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유리의 색과 기억들

파주_이현숙 작가의 작업실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이현숙 작가는 ‘유리’를 오브제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갤러리원에서 두 차례의 개인전(2004, 2009)을 열었으며, 서울인터내셔널 조각아트페어(2012, 2014), 서울호텔아트페어(2012), 뉴칼레도니아호텔아트페어(2012), 홍콩호텔아트페어(2013)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 이름난 아트페어에 작품을 출품하여 해외 대중의 사랑을 받고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왔다.




      


              〈비 오는 날〉, 41×41㎝, 유리 및 복합 재료, 2009                      〈숲을 만나다〉, 26×42㎝, 유리 및 복합 재료, 2009




  

빛을 만나다〉, 46×46㎝, 유리 및 복합 재료, 2009                                           〈빛을 만나다2〉, 46×46㎝, 유리 및 복합 재료, 2009



흙과 브론즈, 목재 받침 위에 아스라이 놓인 유리 원반 위에 그려진 풍경, 선연한 그 유리 위 나무와 들판, 하늘 등의 목가적 풍경은 감상자를 몽상에 빠져들게 한다. 그 자연은 실재하는 자연이라기보다 작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내면화된 풍경, 마음의 자연이다. 조각을 전공한 이현숙 작가는 작품의 주된 오브제로 ‘유리(glass)’를 사용한다. 유리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그 특유의 발색과 영롱함으로 인해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재료다. 특히 햇빛에 반사되는 유리 빛은 내면의 심상을 일으키거나 즐거운 기억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작가는 이 신비스런 유리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2004년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에도 작가는 유리를 오브제로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당시 작가는 푸른 기운이 도는 유리에 숲과 물과 대지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이현숙 작가의 작품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감상 포인트는 ‘색(色)’이다. 유리 위에 안료로 채색한 하양과 까망, 점성이 드러나는 코발트블루와 대비되는 먹색. 유리가 주는 유기적 질감 위에서 먹먹하고도 힘 있게 말 건네는 색들. 그 형과 색의 향연 속에서 감상자는 추억을 회상하고, 또 그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침묵하게 된다. 몽환적이고도 아름다운 자연, 아련한 추억을 상기시키는 작가의 작업은 2009년 전시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미술평론가 김종길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실재의 이미지들이 내면화된 풍경과 스스로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마음의 풍경”이라 표현했다.


“(이현숙 작가의) 작품들은 두 개의 풍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재의 이미지들이 내면화된 풍경과 스스로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마음의 풍경이 그것이다.

풍경 하나. 동선(銅線)이 유리 안에서 만들어 낸 풍경은 깊게 침잠한, 침묵의 고요를 보여 주는데, 물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무저갱의 수초(水草)들처럼 부유하고 있다.

작가는 어둠과 슬픔의 그늘이 아닌 생명의 환한 빛으로 충만한 내면 풍경을 보여 준다.

풍경 둘. 샘물처럼 길어 올린 그녀의 마음 밭은 ‘색’이다. 색의 꽃밭이다. 봄날의 산수유와 들녘에 흐드러진 야생화, 이름 있는 것과 없는 것, 세월이 지층처럼 쌓인 마음 밭이다.

이 색의 향연은 색동으로 춤을 추는 대지의 환한 미소다. 그 풍경은 마음 서늘한 아름다움이다.”

– 김종길, 「물의 빛, 대지의 미소」에서



유리가 가진 깊이감은 유리가 아니면 느끼지 못한다.

때문에 작가는 유리 본연의 색채와 빛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조명과 프레임을 항상 고민한다.



유리라는 ‘깊이’


파리 유학 당시 작가는 아이 키우느라 조각 대신 조형예술학 이론을 공부했다. 한국에 왔을 때 유리 공예를 하는 후배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전시에 초대했는데, 보는 순간 유리에 매료되었다. 처음에는 초록색 유리가 주는 깊이감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는 친구의 권유로 남서울대학에서 진행하는 여름 워크숍을 수강했고, 90년대 후반부터 유리를 소재로 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교수인 친구의 연구실에서 가마를 얻어 쓰거나, 후배 남편의 작업실 좁은 한편에 가마를 사서 기법과 온도 테스트 등을 어렵게 숙련했다. 천안 작업실과 서울을 일주일에 서너 차례 오가는 과정 속에서도 작가는 유리의 매력을 천천히 자기화했다. “내가 초록을 특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유리가 주는 초록, 그 물성 자체에서 오는 깊이감이 드러나서 좋았다. 표면적으로 다가오는 색이 아니라 동굴처럼 다가오는 색이랄까. 또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청색 역시 좋아졌는데, 사람이 만들거나 발라서 주는 깊이가 아니라 그 역시 물성 자체에서 깊이감이 느껴졌다. 그 깊이감은 유리가 아니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가 첫 전시회를 연 2000년대 초반에는 공예 분야가 아니라, 유리라는 오브제를 작업에 활용한 여타의 전시가 전무했다. 작가는 유리를 공간에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 여러 고민들을 거듭해야 했다. 투명한 사물은 인공 조명을 쓰게 되면 발색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전시 방식, 조명의 활용 등에 어려움을 겪는다. 원반이나 사각의 형태로 된 유리 작품을 받쳐 주는 받침대 역시 재질이나 형태 선택에 오랜 실험이 필요했다. 작가의 표현대로 “달팽이 기어가듯 느리게 느리게” 하나씩 작가만의 표현을 찾아 나아갔다. 최근에는 어떻게 하면 보기 좋은 프레임을 만들어 낼지에 대해 고심 중이다. 작가는 유리 성형 기법인 퓨징(Fusing)을 활용하여 여러 겹의 유리 판 사이에 유리를 잘게 부숴 넣거나 동선(銅線)을 넣는 방식으로 드로잉하고, 여기에 슬럼핑(Slumping) 기법으로 작가가 원하는 형상의 몰딩을 만든 다음 가마에 구워 낸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작가의 작업은 회화적인 동시에 조각적이다. 잘게 부순 유리 조각이 가마에 구워지면 물방울 형상이 되기도 하고, 동선은 가는 나뭇가지나 아지랑이같이 친근한 자연 사물의 형상처럼 보인다. 그러니 작가의 작업은 회화, 조각, 공예의 분류가 의미 없는 그저 이현숙 작가의 작업일 따름이다.





기억의 풍경들


이현숙 작가는 특별히 뭔가를 표현하겠다는 의도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즐거운 여행, 유학 시절 숲에서 맡은 나무와 흙냄새의 편안함, 서울 들길에서 발견한 친근한 들꽃, 바다 풍경의 막막함과 외로움 등 일상에서 느꼈던 좋은 기억들과 그때 느낀 감정들을 떠올리며 작업한다. 당시에 느꼈던 아련한 정동들, 경험 후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 등 마음속에 남겨 둔 자기만의 풍경들을 꺼내 유리에 동선을 활용하여 드로잉 한다. 그 드로잉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형상은 때론 풀 같고, 때론 나무 같고, 때론 공기의 흐름 같기도 하다. 유리의 겹에 담긴 드로잉은 표면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안겨 있으므로, 감상자는 마치 그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현숙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아련하게 그 풍경 속으로 쑥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나의 추억이 담긴 풍경과 만나기도 한다. 그런 드로잉들이 모인 풍경. 내면화된 기억들이 자기 안에서 하나씩 제 모습과 색채를 드러내면 한 신(scene)의 아련한 풍경이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의 한 장면은 사실은 내 마음의 사진이다. 사실적인 풍경의 사진이 아니라 내 마음의 사진을 유리 안에 담아 두는 행위. 그러면 유리는 제가 가진 깊이로 그 사진을 곱게 품어 준다.



지난 7월 15일,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후텁지근한 여름날 이현숙 작가의 파주 작업실로 쉰 명 넘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이날 작가는 흔히 접하기 힘든 유리 작업에 필요한 가마, 몰딩, 절단하기 전의 유리판들을 차례로 보여 주며 자신의 작업 과정을 방문객들에게 설명했으며, 작업실 한편 채광 좋은 공간에 전시 공간을 마련하여 작가의 지난 작품들과 최근 작업들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직접 유리 접시 위에 스펀지로 물감을 찍어 자신의 문양을 새겨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체험 워크숍을 준비했다. 참여자의 작업은 말리고 몰딩 처리 후 가마에 굽는 후작업이 필요하므로, 행사 후 개개인에게 별도로 배송해 주기로 했다. 사실 이 시간을 위하여 이현숙 작가는 오랜 기간 준비했다. 워크숍 참여자 수에 맞추어 커다란 유리판을 규격에 맞추어 절단하는 작업부터, 절단 후 사포로 다듬는 작업, 유리에 문양을 낸 스펀지를 제작하고, 여러 개수의 제작을 가마에 구워야 하므로 몰딩도 새로 제작해야 했다. 작가의 이러한 수고로움 덕분에 행사 당일 참여자 모두 유리의 매력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기억은 그 자체보다 기억되는 것, 무의식적으로 어느 날 문득 상기되는 회상이 현재의 내게 더 의미 있는지 모른다. 다시금 떠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거나 아련하다는 방증이니. 그 기억은 어느 봄 문득 골목을 걷다 라일락 향기를 맡을 때 내게 오기도 하고, 이제는 훌쩍 자란 자녀와 집 근처를 산책할 때 흙냄새를 맡으면서 어릴 때 아이 모습이 담긴 추억으로 내게 오기도 한다. 이현숙 작가는 일상의 소중한 체험들을 떠올리고 그것을 자연 풍경의 이미지로 담아내는데, 그 자연은 현실의 자연이 아니라 ‘내면화된 자연’이자 작가만의 그림 숲이다. 그 풍경을 드러내려면 유리가 가진 그 본연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때로는 그 물성을 극복해 작가 자신의 빛깔로 조성해야 한다. 그 풍경과 빛깔은 그래서 작품 안에 담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작가는 천천히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인가, 이현숙 작가의 작품들을 감상하니 자크 프레베르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유리와 유리에 풍경을 그리는 작가, 그리고 유리에 ‘나’를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섬세하게 고민하는 작가. 새와 새를 그리는 나, 그리고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인의 마음. 그 기다림과 풍경과 시간과 기억과 조심스러움이 서로 닮아 있다. 우리도 때로는 풍경 속에 들어가, 빛이 주는 깊이감 속에서 위로받으면서, 나의 기억을 만나, 천천히 시간을 머금고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가장 필요하리다.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간단한 것을

뭔가 아름다운 것을

뭔가 쓸모 있는 것을 그릴 것

그다음엔 그림을

정원이나

숲이나 (……)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리고 새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 문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러고는 새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의 싱싱한 바람과

햇빛의 가루를

여름의 뜨거운 공기 속 풀벌레 우는 소리 또한 그릴 것

그러고는 새가 마음먹고 노래하기를 기다릴 것

혹시라도 새가 노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림을 잘못 그렸다는 신호

그러나 새가 노래한다면 좋은 징조

당신이 사인을 해도 좋다는 신호

그러거든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를 뽑아서

그림 한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면 된다.

– 자크 프레베르,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김화영 옮김)



글_이정화(미술비평, 독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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