존재를 알아가는 길, 그 길 위에 작가가 서 있다.

짐작건대 이 같은 작가의 삶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나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때로는 세상에 존재치 않는-모든 것을 거른다고 상상해보라. 나에 대한 이해는 물론, 나를 나답게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그 무엇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아무리 의도된 고립 안에 정주한다 할지라도 인생사의 복잡 다다 함이 발목을 붙잡는다. 인류의 관습과 제도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한층 어려워진다. 작가답게, 에고를 (되)찾으며 산다는 것이 말이다.


‘보수하는 잡화점’은 에고를 (되)찾는 여정 가운데 탄생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지속적으로-동시에 띄엄띄엄 작업해온 네 명의 작가는 알고 지내던 지인에서 같은 작업실을 공유하는 작업 동료가 되었다. 이들이 지향하는 작업공동체의 모습은 각자의 개별적 작업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의 작업을 도모하는 형태다. (90년대 015B가 도입했던 ‘객원가수’ 형식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객원가수별 색채를 살리면서도 그룹 자체가 가졌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을 떠올린다면 말이다.) 네 명의 작가들에게 있어 ‘보수하는 잡화점’이 일종의 구심점이자 연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보수하는 잡화점’의 이야기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네 명의 작가들을 만나보자. 그들의 에고를 뒤덮은 강렬한 빛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무엇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그들이 에고를 찾아 떠났던 이전 여행일지를 잠시 들여다본다.




                          신지현, 〈image_Stroller〉, 135×135㎝, oil on canvas, 2010



여행자 하나. 신지현


한동안 내 작업엔 늘 소녀가 놓여있었다. 때때로 소녀는 소녀라고 불리기 이전인 네다섯 살의 모습이기도 했고, 때때로 사람보다 모호한 안개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드(id)적 성향이 있는 소녀는 미성숙하고, 욕망이 강하고, 고독했다. 소녀는 언제나 파스텔 색조의 풍경 안에 배치되었다. 앳되면서도 스산한 기운이 묻어났다. 소녀의 시선은 줄곧 불안했는데, 타인을 인식하거나 무언가를 응시하거나 끊임없이 탐색했다. 소녀의 공간과 소녀의 행위는 일상적이었지만, 비일상적 대상과 결합하여 경계가 모호해졌다. 생김새는 소녀의 것이었지만 눈빛, 표정, 그리고 몸짓은 성인의 것이었다. 내가 찾은 나의 모습은 덜 자란-자라는 것을 거부한 소녀 그대로였다. 현재를 유예하고 시간을 전복시키는 소녀를 통해 해방감을 느낀다. 시간을 거스르는 벤자민 버튼처럼 어른스러웠던 어린 나를 떠올리며 소녀다운 지금의 나를 그려본다.




                             진선희, 〈닫힌 방〉, 150×150㎝, oil on canvas, 2015



여행자 두울. 진선희


나는 꿈을 꾼다. 꿈속의 세상은 꿈 밖의 세상과 닮아있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눈을 뜨고 한참을 떠올려본다. 어디까지가 꿈이었지? 어디서부터 꿈이었지? 질문을 되뇌어 보아도 이미지는 흐릿하다. 경계에 놓여있다. 지금 만지는 팔의 골격만큼이나 꿈은 생생하다. 생생하다 못해 꿈은 현실의 시공간을 지배하기도 한다. 눈앞에는 영화 같은 장면들이 펼쳐진다. 이름 없는 몸, 몸을 잃은 정신이 기억 저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한다. 심상의 무대 위 커튼을 젖히는 순간 희미했던 존재의 실루엣은 그 형체를 드러낸다. 무엇이었을까, 무대를 감싸던 이름 모를 기운은. 그 언젠가 나를 훑고 지나간 순간은 무의식의 기록이 되어 꿈에 등장한다.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나의 모습보다 한층 묘연하나 어딘가 친숙하다. 꿈속의 이미지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다름 아니다.




                             진선희, 〈닫힌 방〉, 150×150㎝, oil on canvas, 2015



여행자 세엣. 강숙진


소멸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탄생, 생성, 생기의 이면에는 죽음, 상실, 암울이 맞닿아있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 또한 생의 이면을 마주하기 이전까지 그 사실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면의 실체를 마주한 순간, 내게 찾아온 것은 혼돈 그 자체였다. 하나의 세계만이 전부라고 여겨왔는데, 저쪽 너머에 다른 세계가 맞닿아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그저 초점 없는 눈동자에 불과한 것일까? 말 없는 입술은 또한 그저 말 없는 입술인 걸까? 일상을 빗겨나가면, 혹은 현실을 넘어서면 끊이지 않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답을 구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김용관, 〈Obsolete Landscape〉, 200×200㎝, acrylic on canvas, 2015



여행자 네엣. 김용관


수학과 철학적 토대들은 나를 매혹한다. 현실에 대한 예술의 개입 가능성을 실험하는 한편, 악에 대한 선의 방어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현실은 예술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지만, 예술의 질료로서 현실은 여러 방식으로 호명된다. 악 또한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지만, 선은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악과 끊임없이 투쟁 하려한다. 이처럼 무한히 반복하는 것들 사이로 틈이 발생하곤 하는데,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거대한 규칙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약속된 규칙을 중심으로 그 안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들이 발생한다. 이 규칙의 경계가 가지는 당위를 질문하는 것, 버려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모두가 작가로서 내가 짊어져야 하는 책무다.




‘보수하는 잡화점’이란 이름은


‘보수하는 잡화점’이란 이름은 김용관 작가의 미발표 만화에 등장하는 가게에서 유래한다. 만화는 멸망 이후 세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생존 크루즈 선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시계방향으로 돌다 멈춰있는 이 크루즈 선 내에는 크루즈 선을 다시 시계방향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계파와 반시계방향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시계파가 팽팽한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다. 유일한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이 크루즈 선 내에는 재화가 한정되어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보수하는 잡화점이란 이름의 가게가 존재한다. 새로운 물건이 없으니 낡은 것을 새롭게 만들어 되파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소 대립하던 시계파와 반시계파도 이곳에선 중립을 지킨다. 보수하는 잡화점의 로고에서 볼 수 있듯이 한쪽이 다른 한쪽을-예컨대 시계파가 반시계파를, 그리고 반시계파가 시계파를-어루만지는 화해의 공간이 바로 이곳인 셈이다.




한국에서 30대의 작가로 산다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다. 입시에만 매달렸던 10대를 지나 미대에 적을 두고 예비 작가로 이런저런 경험을 하다 보면 어느새 홀로서기는 코앞에 와있다. 불안한 마음에 대학원에서 2년 남짓한 시간을 더 보냈지만, 준비가 안 된 것 같은 마음은 여전하다. 몇 번의 개인전, 몇 번의 주목으로 세상의 중심으로 나온 듯했으나 냉정히 살펴보니 예전의 자리 그대로인 것 같다. 작가를 괴롭히는 건 더는 재능이 아니다. 밀어붙이는 힘, 그리고 밀어붙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건 어떻게 얻느냐고? 성실히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쉼 없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보수하는 잡화점의 네 작가에겐 작가 이외에도 부모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자신보다 여리고 약한 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책임은 때때로 작가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작업을 못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창작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부모라는 정체성은 언뜻 작가들을 주춤하게 하기도 한다. 좀 더 위험한 상상, 좀 더 어려운 도전에 머뭇거리는 제 모습을 보며 끝없는 자기검열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을 향해 가는 자신을 그려본다. 경제적인 문제도 이들을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배우자도 그리고 작가 자신도 경제활동을 하지만, 생계와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재미로 작업과 관련 없는 사업에 손을 대보기도 했다. 재미로 시작한 일이라 아쉬움이 크게 남진 않지만,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당분간 작업에만 전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견뎌내야 한다. 그래도 견뎌낼 것이다.





김용관, 신지현, 진선희, 강숙진, 네 명의 작가를 ‘보수하는 잡화점’이란 이름으로 처음 만났을 때를 아직 기억한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2016년 여름, 낯설어하는 눈빛에도 익숙한 듯한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지금의 작업실을 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원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네 명이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 나왔다. 비슷한 또래에 (아이를 키운다는) 비슷한 상황은 작업 이외에도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신지현, 진선희, 강숙진 작가가 ‘엄마’로서 가지는 정체성은 이들을 한층 끈끈하게 묶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가 있는 풍경 속에 작가/엄마는 작업과 일상을 포개어놓았다. 비록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충분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지만, 대신 일상적 순간을 기록하거나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수많은 사진과 글, 비디오, 장난감, 동화책. 그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작가/엄마는 그렇게 조용한 작업을 이어나간 것이다.



 

 



보수하는 잡화점이 세상에 나온 지는 반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동안 함께 도모하고자 했던 아이디어는 그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진선희 작가는 보수하는 잡화점을 통해 카페와 같이 대중적인 공간을 꾸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갤러리 카페로 지역에서 대중의 반응을 가장 가까이서 살펴볼 기회가 되리라 여겼다. 상시로 여는 공간이 아니라 분기별로 오픈하는, 미술계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카페에 대한 생각. 잠시 보류 중이지만, 언젠가 갑자기 출현할 수도 있다. 언젠가는 보수하는 잡화점의 다른 작가들과 함께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포부도 덧붙였다. 김용관 작가는 모듈이나 패턴에 관심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큰 그림을 구성하는 작은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보수하는 잡화점 내에서만큼은 ‘미술 작업’이라는 딱딱한 어감을 지운, 놀이에 가까운 무언가를 추구하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을 장난감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발명품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김용관 작가는 이전에 대량으로 장난감을 생산해 본 적이 있다. 꼼꼼하게 시장조사를 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고 한다. ‘작가’ 프리미엄이 붙는 장난감이라 자신이 있었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니 같은 가격에 다른 장난감을 몇 개는 살 수 있었기에 경쟁력이 떨어졌던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그 이후 사업이 아니라 소소하게 만드는 과정 자체가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의 행보를 블로그에 아카이빙할 예정이기도 하다. 강숙진 작가는 ‘혼자 깨작대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생각했던 것과 결과가 다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그런대로 재미가 있다고 본다. 최근 삶의 무게가 무거워진 것 같다고 담담히 내뱉는 그녀는 ‘이러이러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당장은 미술계의 피드백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갈증이 해소될 수 있는 무언가에 몰두할 것이다. 아직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하는 강숙진 작가는 보수하는 잡화점이 그녀가 만들고 싶은 것들을 충동적으로 만드는 장이 되었으면 한단다.  





양극단의 중간에 있는 만화 속 가게처럼 보수하는 잡화점은 미술계와 비미술계, 작업과 일상이라는 구분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만의 영역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습성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자연스러운 본능에서 출발하지만, 지나친 영역 구분은 경계와 배척을 무한대로 확장할 뿐이다. 김용관, 신지현, 진선희, 강숙진, 이 네 작가는 앞으로 각자의 작업을 하겠지만, 보수하는 잡화점이란 지붕 아래에서는 잠시 작가로서의 책무, 작업이 가지는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자 한다.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해 미학적으로 설명하기를 강요받고, 스스로 ‘꽤 괜찮은 작가’임을 증명해야 하는 종래의 의례에서 잠시나마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작업을 떠난 행위를 통해 작업에 대한 기반을 닦을 수 있으며 작품에서 벗어난 대상을 통해 작품에 대한 얼개를 잡아나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활하는 작가로서 삶의 균형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언젠가 이별했던, 그래서 이별했는지조차 잠시 잊었던 나를 다시 만난다는 것, 누군가에겐 그리 썩 유쾌한 기억이 아닐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밤잠을 설칠 만큼 설레는 일일 수도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조차 다르지만, 매일 자신을 향한 영혼의 거울을 닦으며 이별을 연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보수하는 잡화점은 아직 이별하는 것에 익숙지 않다. 치기 어렸던 나, 고집을 부렸던 나, 칭얼거렸던 나의 모습을 마주하며 힘겹게 발걸음을 떼는 중이다. 자기라는 거대한 세계와 대면한 후에도 그들은 몇 번이고 또 다른 이별을 맞을지 모른다. 이제 막 여행의 서막이 올랐을 뿐이다.



글_강보라 (독립기획자, 미디어문화연구자)





글쓴이
옆집에 사는 예술가
자기소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