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지명이 품은 경기도

경기도의 이야기

천천천 경기천년 기자단은 2018년은 경기천년의 해를 맞아 천년을 이어온 경기도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미래의 꿈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경기도 내 거주자와 학생, 직장인들로 꾸려진 기자단입니다.




2018년은 경기도가 천년이 되는 해입니다. 1018년 고려 현종이 당시 도읍지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마을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고 '경기'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천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경기도를 보며 경기도 내의 여러 지명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그 의미와 유래가 궁금해졌습니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는데 그중 면목동은 우스갯소리로 면목(面目)이 없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훗날 알고 보니 조선시대에 이곳이 중랑천 인근에 있어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있었고, 강가 초원에 말을 훈련시키기 좋은 마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면목동은 그 앞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렇듯 지명의 유래를 알다 보면 역사적 지식 또한 얻을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본인이 살고 있는 지역 이름의 뜻이나 유래를 잘 알고 계시나요?


한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도 좋은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불릴 지명은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짓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에 찾아본 경기도와 몇몇 지역의 이름에 얽힌 유래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경기도(京畿道)


태조왕건이 918년 고려를 건국하고 경기도 개성을 도읍으로 지정합니다. 이후 고려 현종 9년이 되던 1018년에 개성을 중심으로 고려왕조의 수도권을 아울러 '경기'라고 칭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시대 이후에도 경기는 수도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경기도는 분할되었고 경기도 땅이었던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은 북한의 땅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 변화를 거듭한 뒤 현재의 경기도는 아래와 같은 모습입니다.


<현 경기도 모습>


수원(水原)


철기시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는 수많은 소국이 성립되었고 이때 구성된 삼한은 크게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는데 수원은 이 중 마한에 속했습니다. 마한의 소국 중 수원 일대에 모수국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모수'라는 이름이 '벌물'의 뜻을 갖는 것으로 지금의 수원의 뜻인 '물벌'과 글자 순서가 바뀌었을 뿐 뜻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후 수원은 '매홀', '수성', '수주' 등으로 바뀌었는데 이름에 항상 '물'이라는 뜻이 담겨있었습니다. '매홀'이라는 말 또한 '매'는 '물'을, '홀'은 '고을'을 나타내는 말로 매홀은 '물고을'이라는 발음의 표기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 도호부-수원군-수원부-화숭유서부-수원군 등으로 바뀌면서 1949년 8월 15일 수원시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해동지부 (수원부)>


안양(安養)


후삼국시대의 태조 왕건이 삼성산에서 쉬고 있는데 능정이라는 승려를 만났고 그는 이곳에 절을 세우면 만년 동안 평안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왕건이 이를 듣고 절을 세운 것이 안양사의 시초가 되었고 절 이름인 안양은 불교의 극락정토를 지칭한다고 합니다. 극락정토란 모든 일이 원만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아래의 지도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전쟁 때 적들의 공격을 덜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인덕원은 조선 초부터 내시들이 살던 마을로 신체적으로 거세된 몸이나 환관이라 하여 임금을 가까이 대할 수 있는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그 신분에 어울리게 남에게 어진 덕을 베푸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에서 인덕(仁德)이라는 마을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마을에 공무를 위해 여행하는 이들을 위한 숙소인 원(院)을 두게 되면서 인덕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고종8년때의 안양의 지도>                                                                 <인덕원 옛터 포석>



성남(城南)


기원전 18년경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위례성의 옛 터로 추정되는 유서 깊은 지역으로써, 추후 신라가 이 지역을 함락하여 신주(新州)로 하였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한주로 개칭되었습니다. 성남을 포함한 한주 지역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지배하에 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광주목-한성부 광주군-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지역을 분할(성남) 하였습니다. 성남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특수한 목적(인구분산) 하에 정책적으로 개발된 인공도시이며, 도시개발 이전까지의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시의 일부와 돌마면, 대왕면, 낙생면으로 이루어진 산간벽지에 불과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전해져 내려오는 가장 유력한 설은 남한산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성남이라고 불렸다는 것입니다. 그 중 정자동은 조선조 인조 때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청나라에게 신하의 예를 행하기로 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는데 이때 호국 공신이었던 이경인은 치욕적인 국난을 부끄럽게 여겨 이곳 탄천변에 정자를 건립하고 독서를 하였다 하여 정자동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현 성남지도>



이천(利川)


고려시대의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된 지명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이름 중 하나로 이천이 있습니다. 고구려 때 명칭은 남천현이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황무현으로 바뀌어 한주(漢州)에 소속되었습니다. 고려 개국 이후에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이 한주의 지방 중 서목의 호족이 고려 군대를 도와 강을 잘 건너게 해주었는데 왕건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통일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왕건은 주역의 '이섭대첩'이라는 말에서 이천이라는 지명을 가져왔다고 전해집니다. 이섭대첩은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뜻으로 도전 정신을 강조할 때 쓰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천은 여주와 더불어 맛 좋은 쌀을 생산하기로 유명한데, 이천의 쌀에는 광채와 가시랭이가 있다 하여 자채(紫彩)벼라고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신라에서 고려, 조선을 이어오면서 군주나 귀족들이 특히나 선호했던 쌀로 현재까지도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천의 안흥 지역에서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한 물을 안흥지에 가두어 두었으며, 이 안흥지는 안층 방죽 또는 방축으로도 불렸는데, 이 방죽의 물로 이천의 넓은 논에 물을 대어 한반도 제일의 품질을 자랑하는 쌀의 주산지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곳은 안흥 저수지로 개발되어 서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천 지명의 유래>


[지명이 품은 한국사]라는 책을 보면, 선현들께서는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 했고, 그렇게 말과 기록을 남김이 분명 허언이 아니었음을 우리 후세인들은 알고 있어야 할 대목인 듯합니다. 그리고 금수강산 가는 곳곳에 켜켜이 쌓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흔적과 함께 살아온 지명(地名)을 단순하게 여기지 말자는 글이 있습니다. 오랜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적 혹은 지역적인 중요성과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역사적 사실 속에서 각 지역에 해당하는 지명을 보면 평소와 달리 다가옴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 경기도와 경기도 문화재단에서는 '경기천년'이라는 지난 천년의 시간을 돌이켜보고, 다가올 미래의 경기천년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가 나에게로 와 꽃,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는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처럼 지명의 의미나 유래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 또 경기천년 프로젝트를 들여다보고 참여하는 것도 우리가 사는 경기도를 더 뜻깊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경기천년 기자단이었습니다.





세부정보

  • 자료출저/ 수원,안양,성남,이천 시청 홈페이지, 지명이 품은 한국사, 수원문화원,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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